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3일, 최종현 SK(당시 선경)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장남인 태원 씨의 배필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맏딸인 소영 씨를 맞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2년 뒤 최종현 명예회장은 차남인 재원 씨의 처가로 평범한 집안을 선택했다. 이어 1991년 딸인 기원 씨도 평범한 중소기업 집안으로 시집을 보냈다. 재계서열(2013년 자산기준) 3위 SK그룹의 혼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전직 대통령은 물론, 재벌가와 관료명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돈들을 두고 있어서다. 하지만 재계 전문가들은 SK그룹의 혼맥에 화려하다는 표현 대신 ‘자유롭다’는 평가를 내린다. 당사자들이 연애결혼을 통해 사돈을 맺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가풍이 중요시 되는 다른 재벌가문과 달리 SK그룹이 이처럼 독특한 혼맥을 구성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자녀들과 조카들의 결혼을 주관했던 최종현 명예회장의 결혼관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은 당사자들의 몫”이라며 “배우자 선택은 당사자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통령부터 평범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돈을 맺게 됐다.
형제경영 통해 섬유에서 석유까지 확장
SK그룹의 혼맥을 살펴보려면 먼저 SK그룹의 역사를 눈여겨봐야 한다. 최종건·최종현의 ‘형제경영’이 오늘날의 SK그룹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최종건 창업주가 선경직물을 시작했고, 동생인 최종현 명예회장이 SK그룹의 석유사업을 완성시켰다. 현재 SK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도 모두 두 형제의 자녀들이다. 그래서 SK그룹의 혼맥을 살펴보려면 두 형제를 따로 분리해서 살펴야 한다.
최종건 창업주는 1926년 수원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양분-양순-종건-종현-종분-종관-종순-종옥)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인 소유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취직했다. 24세에 교하 노씨 노순애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선경직물을 떠나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SK그룹의 모태가 된 선경직물은 원래 일본인 소유였다. 1930년대 일본인 소유의 선만주단과 교토(경도)직물이 합작한 회사였다. 회사명이 ‘선경’인 것도 두 회사의 앞글자를 땄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해방 후 정부소유로 있다가 6.25전쟁 과정에서 폭격을 받았다. 최종건 창업주는 1953년 일반 불하로 나온 선경직물을 인수해 직물기계 4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선경직물을 창업한 최종건 창업주는 이후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불철주야로 일했다. 선경직물에서 만든 ‘봉황새 이불’은 60년대 초반까지 혼수품목 1호로 여겨질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직물기계를 늘려가며 국내 최고의 섬유회사인 선경직물을 키워냈다.
1966년에는 선경화섬(현 SK케미칼)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나일론 생산에 나섰다. 당시 나일론이 꿈의 섬유로 불리던 때였다. 최종건 창업주는 나일론 생산의 원재료인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1969년 완공하며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SK그룹의 원대한 포부를 그려갔다.
1973년 1월에는 정부로부터 서울워커힐(현 쉐라톤워커힐)호텔을 26억원에 인수하며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최종건 창업주가 먼저 타계하자, SK그룹은 동생인 최종현 명예회장을 추대했다. 최종현 명예회장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62년 SK그룹에 합류했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최종현 명예회장의 합류 당시 선경직물에는 SK그룹의 주춧돌이 된 3명의 전문경영인이 있었다. 바로 이순석 전 ㈜선경 부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김항덕 고문이다. 이들은 모두 59학번 서울대 상대 동기로 최종현 명예회장과 함께 SK그룹의 성장사를 함께 썼다.
형님인 최종건 창업주의 타계 이후 회장직에 오른 최종현 명예회장은 먼저 그룹의 전략사업이었던 정유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형님의 유지이기도 했던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위해서였다.
그 결과 SK는 1980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을 인수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SK의 유공인수를 놓고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할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그가 곧바로 미래전략사업이 될 정보통신을 주목했고,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하며 SK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재정립했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와 관련 SK그룹의 성장사를 3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창업기, 2단계는 유공 인수, 3단계는 한국이동통신 인수시기이다. 그만큼 중요한 결정이었고, 이후 SK그룹의 규모와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현 명예회장은 10년 후를 내다보고 그룹의 미래전략사업을 준비한 최고경영자였기 때문에 재계의 존경을 받은 것이다.
상반된 스타일의 안주인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인상 깊었던 최종건 창업주와 차분하고 전략적인 모습으로 기억되는 최종현 명예회장처럼 SK그룹의 안주인들 역시 상반된 이미지다. 최종건 창업주의 아내인 노순애 여사가 전통적인 유교풍의 맏며느리라면 최종현 명예회장의 반려자인 박계희 여사는 현대적인 모습의 도시여성이었다.
최종건 창업주는 24세에 노순애 여사와 결혼했다. 노 여사는 평소 그녀를 눈여겨본 큰누나 최양분 여사의 주도로 이뤄졌다. 노순애 여사는 결혼 이후 SK가의 맏며느리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내조를 보여줬다.
최종건 창업주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100마지기가 넘는 농사에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겨야 하는 맏며느리였으니,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며 “게다가 부친은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모든 일을 혼자서 해야 하셨다”고 어머니를 추억했다.
눈에 띄는 점은 노순애 여사의 인맥이다. 노순애 여사는 교하 노씨 경원군파 30세손인데,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종파에 같은 항렬이다. 또 불교신자였던 노 여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예하부대에 사찰을 지어 희사한 관계로 일찍부터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최종현 명예회장의 부인인 박계희 여사는 유학파답게 세련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4녀인 박계희 여사는 1953년 경기여고 졸업 후 미국 뉴욕의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리마주대학을 졸업했다. 최종현 명예회장과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만나 연애 결혼했다. 주변에 따르면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강단 있는 성격에 검소한 생활을 좋아했다고 알려졌다. 박 여사는 남편인 최종현 명예회장보다 앞선 1997년 6월 18일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통해 재벌가 연결
SK그룹 2세들의 혼사는 대부분 최종현 명예회장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 형 최종건 창업주가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인 최종현 명예회장이 조카들과 자녀들의 혼사를 치러냈기 때문이다. 연애결혼을 한 최종현 명예회장은 2세들의 결혼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SK 2세들은 재벌가에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 커플이 많다. 중매결혼도 있지만, 거의 손에 꼽을 정도다.
SK 2세들의 혼맥은 화려하다. 대통령은 물론 전직 부총리와 재벌가, 관료명문가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평범한 집안과도 사돈을 맺었지만, SK의 혼맥이 유달리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종건 창업주는 노순애 여사와의 사이에 3남4녀(윤원-신원-정원-혜원-지원-예정-창원)를 두고 있다. 장남인 최윤원 SK케미칼 전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 채헌 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1남3녀(서희-은진-현진-영근)를 두고 있다. 이중 장녀인 서희 씨는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디스에서 근무했던 최성훈 씨와 결혼했다. 장남인 영근 씨는 현재 SK그룹 계열사의 급식사업을 전담하는 후니드의 대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백종성 전 제일원양 대표의 딸 해영 씨를 배필로 맞았다. 최신원 SKC 회장은 1남2녀(유진-영진-성환)를 두고 있다. 장녀인 정원 씨는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 씨와 일가를 이뤘고, 차녀 혜원 씨는 금융인인 박장석 SKC 사장에게 시집갔다. 4녀 예정 씨는 최종건 창업주의 자녀들 중 가장 화려한 혼맥을 자랑한다. 예정 씨의 시아버지가 바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기 때문이다. 최종건 창업주는 이후락 중정부장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고, 최종현 명예회장이 이에 따라 예정 씨를 이후락 가문으로 출가시켰다. 예정 씨의 남편은 이후락 씨의 3남인 동욱 씨다. 이 결혼을 통해 SK그룹은 한화그룹과 CJ그룹으로 연결된다. 동욱 씨의 형인 이동훈 씨가 바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인 김영혜 씨의 남편이다. 또 조카인 재환 씨(이동훈 씨 장남)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 손희영 씨와 결혼했다. 막내인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은 변호사 집안의 최유경 씨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장녀 경진 양과 장남 민근 군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