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호출 시장 ‘세 마리 용’ 그랩 - 고젝 - 올라
순식간에 유니콘 넘어 100억불 ‘데카콘’ 변모
인구 6억5000만 명의 동남아시아 시장이 혁신 기업 간 경쟁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차량 호출을 기반으로 음식·택배 배달까지 서비스 영역이 무한증식하고 있는 ‘차량 호출 시장’ 쟁탈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거대한 시장을 상대로 선점 전쟁을 치르는 기업은 싱가포르에서 시작한 그랩(Grab), 인도네시아의 고젝(Go-Jek), 인도의 올라(Ola) 등 3곳이다. 3개사 모두 2010~2012년 보잘 것 없는 스타트업으로 출발했지만, 현재 시장에서 평가 받는 합계 기업가치가 무려 300억달러(약 36조원)에 이른다. 한때 기업가치가 1000억달러를 뛰어넘었다가 최근 성장 한계로 800억달러대까지 떨어진 미국의 차량호출 서비스 기업인 우버를 곧 따라잡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평가다. 동남아 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非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기업들의 공격적 투자도 세 마리 공룡의 무한성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일본의 소프트뱅크·도요타, 한국의 현대차·SK 등이 3개 공룡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며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와 현지 합작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랩’ 본사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주문자가 스마트폰으로 그랩 앱을 확인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세 마리 공룡에 올라타자”
글로벌 기업 투자 쟁탈전
2010년 초반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출신인 앤서니 탄(37)이 싱가포르에서 설립한 그랩과 같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온 나딤 마카림(35)이 인도네시아에 세운 고젝은 설립 후 10년도 안 돼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을 뛰어넘는 데카콘(10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아시아의 우버’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 그랩은 현재 동남아 싱가포르 등 8개국 350여 개 도시에서 사업을 진행하며 연 매출 1조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차량호출 서비스를 비롯해 음식·택배 배달, 모바일 결제는 물론 해외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평가에서 그랩은 현재 140억달러(약 16조8000억원)의 기업가치를 보유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동남아 최초로 1억 명이 넘는 사용자를 확보하는 등 화려한 트랙 레코드와 핵심 투자자이자 대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의 지원을 토대로 시장은 그랩이 동남아 최대의 모바일 O2O(온라인 기반 오프라인 서비스) 플랫폼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4년 첫 투자를 시작으로 그랩에 쏟아 부은 자금은 2조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동남아 카헤일링 시장을 장악한 그랩보다 2년 먼저 사업을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고젝’도 3억 명에 육박하는 인도네시아 시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2010년 오토바이 기반 택시 호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고젝은 카헤일링 이외에도 오토바이 및 차량을 활용한 음식 배달, 택배, 공과금납부 등 생활 전반에 대한 종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성장 잠재력을 간파한 구글과 텐센트 등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올해 기업가치가 100억달러를 돌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데카콘 출현 사례다. 이와 관련해 인도네시아대학은 올해 3월 고젝의 인도네시아 경제기여도를 분석한 보고서를 내고 “지난해 고젝의 이륜차 호출 서비스(고라이드), 사륜 호출 서비스(고카), 음식 배달(고푸드), 주문형 생활 서비스(고라이프) 등 4개 사업에서 30억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고젝 서비스를 통해 창출된 고용 효과와 연계 서비스 산업의 확산 등이 망라된 규모다.
고젝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시장은 고젝이 올해 매출 10억달러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대 연구팀은 고젝의 직접 매출과 별개로 중소상공인 매출 향상과 신규 일자리 창출 등으로 지난해 인도네시아 경제에 30억달러(약 3조6000억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차량 호출을 넘어 생활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고젝이 영세 사업자들의 재기에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고젝은 인도네시아 시장 확대에 만족하지 않고 말레이시아까지 사업 진출을 타진하고 있어 그랩과 진검승부를 펼칠 전망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최근 고젝의 말레이시아 신규 진출을 승인한 상태다. 이는 그랩의 등에 올라타 말레이시아 시장에서 시장 확대를 노리는 SK·쏘카에도 중요한 상황변화로 작용할 전망이다.
양 회사는 올해 1월 말레이시아 합작법인을 출범해 본격적인 차량공유 서비스를 시작한 상태다. 이를 위해 지난해부터 SK그룹은 그랩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해 그랩과 협력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고젝의 출현과 같은 시기인 2010년 설립된 스타트업 ‘올라’도 인도 시장의 탄탄한 수요를 기반으로 데카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인도 명문대인 인도공과대 뭄바이 캠퍼스 출신인 바비시 아가르왈(34)이 설립한 올라는 지난해 월 이용자 1500만 명을 달성하며 인도를 대표하는 차량공유 업체로 부상했다.
아가르왈 CEO는 인도 지역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 진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 등에 진출해 우버 이츠와 음식 배달 서비스에서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은 뒤 이르면 2022년 기업공개(IPO)에 나서겠다고 그는 예고했다.
지난 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초청으로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亞 인구구조 변화도 변수… 중국에서 인도·印尼로 ‘중심 이동’
“아시아의 인구변화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갈수록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시장 가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차량 호출 서비스에 기반한 동남아의 다양한 모빌리티 시장에 진출을 타진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아시아의 인구 변화를 함께 주시하고 있다.
상황은 이렇다. 국제연합(UN) 분석에 따르면 오는 2027년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 간 중대한 인구학적 ‘골든크로스’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올해 기준으로 중국 인구는 14억3000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18.6%를 차지하는 부동의 1위 국가다. 그 뒤를 인도(13억7000만 명·17.7%)가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이어 미국(3억2900만 명·4.3%), 인도네시아(2억7100만 명·3.5%) 등의 순이다. 그런데 이미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시작된 중국의 인구감소 추세는 8년 뒤인 2027년 인도에 1위 자리를 내놓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모빌리티 업계는 시장의 ‘큰손’이 중국에서 인도로 바뀌고 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차그룹이 올해 3월 인도 올라에 3억달러(약 3600억원)를 투자한 것도 바로 이런 인구학적 변화를 간파한 결정이라는 전언이다. 현대차의 올라 투자액은 종전 투자처인 싱가포르의 그랩(2억7500만달러)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단일 전략투자 사례다. 인도는 동남아만큼 차량 호출 서비스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일평균 차량 호출 건수는 2015년 100만 건에서 지난해 350만 건으로 증가했다. 시장 규모도 지난해 15억달러(약 1조8000억원)에 달했고, 내년 20억달러(약 2조4000억원)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6억5000만 명의 동남아 시장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인구학적으로 맹주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3억 명에 육박하는 인구학적 흐름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 때문이다. 올 상반기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최근 재선 취임식 연설에서 “오는 2045년까지 인도네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을 7조달러로 키우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도 이 같은 자신감과 연결돼 있다. 이와 관련해 시장 최대 공룡인 그랩은 최근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수에 긴장하고 있다. 현지 시장조사기관 평가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차량 호출 서비스 시장에서 고젝은 56%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뒤이어 그랩이 33%로 분발하고 있지만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그랩은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인사이더 전략으로 현지 로컬 기업과 스마트시티 개발 프로젝트를 체결하는 등 등 이종 사업까지 협력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런 와중에 고젝 설립자인 나딤 마카림 CEO가 재임에 성공한 조코위 대통령 초대 내각의 교육문화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시장 확대에 새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마카림 신임 장관이 사회적으로 최대 골칫거리인 교육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적 신망을 받을 경우 고젝에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선호현상도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현지 공략을 위한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그랩 입장에서는 동남아 시장 대부분을 독식하고도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열세를 반전시키지 못할 경우 ‘절반의 성공’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다.
▶카헤일링 혁신에 숨은 ‘손정의 패권’
시장독점화 때는 소비자에 毒 될 수도
한편 그랩 투자 성공으로 동남아 카헤일링 시장 패권을 잡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인도로 헤게모니 확장을 노리고 있다.
주지하듯 손 회장은 ‘비전펀드’를 운용하며 전 세계 혁신 스타트업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그랩이 들어간 비전펀드 1호에 이어 올해 이를 업그레이드한 2호를 출격시키며 약 200여 개 혁신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단행했거나 추진 중이다.
비전펀드를 총괄하는 라지예프 미스라 대표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비즈니스 콘퍼런스 자리에서 “현재 펀드 1호에 86개 회사가 있고, 펀드 2호에 100개사가 더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비전펀드 내 186개 회사가 개별 기업이 아닌, 상호작용(Interaction)을 하게 되면 비즈니스 경쟁력은 어마어마해질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비전펀드 자체를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같은 거대한 혁신의 생태계로 만들겠다는 손 회장의 야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모든 혁신 스타트업이 손 회장의 투자 손길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바비시 아가르왈 올라 창업자는 올해 상반기 손 회장의 대규모 투자 제안을 물리쳐 주목을 받았다. 아가르왈 창업자는 손 회장이 11억달러(약 1조3200억원)를 투자하는 대신 소트트뱅크의 올라 지분율을 40% 이상 보유하는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아가르왈 창업차는 올라 설립 초기 투자자(2017년·약 3000억원)였던 소프트뱅크의 후속 투자 제안에 경영 독립성 훼손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전언이다.
손정의 회장의 제안을 거부하며 사실상 결별을 선택한 아가르왈 창업자는 경영 독립성과 사업 연관성을 기준으로 현대차(3억달러) 등 다른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손 회장을 상대로 한 올라의 투자 거절 사례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미래 카헤일링 시장에서 ‘시장 독점’ 문제를 예고하고 있다. 손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지난 2014년부터 우버에 총 38억달러(약 4조5600억원)를 쏟아 부어 최대주주(16.3%)가 됐다. 그런데 우버는 그랩의 핵심 주주다. 지난해 그랩에 동남아 사업권을 넘기면서 지분 27.5%를 확보했다. 심지어 소프트뱅크는 인도의 올라에도 초기 3000억원을 투자해 무려 30%의 지분을 확보했다. 물론 이들 기업의 초기 잠재력을 간파한 손 회장의 선견지명과 그의 손발이 된 ‘비전펀드’의 투자 배짱은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와 인도에서 거침없이 영향력을 넓히는 손 회장의 행보는 시장 경쟁 제한과 소비자 선택권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뒤늦게 아시아 카헤일링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SK와 배달의 민족뿐 아니라 현대차 등 자동차 제조사들도 그의 패권 확대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카헤일링 업체에는 예외 없이 일본의 세계적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가 따라 붙어 추가 투자를 단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에서 ‘공유’로 전환되는 자동차 소비 시장에서 소프트뱅크와 도요타가 철저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시장을 독점하는 ‘소프트뱅크 연합’에 합류하지 못하는 현대차 등 한국 완성차 업계는 아시아 차량 공유 시장 공략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 뒤늦게 현대차, SK 등 주요 기업이 그랩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국내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아시아 차량 공유 시장에서 소프트뱅크는 시장 주도 기업과 창업자의 혁신적 이미지를 등에 업고 막대한 영향력을 축적하고 있다”며 “불과 10년도 안 돼 아메리카와 아시아, 인도 시장을 장악한 소프트뱅크의 시장 지배적 지위는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