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예측을 하는 보고서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월 초에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권위 있다고 알려진 두 개의 보고서가 거의 동시에 발간됐다.
영국의 인공지능 연구자 두 사람이 매년 10월 발표하는 ‘인공지능 현황 보고서(State of AI 2020)’ 와 가트너에서 발간한 ‘인공지능 사이클 보고서(The Gartner Hype Cycle for Artificial Intelligence 2020)’가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보고서는 상당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주장에 대해서는 의견대립을 나타냈다. 두 보고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2021년 인공지능의 산업적 트렌드를 한번 가늠해 본다.
▶1.뛰어난 연구소의 기술적 우위는 심화된다
영국에서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에만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을 만든 ‘네이선 비나이쉬’와 또 다른 인공지능 스타트업 엔젤투자자이자 영국 런던의 연구중심 종합대학인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교수이기도 한 ‘이언 호가스’ 두 사람은 매년 10월경 인공지능 현황 보고서를 발간한다. 177페이지 파워포인트로 구성된 2020년판 보고서에서는 인공지능 분야 연구의 현황과 미래 트렌드에 대한 포괄적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번 2020년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인공지능 연구가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 간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인공지능 연구결과물들이 자신의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비율은 15% 정도로 전혀 변화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오픈AI나 딥마인드 등과 같은 인공지능 연구개발 기관들처럼 코드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공지능 산업 생태계 입장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는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몇몇 연구기관들이 다른 연구기관들과 월등한 차이를 벌릴 수 있다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픈AI 같은 곳이 만드는 자연어 처리 엔진 GPT-3 는 범접할 수 없는 기술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000개의 변수들을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키는 데 1달러 정도가 소요된다고 본다면, GPT-3는 1000만 개 정도의 변수들을 학습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1000만달러(약 116억원) 정도의 예산이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돈이 없으면 GPT-3와 같은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다.
보고서를 발간한 두 사람은 향후 12개월 내에 약 10조 개 정도의 변수를 학습시킨 대형 자연어 처리 인공지능이 등장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인공지능 연구가 갈수록 자본집약적이 되면서 인공지능 기업들이 더 많은 투자유치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 그게 두 사람이 바라보는 중요한 트렌드였다.
▶2.반면, 실용적 인공지능은 더 대중화된다
이에 반해 가트너의 ‘인공지능 사이클 보고서’는 다소 상반될 수 있는 예상을 담았다. 인공지능 현황보고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소수의 기관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1년간 더욱 보편화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예를 들어 챗봇(Chatbot)과 같은 대중적 인공지능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가트너 보고는 향후 1년간 챗봇의 시장침투율이 향후 1년간 20~50% 정도로 상향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업들의 사이트에서 챗봇은 5~20% 정도가 사용되고 있는데, 앞으로 1년 동안 지금 쓰고 있는 곳보다 많은 회사들이 홈페이지에 챗봇을 도입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특히 올해 가트너 보고서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공지능의 민주화’였다.
보다 많은 기업들이 챗봇과 같은 인공지능을 간편하게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본격화되는 시기가 향후 1년이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트너는 GPU를 통해 인공지능을 가속화하는 기술이 좀 더 보편적으로 쓰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역시 지난 1년간에 비해 앞으로 1년간 활용도가 100%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엔비디아 같은 그래픽처리 반도체 제조회사들은 인공지능 학습에 뛰어난 성능을 보인다고 알려진 GPU를 데이터센터에 심는 작업들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는 더 많은 사용자들이 인공지능 처리 성능이 뛰어난 반도체들이 담긴 클라우드 서버를 활용해 인공지능을 빠르게 학습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가트너는 보다 많은 서비스 개발자(대기업, 스타트업, 연구기관, 공공기관, 독립개발자 등)가 인공지능 서비스를 빠르게 상용화할 수 있게 된다고 내다봤다.
엔비디아의 GPU
▶3.인공지능, 의료 분야 활용 본격화된다
두 보고서가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인공지능의 활용처는 단연 ‘헬스케어’였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애저’와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들은 신약개발을 인공지능으로 진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솔루션들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넷플릭스 영화 <판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에 나왔던 제이컵 글랜빌 ‘디스트리뷰티드 바이오’ 창업자 같은 경우도 2002년 유행한 사스(SARS) 바이러스를 컴퓨터 공학으로 변이시켜 그에 맞는 항체조합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연구소인 ‘딥마인드’는 2016년에 이미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전 세계 전문가들을 눌러버리는 성과를 낸 적이 있다. 이처럼 컴퓨터가 수십억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바이러스를 콕 찍어낼 수 있는 단백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신약개발은 불가능하지 않다. 현재 다수의 제약회사에서 이처럼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인간의 질병을 처리하는 신약들을 찾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장이다.
보고서는 특히 구글 딥마인드가 단백질 구조 분석을 넘어 향후 1년 이내에 뭔가 이 분야에서 대단한 성과를 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헬스케어 쪽에서 대거 활용될 것이라는 점은 가트너의 ‘인공지능 사이클 보고서’도 동의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향후 1년 동안 인공지능 사용이 급격히 증가할 분야로 5가지를 꼽았다. ▲헬스케어 ▲바이오 사이언스 ▲제조업 ▲금융업 ▲공급망 관리 등이었다.
▶4.세계 각국의 군사적 AI 투자 강화
현재 미국은 우주군(space force)을 창설하는 한편, 전국의 과학기술자들을 창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투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공군은 지난해 11월 샌프란시스코 힐튼 호텔에서 우주를 주제로 스타트업들의 발표를 듣는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공군은 이 자리에서 선정된 스타트업들에게 1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과제에 대한 연구비를 수표로 바로 지급해 줬다.
이런 다양한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활동 중에서도 인공지능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핵무기 개발을 위해 미국이 전 세계 최고 과학자들을 모집해 진행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군사목적으로 개발되는 인공지능에 미국은 민간의 힘을 끌어 모으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미국의 움직임을 중국과 유럽·러시아 등의 각국들이 모른 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작은 미국이 먼저 했지만 주변국들도 당연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인공지능 현황 보고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유럽이 국방분야 인공지능에 1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각기 투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엔비디아에서 내놓은 59달러짜리 인공지능 개발자 키드 ‘젯슨 나노’의 모습. 가트너는 이런 제품들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공지능이 더욱 민주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람들만 모여서 옷을 만들던 공장이 있었다. 그런데 방적기 하나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할 수 있을까? 정답은 (당연하게도) ‘아니다’. 기계가 들어옴으로 인해 사람들의 업무형태는 완전히 달려져야만 했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계에게 맡기고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이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자신이 마음대로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회결정론). 허나 실상은 기술 때문에 인간이 통제되는 경우들도 많다(기술결정론).
어쩌면 인간과 기술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동등한 주체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그래서 인간과 기술 둘 사이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인간-기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했다(네트워크 이론). 인공지능 분야 석학인 앤드류 응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랜딩AI 창업자)가 최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 인공지능연구소(HAI)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조직 내부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을 포함시킨 업무 프로세스 연구가 더 필요”
인공지능 석학 앤드류 응 스탠퍼드대 교수
그는 병원에서 인공지능의 활용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인공지능이 어떤 환자의 사망확률을 70%로 예언할 수 있는 기술은 현재 나와 있으나, 어떤 근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왔다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뛰어난 인공지능 기술을 갖고 있는 병원이라 하더라도 그를 활용할 수가 없는 경우들이 탄생한다. 응 교수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관계 맺는 방식과 프로세스를 정립하는 것이 인공지능 산업의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비록 인공지능의 가능성은 한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인간 사회에 인공지능이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은 이제 연구 초기 단계라는 얘기다. 응 교수는 “사회과학, 경제학, 인류학자들의 더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