자동차 시장 세대교체 바람… 소형차·MPV는 단종 위기, 고급 세단의 질주… 차박 열풍에 SUV도 인기몰이
박윤구 기자
입력 : 2020.11.02 16:29:38
최근 20년 사이에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빠르게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생산공정 기술이 발전하고 소비 트렌트가 변화하면서 한 세대를 풍미했던 차량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차량들이 들어서고 있다. 고유가 시대 서민들에게 사랑받던 경차와 해치백, 소형 세단, 다목적차량(MPV) 등이 소리 소문 없이 단종된 반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고급 세단은 빠르게 약진하며 국내 시장을 양분했다. 해외에서도 ‘딱정벌레차’로 불리는 폭스바겐 비틀과 40년 역사의 포드 피에스타가 생산 중단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경차·해치백·소형 세단 등 소형차의 몰락
뛰어난 연비와 낮은 유지비로 골목길 사이를 누비는 소형차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았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실내공간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차급을 뛰어넘는 공간 활용성을 자랑하는 소형 SUV에 밀려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2000년 국내 베스트셀링카 6위에 이름을 올렸던 대우자동차(現 한국GM) 마티즈는 당대 인기가수 핑클이 출연한 CF 광고, 개그맨 노홍철의 애마 ‘홍카’ 등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불과 십여 년 만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2011년 후속 모델인 쉐보레 스파크가 출시됐지만 지난해 판매실적이 3만5513대로 2000년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경차뿐만 아니라 해치백과 소형 세단 또한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르노삼성자동차는 소형차 클리오의 판매를 중단했고 한국GM 또한 소형차 아베오를 단종 조치했다. 올 들어서는 현대자동차가 준중형 해치백 모델 i30와 쿠페형 해치백 벨로스터의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지난 2007년 국내에 첫 출시된 i30는 고효율의 파워트레인과 안정적인 승차감으로 유럽에서는 인기를 얻었지만 ‘해치백의 무덤’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는 수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부 마니아층에서 호응을 얻은 벨로스터는 일반모델 대신 고성능 N모델만을 생산하기로 했다. 이 밖에 르노삼성 SM3와 SM5, 현대차 i40 등도 최근 수년 사이에서 시장에서 퇴출됐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현대차 엑센트와 기아차 프라이드는 국내 대신 해외에서 새롭게 활로를 찾았다. 소형차 시장의 절대강자로 불리던 현대차의 간판 모델 엑센트는 지난해 국내에서 단종됐지만 미국과 러시아(쏠라리스), 중국(베르나), 인도,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가며 수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기아차의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프라이드 또한 2017년 국내 판매가 중단됐지만 ‘리오’라는 새 이름을 달고 해외 전략형 모델로 수출되고 있다.
2016년형 카렌스
▶스타렉스, 카니발만 살아남은 MPV 시장
휘발유보다 저렴한 LPG를 연료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선보였던 다목적차량(MPV)은 소형차와 함께 국내 자동차 시장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모델이다. 2000년에는 기아차 카렌스와 현대차 스타렉스, 한국GM 레조가 나란히 베스트셀링카 3~5위를 차지하며 연간 20만 대 이상의 판매실적을 자랑했다. 7인승 이상 차량은 승합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세금 부담도 적었고 ‘패밀리카’라는 개념을 사실상 처음 도입하면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지난 1999년 처음 시장에 데뷔한 기아차 카렌스는 두 차례의 풀체인지를 거치면서 출시 16년 만에 글로벌 누적판매량 100만 대를 돌파한 ‘밀리언셀러’ 모델이다. 당시 고급차량에 주로 적용됐던 듀얼 에어백과 내비게이션, 열선시트 등 다양한 옵션이 장착됐고 지속적인 상품성 개선으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경쟁모델인 한국GM 레조가 2007년 단종되면서 한때 MPV 시장을 독식하기도 했지만 세제혜택 축소와 SUV 돌풍에 밀려 2018년 끝내 단종됐다.
2020 그랜드 스타렉스
기아차 카렌스의 아성을 위협하던 한국GM 쉐보레 올란도는 2018년 군산공장 폐쇄와 함께 국내 판매가 중지됐다. 지난 2011년 출시된 올란도는 안정감 있는 주행성능과 넉넉한 실내공간, 뛰어난 가성비로 인기를 얻었다. 신차 시장은 물론 중고차 시장에서 인기 모델로 꼽혔던 올란도는 한국GM의 판매실적을 견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우(現 한국GM)의 처음이자 마지막 MPV 차량인 레조 또한 휴가철 캠핑 차량으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출시 7년 만인 2007년 국내에서 단종됐다.
현재 MPV 시장에서 살아남은 모델은 기아차 카니발과 현대차 스타렉스 등 사실상 두 모델에 불과하다. 카니발은 지난 2015~2019년 5년 연속 베스트셀링카 TOP10에 이름을 올리며 오랜 기간 흥행을 이어왔다.
지난 8월에는 6년 만에 4세대 완전변경(풀체인지) 모델이 출시됐는데 독보적인 공간 활용성과 최신 편의사양, 첨단 신기술 등으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 덕분에 사전계약 하루 만에 2만3006대를 계약하며 국내 자동차 산업 역사상 최단시간, 최다 신기록을 경신했다.
현대차 스타렉스는 연간 판매량이 4만 대 선으로 떨어졌지만 밴(3·5인승), 어반(9인승), 웨건(11·12인승), LPi(12인승) 등으로 고객의 선택폭을 넓히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아차 K5
▶팰리세이드, 싼타페, 쏘렌토… SUV의 약진
최근 자동차의 역할이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캠핑과 레저용 생활공간으로 확대되면서 차급을 가리지 않고 SUV 열풍이 불고 있다. 2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소형에서부터 준중형, 중형, 대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SUV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쏘렌토와 팰리세이드, 싼타페, 셀토스 등 네 개 SUV 모델이 올해 1~9월 베스트셀링카 TOP10에 이름을 올리는 등 사실상 올해는 ‘SUV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아차의 중형 SUV 쏘렌토는 2014년 3세대 모델 출시 이후 6년여 만에 4세대 모델이 새롭게 출시됐다. 강인함과 세련미를 동시에 담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바탕으로 대형 SUV급의 공간 활용성, 강력한 주행성능, 첨단 안전·편의사양으로 호평을 받으며 3월 사전계약 당시 하루 만에 1만9000건에 달하는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쏘렌토 사전계약 고객 중 30~40대 비중이 58.6%에 달했는데, ‘패밀리 SUV’를 원하는 밀레니얼 대디들이 몰린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의 대형 SUV 팰리세이드는 SUV 시장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모델이다. 3000만원대 중반의 가격으로 역대급 가성비를 갖췄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개월 이상 출고를 기다리는 고객들이 줄을 이었다. 출시 2년 만에 현대차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SUV 모델로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지난 5월 최상위 트림 ‘캘리그래피’가 새롭게 추가되고 고객 선호 사양을 확대 적용한 연식변경 모델이 출시되면서 올해도 매월 5000대 이상 판매고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의 중형 SUV 싼타페 또한 2018년 출시한 4세대 모델의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이 지난 6월 공개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브랜드 고유의 디자인 ‘센슈어스 스포티니스’를 바탕으로 차세대 플랫폼과 파워트레인, 고강성 경량 차체구조 등을 적용했다. 이밖에도 제네시스 브랜드 최초의 SUV GV80과 기아차 셀토스,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 르노삼성 XM3 등이 올해 연이어 출시되며 SUV 인기를 입증했다.
기아차 프라이드
▶성공의 아이콘 그랜저… 고급 세단 질주
SUV가 다양한 라인업으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지만 국내 자동차 시장의 절대 강자는 여전히 세단이다.
특히 ‘성공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현대차 준대형 세단 그랜저는 2017~2019년 3년 연속 베스트셀링카 1위와 10만 대 클럽 입성을 달성하며 세단 시장을 이끌고 있다.
고객들의 입맛에 맞춰 차체를 더욱 키우고 다양한 주행 편의·안전사양으로 고급화에 성공한 중대형 세단들이 전통과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 1986년 첫 출시된 현대차 그랜저는 쏘나타와 포터 등과 함께 가장 오래된 국산차 모델 중 하나다. 1990년대에는 한국 제일의 승용차로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최근 변화에 민감하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영 포티(3040세대)’ 공략에 성공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6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출시된 이래로 거의 매월 1만 대 이상 팔려나가고 있다. 11영업일 만에 사전계약 실적이 3만2000대를 넘었지만 하이브리드 모델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출고까지 수개월 이상 대기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GM 스파크
K5와 아반떼, 쏘나타 등도 최근 신차 출시를 계기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
K5는 지난해 말 3세대 풀체인지 모델을 출시한 데 이어 최근 연식변경 모델까지 선보이면서 지속적으로 상품성을 개선하고 있다. 고객들이 선호하는 사양들을 기본화하면서도 2000만원대 중반~3000만원대 초반의 합리적인 가격을 유지했다.
아반떼와 쏘나타 또한 각각 7세대 완전변경 모델, 8세대 연식변경 모델 신차 출시 효과로 올해 베스트셀링카 TOP10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제네시스 브랜드의 탄생을 이끈 준대형 세단 G80도 지난 3월 3세대 완전변경 모델을 출시하고 고급차 시장 1위를 굳히고 있다. 자동차업계에서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모델별 세대교체가 앞으로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전기차와 수소차를 중심으로 친환경차에 대한 고객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디젤과 가솔린 위주의 파워트레인도 교체될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는다.
기아차 쏘렌토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형차 시장은 사라졌고 차박 문화 활성화로 인해 SUV와 미니밴이 다시 주목을 받는 등 패러다임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다”며 “최근 완성차 제조업체 입장에서도 경차나 소형차보다 수익성이 뛰어난 SUV에 집중하고 있지만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시장이 변화하면서 제품별 라이프사이클은 더욱 더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