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업계에서 단일 브랜드 매출이 1000억원을 넘을 경우 ‘메가브랜드’라고 부른다. 단가가 높지 않은 식품으로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것은 ‘국민 브랜드’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며 어디서든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음료에서 칠성사이다, 포카리스웨트, 베지밀, 바나나맛우유가 대표적이고 라면에서는 신라면, 진라면 등이 대표적이다. CJ제일제당 햇반, 스팸도 단일 브랜드 매출이 4000억원에 달하는 가공식품 메가브랜드다.
지난해 가정간편식(HMR) 시장에서는 매출 1000억원이 넘는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국물요리가 1280억원, 햇반컵밥이 1050억원, 동원 양반죽이 1100억원을 기록했다. 메가브랜드는 아니지만 대상 청정원 안주야도 500억원 수준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처럼 국내 가정간편식 시장에서 메가브랜드가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첫 번째는 인스턴트·레토르트로 불리는 즉석조리식품이 우리나라 가정의 한끼식사를 실제로 대체하고 있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이런 성장하는 시장에서 유통사와 제조사간 경쟁에서 강력한 브랜드를 앞세운 제조사가 앞서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HMR는 ‘밥·국이 갖춰진 한 끼’
HMR는 제품 형태로 따지면 구매 후 바로 먹을 수 있는 Ready to Eat(RTE), 전자레인지 등으로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Ready to Heat(RTH), 장시간 데우거나 조리과정이 필요한 Ready to Cook (RTC), 재료와 소스·양념까지 하나의 패키지로 포장한 Ready to Prepared (RTP)의 4가지로 구분된다. 우리나라 식품산업 분류상으로는 즉석조리식품, 즉석섭취식품, 신선편의식품 등이 해당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HMR를 ‘간편하게 한 끼의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다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한 끼에는 각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미네랄, 비타민 등 영양소가 충분히 들어있어야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최근 내놓은 ‘2018년 식품산업정보분석 전문기관 사업보고서’에서 POS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정간편식 시장을 분석했다. 여기서는 전체 HMR 제품 중 ‘미곡 레토르트’와 ‘레토르트’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는 즉석밥, 즉석죽, 컵밥, 냉동볶음밥, 국탕, 레토르트 서양식 등을 전부 포함한 것으로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5000억원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정식이란 ‘밥과 국이 갖춰진 한식’이기 때문에 한식을 중심으로 하는 냉동식품 및 인스턴트 제품을 최근에는 가정간편식으로 보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이 HMR라는 이름을 마케팅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경이다. Home Meal Replacement를 뜻하는 HMR는 그동안 일본 등 선진국의 중요한 식품트렌드 중 하나로 언젠가는 한국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에서도 싱글족과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가정에서 간편하게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HMR 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 백화점과 마트 등을 중심으로 HMR를 파는 경우가 많았다. 식품매장에서 탕이나 찌개, 반찬 등을 현장에서 만들어 소포장해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형태의 HMR는 지금도 백화점과 마트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HMR란 백화점에서 파는 탕, 찌개나 샌드위치, 샐러드 등 테이크아웃 제품을 뜻했다. 그런데 점차 우리에게 냉동식품·레토르트 등으로 익숙한 즉석조리식품들이 점차 중요한 HMR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존에도 존재했던 가공식품들이 HMR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CJ제일제당 상온 HMR 햇반컵밥
기존의 HMR 시장에서 즉석조리식품시장을 키운 것은 유통업체인 이마트다. 해외에서도 유통회사들이 HMR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마트는 2007년부터 해외 HMR 시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2009년부터 새로운 가정간편식을 내놓게 되는데, 이 제품들 중 소갈비탕, 낙지볶음밥과 같이 간단하게 데워서 먹을 수 있는(RTH) 가공식품 형태의 제품들도 판매했다. 계열사인 신세계푸드나 다른 식품 회사들에서 만든 제품을 OEM 방식으로 판매한 것이다. 특히 이마트는 유명 맛집이나 프랜차이즈와 손잡고 제품을 내놓으면서 HMR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부여했다. 이마트는 2013년에 들어서는 1970~1980년대 신세계백화점의 PB(유통사브랜드)였던 ‘피코크(Peacock)’를 부활시키면서 HMR 제품에 가장 먼저 이 브랜드를 쓰기 시작했다. 이 같은 브랜드화도 HMR 전반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국내 대형마트 1위인 이마트가 작정하고 힘을 실어준 것의 여파가 컸다.
한편 마트·백화점과는 별도로 HMR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시장이 있었다. 바로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일찍부터 1인가구를 겨냥해 김밥, 샌드위치 같은 즉석섭취 제품을 판매했다. 여기에 도시락, 냉동식품 등이 점차 추가되면서 편의점은 중요한 HMR 수요처가 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HMR의 34.4%가 대형마트(34.4%)에서 판매되고 18.1%가 편의점에서 판매된다. 다만, 편의점은 주 고객이 1인 가구라는 점에서 마트·백화점과는 소비 패턴이 다르다.
▶치고 나가는 CJ제일제당
식품제조업체들이 HMR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유통업체들에 비해서 늦었다. 식품업체들은 예전부터 계속 HMR를 판매해왔기 때문이다. 가공식품이라는 범주에서 훨씬 예전부터 즉석카레, 즉석밥, 즉석죽, 찌개, 수프, 냉장면, 냉동만두, 냉동피자 등은 HMR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들 제품은 한 끼의 완전한 음식이라기보다는 비상식·대용식·간식으로 주로 소비되었다. CJ제일제당은 2008년 ‘맘스타임’이라는 즉석식품 전문 레스토랑을 국내에서 처음 오픈했는데 햇반을 비롯해 볶음밥, 만둣국, 컵수프 등 모든 제품을 전자레인지로 조리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미 가정식을 대체한다는 개념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시대를 앞선 시도였다. 2000년대 후반에서 유통채널에서부터 HMR 소비가 늘어나자 CJ제일제당, 대상, 아워홈 등 식품회사들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기존에 보유했던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HMR 시장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곳이 메가브랜드를 확보한 CJ제일제당이다. CJ제일제당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브랜드를 HMR 브랜드로 확장시키는 전략을 썼다. 대표적인 것이 ‘비비고’와 ‘햇반’이다. CJ제일제당은 2013년 말 출시한 냉동만두 제품 ‘비비고 왕교자’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를 통해 만두시장 1위였던 해태제과 고향만두를 꺾고 2015년 시장 1위로 올라갔다. 단일 제품 매출이 지난해 기준 1600억원에 달한다. 비비고 만두 브랜드 국내 전체 매출은 2500억원에 달한다.
CJ제일제당은 이 비비고 브랜드를 HMR 제품들에 붙였다. 2015년에는 냉동밥, 2016년에는 국·탕 등 상온 간편식에 ‘비비고’ 브랜드를 붙였다. 2018년에는 ‘냉동면’ ‘간편죽’에 비비고 브랜드를 붙이는 등 모든 한식 제품군에 비비고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비비고 왕교자’에 소비자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인 인식을 옮겨오는 효과를 냈다. 2015년에 즉석밥시장 1위인 ‘햇반’ 브랜드를 컵밥에 붙여 ‘햇반컵밥’을 내놓은 것도 비슷한 전략이다. 이 같은 브랜드 전략을 통해서 CJ제일제당은 ‘가정간편식=비비고’라는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내 HMR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그 성장의 파이를 유통업체가 아닌 제조업체(NB)들이 상당부분 가져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유통업체들의 PB가 중심인 서양의 HMR 시장과 크게 다른 부분이다. 가정에서 혼술을 할 때 안주용도로 주로 소비되는 안주 HMR 시장에서도 1위인 대상 안주야의 시장점유율이 50%가 넘는다.
HMR 시장은 중소식품사들의 비중이 컸다. HMR가 유통사들의 PB 제품으로 판매를 시작했기때문에 생산은 중소식품사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하는 데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지는 않지만 다양한 제품군이 필요하다는 점도 HMR 시장에 중소기업 비중이 많은 이유였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도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많다. 그러나 HMR에서 브랜드가 중요해지고 소비자들이 맛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강력한 브랜드를 가진 대기업 제품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상효 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곡 레토르트 시장의 경우 상위 1개 업체의 판매액이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6년 1월 49.5%였으나 꾸준히 증가하여 2018년 11월에는 59.3%로 크게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 국 시장에서 피코크 등 PB제품의 시장점유율이 45.4%였으나 2018년에는 24.7%로 줄어들었다. 이는 2016년에는 시장점유율이 26.8%였던 CJ제일제당의 점유율이 2018년에는 60.2%까지 뛰었기 때문이다. 반면 볶음밥 제조 시장에서는 PB제품의 점유율이 30.2%에서 32.7%로 소폭 증가했다. 하지만 CJ제일제당의 점유율도 12.9%에서 20.7%로 늘어났다.
대상 청정원 안주야
▶냉장고에서 식재료가 사라진다?
국내 HMR 시장의 성장을 이끈 것은 결국 소비자들의 식습관 변화다. 시장을 급속도로 키운 것은 당초 HMR 시장의 중요 고객인 1인가구보다는 자녀가 있는 가구나 노인층에서 소비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는 주부나 노인층도 HMR의 편의성과 맛에 대해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CJ제일제당에 따르면 초등자녀를 가진 가구의 국탕찌개 HMR 제품 침투율은 2015년 19.2%에서 54.7%로 크게 늘어났다. 조리냉동제품도 83.4%에서 95.8%로 늘어났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한 식사로 HMR를 내놓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뜻이다. 시니어가구의 경우 국·탕·찌개는 9.7%에서 26.5%로, 조리냉동은 24.6%에서 61.4%로 늘어났다.
이는 인스턴트 혹은 냉동식품에 부정적인 인식이 컸던 중장년층의 심리적인 장벽이 많이 허물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HMR를 포함한 소비자들의 식생활은 향후 어떤 방향으로 변할까. 최근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식생활에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키워드를 꼽는다면 ‘배달’과 ‘배송’을 감안하면 냉장고에서 ‘식재료’의 중요성은 점점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배달의 민족’ ‘요기요’로 대표되는 배달주문 앱과 이를 배송해주는 배달대행회사들의 성장으로 배달이 가능한 외식의 종류가 크게 늘어났다. HMR로 집에서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지만 외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정간편식이 가공식품이라는 형태로 외식을 가정으로 가져왔다면 ‘배달’은 이륜차 물류를 통해 외식을 가정으로 가져온 것이다. 배달은 가정에서 요리를 직접 할 필요성을 더욱 줄인다.
큰기와집 간장게장
‘마켓컬리’ ‘헬로네이처’로 대표되는 신선식품 배송 인프라가 구축된 것은 가정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고기’ ‘야채’ 등 신선식품을 오프라인매장에서 사올 필요 없이 e커머스를 통해서 밤에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에 받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e커머스는 HMR의 주요 주문채널이 되기도 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곡 레토르트 유통채널에서 대형마트 온라인은 2016년 1월 8억6086만원에서 2018년 11월 38억1633만원까지 크게 증가했다.
HMR와 함께 ‘배달’과 ‘배송’의 두 가지 키워드는 냉장고에 ‘고기’ ‘야채’ ‘생선’ 등 식재료를 저장해둘 필요성을 크게 낮춘다. 고추장, 간장과 같은 장류의 B2C 시장이 축소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과거 주부는 요리를 하기 위해 냉장고에 식재료를 보관하고 유통기한을 넘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재고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HMR 소비가 늘어나면서 식재료를 하나씩 구매해 저장해 놓을 필요성은 크게 낮아진다. 직접 요리를 하고 싶다면 밀키트로 대표되는 RTP 제품을 구매하면 된다. 외식을 언제든지 배달로 먹을 수 있고, 다음날 필요로 하는 식재료를 전날 밤에 바로 소량으로 구매할 수 있다면 가정에 지금과 같은 큰 냉장고를 보유할 필요성도 낮아진다. 신세계 그룹은 지난해 9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PK피코크’ 매장을 열었다. 미래의 ‘식품관’을 상상하게 하는 곳이다. 피코크 제품만으로 매장을 꾸린 이곳은 일반적인 슈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기, 생선, 채소를 판매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냉장고에서 이 같은 식재료가 줄어들면 유통회사들의 비즈니스 방식도 바뀔 수 있다. HMR 시장의 성장은 냉장고의 변화라는 큰 트렌드의 작은 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