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철스크랩(고철) 가격이 1년 반 만에 2배 이상 오르며 13년래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된 철강업계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당장 낮추기 위해 고철 사용량을 늘리면서 수요가 증가한 여파다. 국내 전기로 제강업체들은 주원료인 고철값 고공행진이 추후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긴장하고 있다.
▶천정부지 고철 가격
철강업계에 따르면 국내 고철 평균 가격(영남지역 중량A 기준)은 2월 셋째 주 기준 1톤(t)당 63만5000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2월(36만7000원) 대비 70% 이상 급등했다. 2020년 2월 25만7000원이던 고철 가격은 지난해 3월 40만원을 넘어선 뒤 반년 만에 50만원을 돌파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조만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6월(67만원) 이래 가장 높은 가격을 경신할 것이 확실시된다.
중량A 철스크랩은 ▲사용 전 직선 철근 ▲단조 스크랩 ▲봉강류 철스크랩 ▲폐선박·중장비 해체물 등 상태가 양호한 고철을 가리킨다. 국내 철스크랩 가격은 영남지역 거래를 기준으로 삼는데, 이는 철스크랩 발생량·거래량이 가장 많아 시장 가격 변화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전기로가 가동되고 있는 모습.
철광석 가격은 고철 가격과 탈동조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철광석 가격은 올해 2월 기준 1t당 147달러로, 지난해 2월(166달러) 대비 11.5% 하락한 상태다. 2020년 2월 t당 87달러 수준이던 철광석 가격은 2020년 6월 100달러를 넘고, 지난해 7월 219달러까지 오른 뒤 내림세와 오름세를 나타내고 있다. 지속적인 상승세를 이어가는 고철 가격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철광석과 고철은 일정 부분 상호대체재 관계로, 그동안 가격이 동반상승하거나 동반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최근 철스크랩 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이 같은 공식에는 균열이 가고 있다.
▶고로 방식과 전기로 방식
철을 생산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고로(용광로) 방식에선 철광석이, 전기로 방식에선 고철이 원료로 사용된다. 고로 방식은 용광로에 철광석·코크스·석회석을 넣고 최대 2300℃에 달하는 열로 조강(쇳물)을 만든다. 전기로 방식은 전기를 이용해 철스크랩을 녹여서 쇳물을 뽑는다. 고로 방식에서도 생산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철스크랩을 섞는다.
고로 방식은 후판·열연강판 등 고품질의 철강 생산이 가능하지만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는 단점이 있다. 전기로 방식은 친환경적으로 철강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품질이 고로 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전기로 방식으로 생산해낸 쇳물은 90% 이상이 철근·봉형강 등 건축용 자재를 생산하는 데 쓰인다. 고로를 활용해 조강 1t을 생산하는 데 평균 2t의 탄소를 배출하지만, 전기로 방식은 고로 방식의 4분의 1 수준만 배출한다. 이론적으로, 고로 방식은 조강 1t을 만들 때 약 16기가줄(GJ)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중 4GJ(25%)이 철광석을 녹이는 데 쓰이고, 나머지 12GJ은 철광석에서 산소를 떼어내는 데 사용된다. 전기로 방식은 산소를 떼어내는 작업 없이 전기의 아크열로 고철을 녹이기만 하면 돼 에너지 사용량이 줄고, 결과적으로 탄소 배출량도 줄어든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철강 생산량은 총 7042만t이다. 이 가운데 고로 방식 생산량이 4803만t(68.2%), 전기로 방식이 2239만t(31.8%)으로 집계됐다. 지난 2020년 철강 생산량은 6708만t으로, 고로 방식이 4626만t(69%), 전기로 방식이 2082만t(31%)을 차지했다.
▶고철값 상승의 내·외부 요인은
고철값이 뛰어오른 데는 내·외부 요인이 모두 존재한다.
우선 국제 철강 시장에서 철스크랩 수요가 늘었다. 전 세계 조강 생산량의 57%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전기로 생산과 철스크랩 사용 비중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 철스크랩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2월 중국은 ‘14차 5개년 규획’을 통해 전기로 생산 비중을 기존 13%에서 오는 2025년까지 20%, 2030년까지 40% 수준으로 확대하고, 용광로에 투입하는 철스크랩 비중도 3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계획이 실현된다면 현재 연간 2억t에 달하는 중국의 철스크랩 수요는 향후 6억t으로 확대된다. 한동안 고철을 폐기물로 취급해 수입을 금지하던 중국이 탄소중립이라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수입 국가로 돌아선 것이다.
일본제철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2030년 가동을 목표로 300t급 대형 전기로 설비를 신설한다는 계획을 지난해 3월 밝혔다. 일본 2위 철강업체인 JFE스틸도 탄소 배출 절감을 목표로 철스크랩 구매 물량을 점차 늘리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6월 철스크랩에 적용되는 수출 관세를 기존 5유로에서 70유로로 370% 높이고, 지난해 11월에는 수출 관세를 100유로까지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인상안은 올해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적용된다.
S&P글로벌플래츠에 따르면 국제 철스크랩 가격(미국발 터키행 HMS 기준)은 2020년 1월 t당 300달러에서 지난해 1월 481달러로 1년 만에 60.3% 증가했다. 올해 1월 기준 국제 철스크랩 가격은 490달러를 기록했다. 철스크랩 최대 수출국인 미국이 최대 수입국인 터키를 대상으로 거래하는 가격이 국제 기준으로 통용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양을 수입해오는 일본산 철스크랩 가격은 2020년 1월 t당 2만6500엔에서 지난해 1월 4만3000엔으로 62.3% 높아졌다. 올해 1월 기준 일본산 철스크랩 가격은 5만2000엔으로, 2년 전보다 96.2% 증가한 상태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국내 철강사들은 고철 전체 사용량의 약 15%를 수입산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고철 수입량은 총 479만t이다. 국가별 수입량은 일본산 307만t(64%), 미국산 72만t(15%), 러시아산 57만t(12%) 등으로 집계됐다.
국제 철강 시장 흐름에 더해 국내 조강(쇳물) 생산량의 약 80%를 차지하는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국내 고철값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는 게 전기로업계의 주장이다. 고철은 발생량이 한정적인 자원인데, 두 기업이 사용량을 늘리면서 고철 가격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포스코는 고로에 투입하는 용선(溶銑)과 철스크랩 배합 비율을 기존 85:15에서 70:30으로 상향 조정하기로 하고 철스크랩 구매량을 확대하고 있다. 오는 2025년까지 광양제철소에, 2027년까지 포항제철소에 전기로를 각각 1기 설치할 계획도 밝힌 상태다.
포스코는 2017~2019년 연간 평균 7880만t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이는 국내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0%를 차지하는 양이다. 포스코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약 20% 줄이고, 2040년까지는 50% 감축하기로 했다. 또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상용화해 오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수소환원제철은 철광석으로 철을 생산할 때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로(0)’에 근접하게 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고철 사용을 늘리는 방법뿐이다.
세계 최대의 고철 수요업체 중 하나인 현대제철은 최근 구매 정책을 변경해 수입량은 줄이고 국내산 고철 사용 비중을 늘리고 있다. 수입산 고철은 국내산에 비해 대체로 품질이 낮기 때문이다. 저품질 고철은 정제·가공 작업에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고, 전기로에서 녹이는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도 더 많고, 생산 제품인 철근·봉형강 품질 저하에도 영향을 미친다.
A제강사 관계자는 “현재 고철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급등하고 있다. 국내 고철값 상승이 일본·동아시아 고철값 상승으로 이어지고, 한국으로 들여오는 고철값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며 “국내 주요 철강사들이 국산 고철 사용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약보합으로 예상되던 2~3월 고철값은 강보합 기조로 바뀌었다”며 “향후 포스코의 전기로 2기가 증설되면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고철 수급·가격 불안정에 큰 악영향이 예상된다”고 했다.
철강사들에게 고철을 공급하는 업체들도 좌불안석이다. 기존의 고철 수급망이 재편될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한 철스크랩 공급업체 관계자는 “포스코가 자신들이 소재를 공급하는 모 업체의 철스크랩 담당자에게 연락해 스크랩 발생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돌고 있다”며 “포스코가 우월적 공급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고철 원료 시장을 선점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업계 일각에서는 전기로를 운영하는 철강사들이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반박한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국내 철스크랩 시장은 현대제철·동국제강·세아베스틸 등 일부 업체가 60% 이상 점유하고 있다. 포스코가 전기로를 2기 신설한다고 해서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전기로 신설이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 차원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고로보다 탄소 배출이 적은 생산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지, 철근·봉형강 등 전기로 철강사 생산품 시장에 뛰어들지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전기로 제강사의 불안
고로 없이 전기로만 가동하는 제강사들이 고철 가격 상승세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이유는 전기로 방식의 생산 제품 대부분이 건축 자재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철 가격 상승은 아파트 분양 가격 인상에도 일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파트의 경우 전체 공사비용에서 철근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안팎이다.
원재료인 고철값이 높아진 만큼 철근·봉형강 가격이 높아지고, 건설사들도 건설경기 호황에 힘입어 인상된 제품 가격을 수용할 수 있다면 제강사들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하고, 건설사들이 높아진 제품 가격을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장 중소형 전기로 제강사들이 채산성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철스크랩은 철근·봉형강 등 제조 원가의 약 70%를 차지한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철근 가격의 기준이 되는 ‘SD400’ 제품의 t당 유통가격은 2020년 1월 59만1000원에서 지난해 6월 135만원까지 치솟았다가, 올해 2월 107만5000원으로 낮아진 상태다.
B제강사 관계자는 “탄소중립을 향해 가는 주요 철강업체의 움직임이 다른 한쪽에선 잠재적인 회적 비용을 높이고 있다”며 “국내 건설 산업은 대형 중소업체들 비중이 큰데, 이들은 경기 부침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제강사 입장에선, 원료 가격 상승으로 지금 당장 매출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냥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탄소 배출 감축이 철강업계 화두로 떠오르면서 철스크랩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고철 품귀 현상 장기화 전망
고철 품귀 현상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 철강 생산에서 고철이 차지하는 비중이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 시장 철강 산업에 사용되는 원자재 수요가 늘어나면 고철 수요는 더 커질 수 있다.
국내 철강사들은 수입처를 다변화하면서 고철 품귀 현상에 대처하고 있다. 포스코는 국내외에 철스크랩 수집기지를 구축하고, 해외 공급사에 지분을 투자해 향후 철스크랩 조달 규모를 연간 400만t 규모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현대제철도 대형모선(폐선) 인수 등 철스크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동국제강은 일본에 고철 야드(하치장) 사업 투자를 검토하는 등 주요 철스크랩 수입국 내 공급망 구축을 강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철을 전략자원으로 인식해야 수급 관리가 원활해질 것으로 분석한다. 탄소중립이 강조되는 시대를 맞아 고철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국내에서 고철은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폐기물’로 취급된다. 해체·선별 과정을 거쳐 고철을 확보하는 업체는 ‘폐기물처리업’으로 분류된다.
철스크랩 공급업체의 역할 변화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현재 상당수 철스크랩 공급업체가 ‘수집상’ 역할에 머물러 있는데, 앞으로는 이들이 고철을 직접 가공하는 등 고철 등급을 세분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등급이 세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선 고로 방식으로 쇳물을 뽑는 철강업체가 용선과 배합할 고품질의 철스크랩 사용량을 늘릴 경우 전체 고철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로를 가동하는 철강사는 후판·열연강판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기에 철스크랩 구매 시 가격을 인상해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반면, 전기로만 가동하는 업체들은 철근·봉형강 등 제품 가격에서 원료인 철스크랩 가격이 약 70%를 차지해 수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고철 등급을 세분화해 품질에 민감한 고철과 덜 민감한 고철을 구분해 관리한다면 고철값 상승 압력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