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괴담(怪談)?’
한국GM의 철수설이 재계에 또다시 퍼지고 있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단골메뉴다. 한국GM이 군산공장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한국시장에서 철수를 준비 중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다시 머리를 들고 있다.
재계에서는 한국GM 철수설이 자꾸 퍼지는 이유에 대해 “본사격인 GM이 한국GM의 회생에 대해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차 개발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던 물량까지 줄여 공장가동률을 낮추고 있기 때문에 철수설이 자꾸만 퍼지고 있다는 것. 특히 최근에는 가동률이 떨어진 군산공장을 중심으로 구조조정 신청을 받으면서 가뜩이나 불안감에 휩싸인 직원들을 동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국GM은 “한국시장에서 철수는 없다”며 밝히고 있다. 지난해 8조원대의 투자 약속을 밝힌 만큼 한국GM을 계속 끌고 가겠다는 게 본사(GM)의 의지란 설명이다.
잊을 만하면 퍼지는 ‘철수설’
GM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것은 1972년부터다. 당시 대우자동차의 전신이었던 새한자동차와 5:5의 합작 형태로 국내에 진출했다. 이후 새한자동차가 대우그룹에 인수된 후에도 GM은 여전히 합작 파트너로 자리를 지켰지만, 1990년대 초 대우자동차가 ‘국민차 프로젝트’를 통해 마이웨이를 선언하면서 1992년 한국땅을 떠났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GM은 다시 대우차를 인수하며 한국에 상륙했다. 대우사태로 위기에 몰렸던 대우차를 김대중 정부는 2002년 GM에 매각했다. 헐값 매각 논란이 있었지만, 한국GM의 전신인 GM대우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GM은 이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GM의 구세주’로 성장했다. 미국 재무부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지원을 받아 숨을 연명하던 GM이 소형차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선봉장으로 한국GM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GM은 한국GM의 성능 좋은 소형차를 바탕으로 유럽시장 재탈환에 성공했고, 세계 최대의 내수시장인 중국에도 무사히 안착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모기업의 안정화가 한국GM의 위치를 흔들었다. 서브프라임의 파도를 넘어선 GM이 매각을 고려했던 유럽의 오펠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에는 한국GM의 주력모델인 글로벌 전략 차종 크루즈의 후속모델(J400) 생산 공장 리스트에서도 한국GM 군산공장의 이름이 빠졌다. 한국GM은 이제 구형 크루즈와 마티즈만을 생산하는 단순한 생산기지로 위치가 급전직화한 셈이다.
게다가 지난해 말부터는 구조조정을 위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GM 노조에서는 “한국GM이 국내에서 철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업조정→구조조정→한국철수’로 이어지는 한국GM 철수설이 퍼지고 있는 배경이다.
실체 없는 8조원대 투자계획
한국GM 철수설이 퍼지기 시작한 지난해 2월 GM의 세르지오 호샤 사장은 “6개의 차세대 글로벌 차량과 파워트레인이 한국에서 생산될 것이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 개발을 위해 향후 5년간 약 8조원이 한국GM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한국GM의 미래 청사진으로 불리는 ‘GMK 20XX’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이다.
팀 리 GM 글로벌 생산 부사장 겸 GM해외사업부문 사장, 한국GM 경영진이 모두 참석한 간담회 자리에서 발표된 ‘GMK 20XX’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디자인센터 기능 강화와 경남 창원, 군산공장 생산 라인 등의 역량 확대 등이 포함돼 있다. 먼저 디자인센터 부문을 살펴보면 경차 및 소형차 개발본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본사 내 디자인센터를 현재의 2배로 확장할 계획이다.
또 GM의 차세대 경차 및 소형차, 중형차, 순수전기차 등 신제품 6종과 파워트레인 생산을 국내로 유치하며, 매출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CKD(반조립제품) 역량을 강화해 수출기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GM 직원들은 회사의 투자계획에 대해 “실체가 없다”는 반응이다. 디자인센터 부문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정작 신차 개발 후보에서는 빠져 있고, 신제품 6개 차종의 국내 유치를 밝혔지만, 1년이 지나도록 신차 라인이 들어오기는커녕 희망퇴직을 통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국GM 노조 이창훈 지회장은 이와 관련해 “2012년 11월 차세대 크루즈의 생산 계획을 취소한 상태에서 지난해에는 아베오 후속모델의 생산 계획도 취소됐다”며 “군산공장에 새로운 물량을 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1년이 지난 지금 회사 측에서는 구조조정만 진행할 뿐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중국에는 50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마련했고, 철수한다고까지 했던 유럽의 오펠공장에는 자금투입을 통해 발전계획을 내놨지만, 한국GM에 대한 장기플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투자한다던 8조원의 사용처는 보이지도 않고, 구조조정만 진행되고 있으니 당연히 철수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 아니겠냐”고 성토했다. 한국GM은 지난 2009년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을 실시한 바 있다.
공장만 버려두는 GM式 ‘Stay’
한국GM은 그러나 철수설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세르지오 호샤 사장은 지난 1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외국인 투자기업 대표 만찬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GM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확실히 아니다”며 “여기에 남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대통령과의 자리에서 철수설을 일축한 것이다.
또 철수설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노조와는 대화를 제의했다. 이에 GM의 경영진이 지난 2월 14일 직접 노조와 만나기도 했다. 한국GM의 주주총회 참석차 내한했던 스테판 자코비 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당사자다. 그는 희망퇴직을 비롯해 한국GM의 장기적인 운영계획에 대해 노조 측과 논의했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호샤 사장이 박 대통령에 말한 ‘Stay’의 의미다. 재계 관계자들은 대부분 이 말을 “한국시장에 계속 남겠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머무르기만 하겠다”란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 GM이 철수를 결정한 호주 ‘홀덴’의 경우에서도 바로 이 ‘Stay’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GM은 지난해 말 쉐보레 유럽 철수 선언과 함께 호주의 홀덴 공장을 2017년까지만 운영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호주 홀덴 공장은 지난 2012년 호주 연방 정부와 주 정부들로부터 향후 10년간 10억달러를 지원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2억5000만달러를 먼저 지원받았다. 다시 말해 정부의 지원을 받는 2022년까지 호주 공장을 운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GM은 ‘환율상승, 내수시장 위축, 치열한 경쟁’ 등을 이유로 2년도 채 안돼 공장 폐쇄 결정을 밝혔다. 호주 정부와의 약속을 단 5년 만에 깰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정부와의 약속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GM 직원들과 재계가 ‘한국GM 철수설’에 무게중심을 두는 이유다. 게다가 GM은 자사가 보유한 공장터를 매각하지 않는다. 군장공장에 가동물량이 없어 라인이 멈추게 되더라도 그냥 공장을 폐쇄할 뿐, 부동산을 파는 것은 아니다.
실제 2009년 미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을 때 GM은 미국 내 14개 공장을 폐쇄했다. 당시 폐쇄됐던 공장 중 2개 공장(스프링힐, 오리온타운쉽)은 다시 가동하고 있지만, 나머지 공장은 여전히 폐쇄된 상태다. 미국뿐이 아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공장(2010년 폐쇄)과 독일 보훔 공장(2014년 폐쇄 예정), 호주 홀덴 공장(2017년 폐쇄 예정) 역시 매각계획은 없다. 단지 폐쇄만 할 뿐이다.
이런 전례 때문에 한국GM 직원들과 재계에서는 “GM이 ‘한국철수’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지만, 언제든지 철수를 할 수 있는 구조로 한국GM을 개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정부도 산은도 해결책이 없다
더 큰 우려는 GM이 만에 하나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해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딱히 없다는 점이다. GM의 새로운 사령탑에 오른 매리 바라 CEO는 철저하게 수익성을 따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GM의 경우 내수시장에서 점유율이 낮고, 임금수준은 인근의 중국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GM 이사회가 한국철수를 결정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정부와 산업은행이 비난은 할 수 있지만, 한국철수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한국GM의 결정에 대해 비토권(거부권)을 갖고 있지만, GM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서 “본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