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글로벌 공동기획 | (32)] 세계의 건축·건축사…요른 웃손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한 나라 이미지까지 바꾼 건축가의 상상력
입력 : 2014.09.01 17:54:16
수정 : 2014.11.21 16:22:56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공연장으로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20세기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가 1950년대 시드니의 황량한 식민지 이미지를 현대적이고 문화적인 이미지로 바꾸려는 기획으로 탄생한 건물이다. 주정부는 1955년 국제 현상설계를 통해 한 젊은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선택했고, 건축가와 엔지니어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16년에 걸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위한 불굴의 노력 끝에 이 건축물을 완공했다. 이후 한 국가의 이미지를 바꾼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54년 존 캐힐(John Joseph Cahill)을 수반으로 하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전 세계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시드니 복합문화공간 디자인을 공모했다.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미스 반 데 로에, 필립 존슨 등 당대 유명한 건축가를 포함하여 32개국 233개 작품이 출품되었다.
잘라낸 오렌지 껍질에서 떠올린 아이디어
당시 38세였던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 요른 웃손(Jørn Utzon)의 작품은 수용인원이 적고 건축물이 대지 경계를 넘어서는 등 공모 지침을 위반했다고 하여 실격 처리되었다. 그러나 교통 사정으로 뒤늦게 심사에 합류한 뉴욕 케네디공항 내 TWA 터미널을 설계한 저명한 건축가 에로 사리넨이 탈락한 작품을 보던 중 웃손 작품의 비범함에 주목했다.
그는 요른 웃손의 작품이 이전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풍부한 독창성이 돋보이고 가장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다른 심사위원들을 강력하게 설득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웃손은 오렌지 껍질을 벗기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1958년부터 설계와 공사가 함께 진행돼 1단계 기단, 2단계 콘크리트 쉘, 3단계 외장 유리벽 및 인테리어로 나누어 무려 16년 동안 이어졌다. 설계와 공사가 함께 진행되다 보니 1973년 준공 시 최종 공사비는 공모전 당시 웃손이 제출한 공사비의 10배가 넘었다. 예정 공사비가 수정 증액될 때마다 공사비 증액에 대한 모든 비난은 공사를 총괄 지휘하던 웃손에게 쏠렸고, 결국 웃손은 2단계 콘크리트 쉘 공사가 마무리되기 직전에 프로젝트 총괄책임 건축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창의적 상상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교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었던 웃손은 당시 상황에 크게 실망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호주를 떠났다. 웃손이 떠난 후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그가 떠나기 전까지 투입했던 공사비 총액 이상의 금액을 추가로 투입하고서야 오페라하우스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웃손은 준공식에 초대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했다.
설계 완료 전 공사로 비용 급증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립 착수와 함께 재원 마련을 위한 법을 제정하여 복권판매를 시작했다. 실제로 웃손이 사임하기 전까지 투입된 건설비용의 상당부분은 복권 판매를 통해 충당되었다. 주정부는 건설 예산 마련에 대한 걱정과 여론 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설계공모 후 1년여 만에 오페라하우스 설계가 완료되기도 전, 1단계 기단 공사를 강행했다. 웃손에게 설계를 완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은 채 공사를 시작해 설계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상황이 어렵게 전개된 데에는 오페라하우스 건축물 자체의 복잡한 특성도 한 이유가 되었다. 오페라하우스 건축구조물은 길이가 183m이고,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120m로 1만7800㎡(약 5384평) 대지면적을 덮고 있다. 제일 큰 쉘까지의 높이가 65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두 개 공연장을 덮고 있는 두 그룹 쉘의 축은 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사이가 벌어지며 서로 간에 약간 기울어져 있다. 이런 규모의 건물을 건립하는 것이 1950년대 장비나 건설기술 수준으로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했다. 오페라하우스의 기단은 길이 183m, 폭 95m, 높이 해발 25m로 시드니 항구 베넬롱 곶 육지 위에 해수면으로부터 25m 깊이까지 박힌 588개 말뚝으로 지지되어 있다. 웃손의 설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1단계 기단공사를 강행하다보니 2단계 공사인 쉘의 설계가 완성된 후에는 예상보다 더 크고 무거워진 쉘을 지지하기 위해 이미 완성된 기단부 기둥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해야 하는 돌발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쉘 자체의 설계나 시공은 비교할 수 없이 큰 난제였다. 공모전 당시 최초 예정공사비 산출의 근거가 되었던 애초의 쉘 디자인은 지붕과 벽의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었다. 즉 엄청난 높이와 경간으로부터 가해지는 쉘 자체의 무게에 더하여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강풍과 지진에 견딜 수 있게 쉘의 두께를 크게 늘려야 했다. 이는 다시 쉘 자체의 하중을 변경하여 웃손이 공모전 당시 상상했던 쉘의 형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더욱이 콘크리트를 현장에서 타설하기 위해 거푸집을 설치할 경우 공사비와 공사기간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 설계자인 오브 아럽(Ove Arup)과 협력하여 수많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쉘의 강성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무게를 줄이고 현장에서 거푸집을 설치하지 않는 방안으로, 현재 오페라하우스에 적용된 리브(뼈대)가 있는 조립식 콘크리트 쉘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by Ludopedia
기술 한계 극복한 구조 찾아내
원론적인 해법에는 도달했지만, 아직도 웃손의 원안과 그 후 수정된 포물선형 또는 타원형의 쉘로는 두께가 매우 두꺼워야 함은 물론이고 조립식 공법의 장점을 살릴 수도 없었다. 쉘의 기학학적 형태를 웃손의 원안이나 포물선형 또는 타원형으로 유지할 경우 쉘을 이루는 다양한 곡선의 곡률로 인해 모든 조립식 부재의 크기와 형상이 달라짐으로써 굳이 조립식 공법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거나 현장 타설로 콘크리트를 부어넣어 시공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예상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쉘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곡률의 조립식 부재를 이용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상의 쉘이 과연 존재하는가로 압축되었다. 이 문제는 1단계 기단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웃손과 아럽을 괴롭혔으며, 따라서 2단계 쉘 공사를 위한 설계 작업은 진척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웃손과 아럽은 1957년부터 196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시공 가능한 쉘의 기하학적 형태를 찾기 위해 무려 12가지 이상의 대안을 만들며 이 문제에 매달렸다. 드디어 웃손과 아럽은 1961년 중반에 더없이 아름다운 해결안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반지름 75.2m인 구의 표면에서 떼어낸 여러 크기의 삼각곡면을 좌우 대칭으로 세워 오페라하우스를 구성하는 다양한 크기의 쉘을 구현하게 되었다. 이는 쉘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일한 곡률의 몰드를 사용해 조립식 부재를 생산하게 되는 획기적인 안이다.
그런 형태가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설계자가 의도한 대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 검증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설계팀은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의 쉘에 분포하는 복잡한 응력 상태를 점검하고자 컴퓨터를 이용한 구조해석을 수행했다.
또한 축소 모델을 이용해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쉘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자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풍동실험을 수행했다. 이렇게 하여 오페라하우스의 쉘은 모두 2400개의 뼈대 부재와 4000장의 패널 부재가 현장에서 생산되고 조립되어 만들어졌다.
쉘의 외부, 마치 비늘로 덮인 듯 아름다운 흰색 표면은 100만장 이상의 세라믹 타일을 지상에서 생산된 4253매의 조립식 V형 콘크리트 패널에 대각선 패턴으로 접착제를 사용해 붙인 후 이미 완성된 쉘 구조물에 고정했다.
풍동실험까지 거쳐 세운 건물
2단계 쉘 공사가 완료되기 바로 전해인 1966년에 웃손이 물러난 후, 주정부 공공사업성은 웃손을 대신해 3단계 외장 유리와 인테리어 설계를 완성하고 공사를 총괄할 책임자로 피터 홀 등 호주 건축가 3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대공연장과 소공연장의 용도 확정 및 음향문제 해결에 따른 좌석배치, 객석 사이의 통로, 기단 외벽마감, 외장 유리 등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웃손의 설계를 살리고자 노력했다. 이들이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공연장 내 음향설계였다. 음향설계는 공연장의 축소 모델을 만들어 작업했는데, 이때 정립된 이론이 건축음향설계 및 음향과학의 발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을 사용하고, 축소모형실험 기법을 활용하여 최초로 설계했으며,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해 최초로 구조해석을 수행했다.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건설공정관리를 수행하고, 풍동실험 기법을 써서 설계한 건축물로서 건축기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1973년 10월 20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한 가운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개관식이 개최되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공식 총공사비는 당초 예상의 10배를 넘는 1억호주달러로 발표됐다. 1973년 준공 후 현재까지 공연에 4500만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했고, 1억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총공사비의 서너 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시드니와 뉴사우스웨일스 주를 넘어, 호주 국민의 자부심이자 국가의 상징 이미지가 되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건물의 진가가 발휘되자 오페라하우스이사회는 1990년대 후반 웃손과의 화해를 시도했으며, 웃손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사회는 1999년에 웃손을 이후의 오페라하우스 수선 및 보수작업을 위한 자문건축가로 추대했다. 2004년에는 기단에 있는 연회장 내부를 웃손의 설계로 개조하고 〈The Utzon Room〉이라 명명했다.
웃손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공로를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아 2003년 건축계 최고 영예의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을 수상하였다.
프리츠커 시상위원인 프랑크 게리는 1950년대에 상상할 수 없는 환경과 최고도의 공법을 조화시킨 20세기 최대 걸작을 탄생시켰다고 극찬했다. 그레이햄 잔 호주 건축설계협회 회장은 호주의 문화와 먼 미래를 내다본 영웅적 슬기를 모은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요른 웃손
1918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출생한 지역주의 건축가다. 그의 독특한 건축설계 기법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세계 건축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2003년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요른 웃손은 코펜하겐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역사가이자 도시계획가인 S.E.라스무센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고, 1945년 같은 북유럽 건축가 군더 아스프룬트와 알바 알토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교류했다. 파리에서 페르난드 레거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 실무를 경험한 뒤, 유럽 각지와 소아시아를 여행했다.
특히 모로코의 촌락과 풍경과의 융합에 관심을 가져, 킹고(Kingo)의 집합주택에 그 영향을 반영했다. 1949년 미국과 멕시코를 방문해 라이트의 탈리어신에서 공부하며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여행 중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기단 디자인의 원형이 된 멕시코의 마야 유적의 기단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지와 하늘 사이의 공간 속에서 지붕과 기단을 주요소로 하여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 건축을 추구했다. 주위 환경을 반영하는 유기적 건축과 합리적, 기하학적 건축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박스베어드 교회, 쿠웨이트 국회의사당 등이 있다. 한편 지역주의 건축은 모더니즘과 역사, 지역으로부터 나오는 요소의 단순하고 교묘한 결합이나 획일적, 공통적인 건축양식을 거부하고 지역적 성격과 특징을 모티브로 삼아 이것을 건축에 반영함으로써 지역성에 적합한 양식을 추구하는 건축사조이다.
지역적 특징이란 주로 기후, 지형 등과 같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문화, 역사, 경제 등의 요소를 총체적으로 포함한 개념이다. 지역주의 건축은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환경에의 융합, 장소의 특성 존중, 전통에 대한 고려, 자연주의, 설계에 심리적·감정적 요소의 도입, 건축행위의 인도주의적 이해 및 표현, 그리고 무형식을 표방하는 건축 등으로 합리주의의 결함을 보완하고자 나타났다. 대표 건축가로는 요른 웃손을 비롯해 알바 알토, 리카르도 보필, 파올로 솔레리 등이 있다.
박스베어드교회
요른 웃손이 토착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주목받은 작품이다. 박스베어드교회 외벽의 콘크리트 패널은 현대 보편적인 문명규범을 상징하고 있다. 외부 형태는 곡물창고나 헛간 같은 이미지로 수수하지만 입방체를 단계적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농촌의 곡물저장용 사일로와 축사의 이미지를 결합한 것으로 그 지방의 농경시대와 대지의 기억을 되살려 표현하고 있다.
웃손은 성스러운 내부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건축물의 내부는 무표정한 외부와는 달리 대지가 가진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세의 엄숙한 교회 대신 회중을 향해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제단을 가지고 있어 회중들이 그 안에서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공동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교회 내부의 대규모 공간을 덮는 문제는 교회건축 역사에서 오랜 과제인데, 웃손은 여기서 현대 건축기술인 콘크리트 쉘 구조를 사용했다. 그는 철망 매트로 만든 보강재 틀을 설치하고 그 위에 특수 콘크리트를 뿌리고 거친 형틀 자국을 예배당 천장에 노출되어 질감을 표현했다. 예배실 천장에 걸친 쉘의 볼록한 곡면들은 예배실의 양끝에서 물결치듯 상승하여 중앙부에서 파도처럼 솟아오르는 듯한 역동적인 형태로 만들고 내부의 모든 콘크리트 벽들과 천장의 쉘은 석회를 사용하여 하얗게 마감하고 있다. 밝고 빛나는 쉘 형태로 지역의 자연을 상징하는 율동적인 볼륨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쉘 천장은 목조 창문, 널로 된 칸막이, 측면 골격구조 등과 함께 서양 교회건축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