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Management]‘하루 4시간 근무 허용’ 관행 파괴…워크스마트 삼성전자의 실험
입력 : 2012.08.06 10:07:57
수정 : 2012.08.24 10:42:25
삼성전자 수원 DMC연구소에 근무하는 박명진 책임(가명)은 대구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이번주 월~목요일에 9시간씩 근무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금요일에 4시간만 더 일하면 ‘주 40시간 근무’를 채우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바로 대구행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다. 박 책임은 “종전에는 반차 휴가를 써야했지만 하루 4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워크스마트 실행에 앞장서고 있는 삼성전자가 지난 4월부터 ‘하루 4시간 근무제’를 첫 도입했다. 종전까지는 하루 8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주당 40시간 요건만 채운다면 하루 4시간만 일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예를 들어 목요일 오후를 개인적으로 활용하고 싶다면 월~금요일의 주 5일 근무를 월요일 8시간, 화요일 8시간, 수요일 12시간, 목요일 4시간, 금요일 8시간과 같이 안배하면 된다. 월~목요일은 9시간씩 근무하고 금요일 오전(4시간)만 일한 뒤 조기 퇴근해 주말여행을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삼성전자 DMC연구소와 반도체연구소 등 4000명의 연구 인력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하고 있는 하루 4시간 근무제는 종전까지의 유연근무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형태다. 하루에 최소 4시간은 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오전 혹은 오후 근무만 해도 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본인 사정에 따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이에 따라 맞벌이 부부나 여가 생활을 즐기려는 직원들이 환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파격적 형식의 자율 출퇴근제를 수원 DMC연구소(완제품 부문)와 화성 반도체연구소 중심으로 올 연말까지 시범 적용한 뒤 전 사업부 확대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당초에는 3개월간 시범 운영하고 올 하반기부터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유럽 재정 위기 등 긴박한 경영 현황을 고려해 확대 적용시기를 늦추기로 했다. 반도체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하루 4시간만 일해도 된다고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일 많기로 유명한 삼성전자에 그런 제도가 있느냐며 반문해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워크스마트 확대 왜?
삼성전자가 종전의 근무 관행을 파괴하는 ‘워크스마트’에 주력하는 데는 근무 문화를 대대적으로 바꿔 조직의 효율성과 마인드를 확 바꾸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다. 삼성전자 인사팀 관계자는 “하루 4시간 근무제를 포함한 자율 출퇴근제는 구글과 같은 일부 창의적 기업만 가능하다”면서 “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 전략으로 선회하기 위한 근무 혁신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유연근무제를 시행하는 기업은 꽤 많지만 하루 4시간 근무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국내 대기업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모바일오피스, 원격근무제 도입과 함께 워크스마트를 더욱 활성화해 조직의 유연성과 창의력을 높이려는 삼성전자의 실험이 성공할지 재계가 눈여겨보는 이유다.
농업적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산업화 시대에는 열심히 일하는 문화(Work Hard)만으로도 경쟁이 가능했지만 창의성이 부각되는 스마트 시대에는 과거 관행을 깨는 유연한 근무 형태가 요구된다. 회사가 출퇴근을 통제하지 않고 직원 자율에 맡김으로써 회사는 직원들을 믿는다는 신뢰감을 직원들에게 심어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하루 8시간 근무라는 조항이 있으면 퇴근 시간을 선택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면서 “하지만 하루 4시간 근무가 허용되면 별도의 반차나 월차휴가를 사용하지 않고도 개인 사정에 따라 퇴근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업무 효율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선택해 일의 효율을 높이고 직원들의 창의성과 여가 활용도를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출근시간에 이어 퇴근시간까지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어 종전의 유연근무제 보다 진일보한 개념으로 평가된다.
2009년부터 일하는 방식 전환
삼성전자는 자율출근제를 포함한 워크스마트 제도를 2009년 1월 TV, 통신, 가전 등 세트(완제품) 부문부터 시범 도입했고 2010년에는 이를 전 사업부로 확대했다. 워크스마트란 ‘똑똑하게 일한다’는 뜻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근무 형태를 말한다. 스마트폰 확산 등으로 일하는 방식이 점차 변화하는 추세다. 하루 4시간 근무제를 접목하기 전의 자율출근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 사이에 자율적으로 출근해 9시간(휴식시간 포함) 일하고 퇴근하는 방식으로 지난해 말까지 6만여명의 삼성전자 직원들이 이를 이용했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 위치한 메모리제조센터. 9명의 부서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회의 탁자에 앉았다. 특이한 건 탁자 앞에 초시계가 놓여 있다는 점. 짧고 효율적으로 회의를 이끌기 위해 회의 시간을 미리 정해놓고 꼭 지킨다. 삼성전자 DMC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최성철 책임(가명)은 출근 일정을 본인이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근무 만족도가 매우 높다. 자녀 등굣길을 챙겨주거나 아내의 집안일을 돕고 출근하기도 한다. 최 책임은 “자율출근제를 실시한 후 지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줄었다”면서 “근무 의욕이 높아지고 창의적 아이디어도 샘솟는 것 같다”고 밝혔다.
출퇴근 시간만 자유로워진 게 아니다. 오랜 관행인 잔업 근무(특근)를 해소하기 위해 삼성전자 인사팀이 팔을 걷어붙였다. 삼성전자는 잔업 과다자, 잔업 과다 부서, 주말 출근자 등을 별도 지표로 관리하고 해당 부서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불필요한 잔업 횟수를 줄이도록 주문한다. 직원들이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고질병을 고치기 위해 부서장에게 직접 시그널을 주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워크스마트 시행으로 상당수 직원들의 회의 부담도 크게 줄었다. 반도체사업부는 ‘만점회의 10·10·10 캠페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한 달 회의 수 10회, 자료 10매, 인원 10명 이내로 제한해 회의 효율을 높이자는 뜻이다. 한 사업부장은 임원들 퇴근 시간, 팀장급 임원들의 회의 횟수, 휴가 사용률 등을 지표화해 매달 본인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반도체사업부 임원회의 횟수는 6개월 만에 40%나 감소했고 평직원들 잔업도 24%나 줄었다. 삼성종합기술원은 ‘회의·보고 30% 줄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회의시간은 1시간 이내로 하고 보고성 회의는 월 7회로 줄이는 게 목표다. DMC연구소는 회의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해 짧은 회의가 되도록 독려한다.
이런 분위기가 조직 전반에 정착되면서 여러 순기능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애사심과 근무 능률이 높아졌다는 게 사측 판단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워크스마트 실시 후 가장 달라진 점은 불필요한 관행과의 이별”이라고 말했다. 도입 초기에는 ‘근무 기강이 해이해진다’ ‘상사 눈치가 보여서 누가 하겠느냐’ 등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지만 예상외로 빨리 자리를 잡았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우수한 인재들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근무 문화를 구축하자는 게 워크스마트 핵심”이라고 말했다. 최지성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0년 12월 직원 700여명과 워크스마트 컨퍼런스를 열고 근무 문화 개선에 한층 힘을 싣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11년 5월부터 서울과 경기 분당에 스마트워크센터를 열고 재택·원격근무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스마트워크센터는 영상회의 시스템과 회의실, 여성 임직원을 위한 수유실 등을 갖췄다. 원격근무는 집에서 먼 곳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 대신 집에서 가까운 원격근무지를 방문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을 뜻한다. 현재 일부 대기업이 스마트워크센터를 세워 재택 원격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택·원격근무 확산의 기본 조건으로 인사평가시스템의 재조정을 꼽는다. 집이나 원격근무지에서 일을 처리하는 직원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며 업무 성과로 냉정하게 평가받는 관행이 정착돼야 추가 신청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워크스마트를 가동한 2009년부터 전국 각지의 사업장 혁신에도 나섰다. 사업장 환경을 개선해 창의적인 근무가 가능하도록 지원하자는 판단에서다. 이때부터 추진한 것이 ‘생(生·환경) 동(動·인프라스트럭처) 감(感·콘텐츠) 프로젝트’다. 우선 딱딱한 사업장 명칭을 대학캠퍼스와 같은 친근한 호칭으로 전부 바꿨다. 이에 따라 각 사업장 이름을 디지털시티(수원) 나노시티(기흥) 스마트시티(구미) 디스플레이시티(탕정) 등으로 변경했다. 유연한 발상을 돕기 위해 사업장마다 자전거도로를 설치하고 올레길과 같은 아름다운 보행로와 산책로를 조성했다.
향후에는 출퇴근 도장 사라질 듯
10만1200명의 국내 직원을 보유한 글로벌 톱 전자기업 삼성전자가 일하는 방식을 또 한 번 혁신하면서 국내 대기업과 관공서 등에 워크스마트 바람이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외에도 워크스마트를 접목하는 대기업 사례는 점차 늘고 있다. KT는 스마트워킹센터의 원격근무와 재택근무제를 활용해 출퇴근시간을 줄이고 직원들의 업무 생산성을 높였다. 자체 조사 결과 KT 직원 중 74% 가량이 집이나 스마트워크센터에서 하루 이상 근무했으며 스마트워크 근무자의 생산성은 정해진 사무실에 출근할 때 비해 약 15%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제일모직 케미컬 연구소는 지난해부터 개인 책상을 없애고 책상을 공유하는 이른바 ‘핫 데스킹(hot desking)’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앉는 위치가 자주 바뀌게 돼 이전에는 대화가 거의 없던 직원들 간에도 소통이 늘어나고 아이디어 교환도 확산되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SK텔레콤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을 활용한 모바일오피스를 전격 도입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근무 방식을 빠르게 정착시키고 있다.
업무 관리 측면에서 스마트워크는 임직원 간의 소통을 증대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기업용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수평적인 소통을 확대하고 아모레퍼시픽은 사내 제안시스템을 통해 직원들의 아이디어 제안을 촉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워크가 직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업무 생산성을 한층 높일 수 있다는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삼성전자는 하루 4시간 근무 등을 포함한 워크스마트 제도가 사내에 안착되면 중장기적으로는 ‘주 40시간 근무’라는 업무시간 쿼터마저 허무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출퇴근 도장을 찍는 게 무의미해지며 임직원들은 철저히 개인성과에 따라 평가받게 된다.
KT 고위 관계자는 “스마트워킹은 단순히 정보기술(IT) 솔루션을 업무에 적용하는 개념을 넘어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직원들의 근무 만족도와 생산성을 한 번에 높이는 혁신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