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투자사인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Bessemer Venture Partners)는 최근 “유니콘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선언했다. 대신 이 회사는 ‘켄타우로스형’ 스타트업 발굴에 주력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 종족이다.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이다.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는 현실적인 수익을 사람에, 성장성을 말에 빗댔다. 요즘처럼 위축된 경기 상황에서는 자생할 수 있는 현금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성장성과 성과를 모두 만족시키는 기업의 투자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뜻에서다.
올 초부터 인플레이션 및 기준금리 인상 등 경기 침체로 인한 불확실성 여파로 국내외 벤처 투자 시장이 얼어붙고 있다. 스타트업들에 대한 기업가치(밸류에이션)도 조정되는 모양새다. 특히 기존에 밸류에이션의 초점이 미래 성장성과 가능성에 맞춰져 있었다면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벤처캐피털(VC)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 것이다. 실제로 VC 업계에서는 켄타우로스를 지향하며 실질적인 사업모델로 수익 창출 능력을 갖춘 스타트업들에 자금이 몰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각국의 금리 인상 기조 ▲인플레이션 공포 ▲경기 침체 우려 ▲기술주 폭락 등이 맞물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폭 줄어들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올해 스타트업 투자 규모를 50~70%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유동성 위기로 투자심리 위축
작년만 해도 뭉칫돈이 몰렸던 국내 스타트업 투자가 최근 급격히 줄어들었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지난해 11월부터 감지된 ‘투자 급감’ 현상이 올 6월부터 약 3개월의 시차를 투고 국내 스타트업 업계로 옮겨 붙은 추세다.
2021년 상반기와 비교했을 때 2022년 상반기 투자액과 투자 건수가 급증했지만, 투자금은 7월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국내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올해 7월 국내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전체 투자금액은 8368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7월 3조659억원에서 72.7% 감소한 수치다. 직전 달인 6월(1조3888억원)과 비교해도 투자금이 38.9%나 줄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2년 상반기 벤처투자 동향’에서도 투자 감소 추세가 나타났다. 올해 1분기 벤처투자액은 2조1802억원으로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했지만 분기 들어서는 1조825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2% 줄어든 794억원으로 상승세가 꺾였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글로벌 벤처투자 정보 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투자 규모는 올 2분기 1085억달러로 1분기의 1416억달러 대비 23% 감소했다. 2분기 투자 건수도 7561건으로 1분기(8990건) 대비 급감했다. 특히 상장을 앞둔 기업일수록 투자가 위축됐다. 1억달러 규모 이상 메가딜은 505억달러 규모로 직전 분기 대비 31% 줄었다.
이 같은 감소세는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벤처캐피털 펀드 규모 축소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VC펀드에 출자하던 유한책임투자자(LP)들은 채권 투자를 확대하고 VC펀드 출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투자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올해 스타트업에 대한 신규 투자 규모를 전년 대비 50~75%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는 지난 1분기 270억달러 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2분기에도 수십억달러의 손실이 예상된다.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은 1350억달러에 달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가파르게 인상하면서 고평가되던 기술주 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소프트뱅크의 투자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벤처 업계 몰아치는 ‘D의 공포’
그간 초기 투자, 시리즈A·B·C 이후 상장 추진 과정에서 우상향만 있었던 주요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투자 빙하기를 맞아 ‘우하향’할 수 있다는 우려도 현실화하고 있다. 시장에서 단독 투자는 점점 줄어들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투자사 10여 곳이 함께하는 ‘클럽딜’ 위주의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비상장기업의 후속 투자 시장에서 리드투자자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서 리드투자자는 투자금의 가장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추가적으로 소액 펀드나 유관 기업과 같은 동료 투자자를 모아 최종 투자 액수와 시점을 완성하는 일종의 주관사 역할을 한다.
한 유명 벤처사 대표는 “최근 투자 시장에 매물은 많지만 리드를 맡을 투자자의 씨가 마르고 있다”며 “확신이 없으니 서로 소위 간만 보는 형국으로, 과거 좋은 기업에는 투자를 비밀에 부치고 혼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벤처캐피털 사이에서도 서로 ‘네가 리드하면 나도 조금 할게’ 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니콘으로 거론된 기업도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으로, 시장이 그만큼 얼어붙었다는 방증”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나스닥 상장으로 주목받았던 쿠팡의 주가 하락과 데뷔를 앞둔 컬리에 대한 불확실성도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당근마켓’이나 ‘오늘의집’처럼 수천억원을 투자받은 국내 유니콘들이 매출과 영업이익 측면에서는 아직 눈에 띄는 실적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원인이다. 투자 당시 기업가치 측정이 부풀려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추가 투자가 시급한 스타트업들을 중심으로 거품이 낀 기업가치에도 급격한 조정이 시작됐다. IT 업계 관계자는 “이익은 내지 못하고 있지만 기업 사이즈가 커진 스타트업의 경우에는 추가 투자를 받아야 조직 운영이 가능한 상황”이라면서 “기업가치에 대한 인식이 최근 절반 정도 수준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감수하고 투자를 받으려고 해도 기존 주주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러자 국내 투자 업계에서는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전문 대출을 지원하는 사업부까지 신설됐다. 새롭게 탄생하는 유니콘 수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올해 1~4월 유니콘 대열에 합류한 전 세계 기업 수는 167개로 전년 동기(184개) 대비 10% 감소했다. 정보기술(IT) 업계 일각에서는 ‘제2의 닷컴버블’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닷컴버블 시절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던 것처럼 최근에는 블록체인, 메타버스 관련 스타트업들이 큰 주목을 받고 관련 투자가 급증했었다. 거품은 가장 많이 오른 곳에서 가장 급격하게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블록체인 분야 국내 스타트업 투자(월간 기준)는 지난 1월 1600억원에서 5월 50억원까지 줄었다.
▶‘돈맥경화’ VC도 예의주시
국내 스타트업 시장의 큰손인 대기업과 주요 VC 들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풍부한 유동성으로 스타트업 업계에 ‘묻지 마 투자’가 많았는데 올해부터는 밸류에이션과 수익성을 꼼꼼히 따지고 나섰다. 국내 ‘S그룹’의 IT 투자 전문회사는 최근 투자 기업들에 대한 ‘돈맥경화(자금 조달이 막히는 상황)’ 리스크가 커졌다고 보고 최근 실태 점검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VC들은 투자 기업에 구체적인 ‘실적’을 요구하고 나섰다. VC의 경우 보통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투자자금을 회수하는데 최근엔 이마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 매경더브이씨 조사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M&A 투자(월간 기준)는 지난 1월 5420억원 수준에서 지난 5월 973억원으로 급감했다.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1분기 전 세계 IPO는 143건으로 2016년 이후 최저 수준에 그쳤다. 익명을 요청한 국내 대형 VC 심사역은 “그간 업계에 투자 자금이 넘치기도 했고 성장 자체에 대한 낙관론이 있어서 투자 회수에 대한 생각이 적었는데 지금은 다르다”면서 “가령 변동비 성격이 강한데도 고정비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전엔 스타트업 주장을 그대로 믿었다면 이젠 보수적으로 뜯어보고 있다”고 전했다.
인기 스타트업에 투자자들이 역피칭을 하고 딜이 2~3일 만에 종료되는 사례도 최근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전언이다. 국내 한 스타트업 대표는 “특히 100억원대 투자를 받는 스타트업의 경우 부침이 큰 상황이고, 특히 B2C 스타트업의 경우 마케팅비를 많이 줄이는 등 보수적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면서 “창업자들 사이에선 5년 정도 버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투자 업계 큰손들은 올 초부터 스타트업들에게 긴급 조치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세계 최대 VC 중 하나인 세콰이어캐피털은 포트폴리오사에게 보낸 52페이지 분량의 서신에서 ‘가혹한 미래’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현재 상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당시와 비슷해지고 있다”면서 “공짜 자본이 있는 무조건적인 성장은 끝났고 투자사는 빠른 성장성이 아닌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수익성 있는 회사를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시장 침체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를 빨리 접고 필요 없는 지출과 고용을 신속하게 줄일 것을 주문했다. 세콰이어는 애플, 오라클, 구글, 에어비앤비, 유튜브 등에 초기 투자했다. 이 회사는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하기도 했는데, 투자사에 위기 대응 메시지를 낸 것은 2020년 코로나19 발생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 번째다.
세계 최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육성기관) 와이콤비네이터(YC)는 투자 기업에 보낸 서신에서 “VC들이 미팅을 계속한다고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30일 안에 비용 축소 ▲24개월 생존 목표 설정 ▲투자 유치 계획 수정 등 구체적인 생존 전략을 전달했다. 스냅 등에 투자한 VC 라이트스피드도 “스타트업 10년 호황기가 끝났다”라고 공식석상에서 밝히는 등 스타트업 침체기가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이다.
▶스타트업발 정리해고 국내로 옮겨 붙나
사실 국내 스타트업은 그동안 ‘혹한기’를 대비하는 분위기였지만, 실제로 ‘투자 급감’ 현상이 벌어지자 일부 스타트업들이 위기에 빠졌다. 돈줄이 막히면서 스타트업의 경영 키워드도 ‘성장’에서 ‘생존’으로 바뀌고 있다. 테크·플랫폼 기업은 거래액이 늘면 개발자나 서비스 인력도 늘려야 하는데, 이러한 인건비 증가도 최근엔 리스크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국내 유니콘 기업들도 올해 사업 계획과 비용 전략 등을 수정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이용자 수를 확보하고는 있지만 적자를 내고 있는 플랫폼 스타트업들의 경우 채용 축소와 마케팅비 삭감 등을 모색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성장 가능성’보다는 ‘숫자(실적)’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이미 스타트업발 정리해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미국 전자상거래 스타트업 볼트는 전체 직원의 28%인 250여 명을 해고했다. 또 다른 전자상거래 스타트업 스라시오는 프리 IPO(상장 전 투자 유치)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직원 20%를 감축했다. 독일 식료품 배달 스타트업 고릴라는 최근 본사 직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320여 명을 내보냈다. 전 세계 스타트업 구조조정 현황을 집계하는 레이오프에 따르면 지난달 해고된 스타트업 직원 수는 1만4708명에 달한다. 4월(3703명)보다 4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거대 스타트업 붕괴가 본격화하면 빅테크 기업의 스타트업 M&A와 인재 ‘이삭줍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최근엔 촉망받는 ‘유니콘’ 스타트업들조차 돈줄이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한 번에 1억달러 이상을 조달하는 ‘메가라운드 펀딩’ 횟수는 올해 1분기 전 분기 대비 30% 감소했고 투자 총액은 59% 줄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빅테크 기업의 계열사 대표는 “거품과 거품 해소 이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서 “특히 성장을 위한 전략적 M&A에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옥석 가리기’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불황기에 유망 스타트업에 자금이 몰릴 가능성도 크다. 민간 자금 위주의 시장이 형성된 해외와 달리 정부 모태펀드 자금이 기반이 된 국내는 투자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민간 자금은 곧바로 투자가 동결될 수 있지만, 정부 자금을 위탁받은 운영사는 특정 기간 내에 자금을 소진해야 하기 때문에 혹한기에서도 투자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이 심할수록 경쟁자가 줄어들어 새로운 사업 기회가 나타나고 위기를 버텨낸 ‘진짜 고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스타트업 행사 ‘비바테크 2022’에 참석한 세일즈포스 공동 최고경영자(CEO) 겸 트위터 이사회 의장은 금융위기 직전 2007년 창업해 금융위기를 경험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이 같은 환경에서는 현금이 왕이고 현금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라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객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실제로 닷컴버블과 금융위기 때를 되돌아보면 위대한 기술 기업이 이때 생겨난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