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 인근의 어느 대형 마트에서 있던 일이다. 우리나라의 이마트 와인 장터처럼 까르푸나 레클레르 같은 프랑스의 대형 마트들은 정기적으로 대규모 와인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우리나라 장터와 달리 당시 프랑스의 와인 장터는 초대장을 받은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폐점 시간 이후에 매우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장터에 초대된 어느 노부부가 카트에 와인을 잔뜩 싣고 계산대에 다가섰다. 결제 금액은 약 2만유로. 우리나라 원으로 환산하면 3000만원에 가까운 큰 금액이었다. 나는 그 부부에게 와인을 많이 드시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부부는 지금 구매하는 와인들은 손주들이 마실 와인이고, 자신들은 30년 전 할아버지가 사 놓은 와인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대대로 와인을 사서 셀러를 채우고, 오래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유럽 문화의 한 부분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가족들은 와인을 만드는 샤토로부터 매년 수백 병씩 구매하여 가족의 다양한 행사 때 서브하기도 한다. 내가 살던 하숙집 주인 할머니께서는 청소를 도와드리면 아주 오래된 와인을 한 병씩 내놓으시곤 했다. 그 와인들은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몇 천원에 판매되는 와인들이었지만, 몹시 뛰어난 맛이 났던 기억이 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의 레스토랑
언제부터 오래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보르도 그랑 크뤼 등급이 생긴 1855년보다는 이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지금의 5대 샤토를 모두 소유했던 세귀르 남작이 ‘샤토 라피트’를 런던에 소개했던 18세기 중반에는 와인을 물에 타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으니, 와인을 오래 숙성해서 마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이후일 것으로 추측해 본다.
오래 숙성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와인을 생산하는 입장에서 보면 좋은 점이 많다. 첫째, 와인의 부가가치를 높여서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다. 와인의 장기 숙성 능력은 와인의 도매가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둘째, 제품의 유통 기한이 연장되어 생산자가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 와인은 작황에 따라 어느 해에는 많이 생산되고, 어느 해에는 거의 생산을 하지 못한다.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 양조자들은 해마다 일정한 수량의 와인을 보관해 생산량이 부족한 해에 판매하기도 한다. 이는 와인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그란 레세르바
약 150년 전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와인산지 리오하에서는 과잉생산으로 남아도는 와인 문제로 큰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는 와인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국경에서 멀지 않은 보르도의 수준 높은 오크 숙성 기술을 가져올 필요가 있었다. 마침 1833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서거 이후 벌어진 왕위계승 전쟁에서 패한 카를로스 5세의 지지자들은 런던과 보르도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성공을 생산지인 보르도와 그 시장인 런던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공교롭게도 19세기 중반부터 보르도에는 필록세라라고 하는 포도나무 뿌리의 기생충이 창궐하게 되는데, 필록세라는 오랫동안 보르도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키고 와인 기술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 이렇게 보르도 와인의 성공을 눈으로 목격한 스페인의 지도층, 와인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와인 기술에 대한 수요,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했던 보르도의 양조 기술자들의 3가지 사연이 필연적으로 만나 태어난 와인이 바로 리오하를 대표하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보르도로 이주하여 금융과 무역에 종사하였던 기에르모 데가 설립한 와이너리이다. 이미 보르도에 사업기반을 가지고 있던 기에르모는 직접 본인이 고향의 포도원을 돌볼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조카인 카미로를 보내 와인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카미로는 지방 정부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보르도의 샤토 라네상에서 일했던 실력 있는 양조 기술자인 장 피노를 고용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묘목을 들여와 포도밭을 개선하고 보르도에서 사용하는 225ℓ 오크통을 수입하여 1862년에 처음 메독 스타일의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게 되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초기에 프랑스 포도를 사용하였지만, 기술이 훨씬 발전한 지금은 거꾸로 지역 토착 품종인 템프라니요로 와인을 만든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오 게리가 설계한 와인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2006년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오 게리가 설계한 최고급 와인 호텔로도 유명하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그란 레세르바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보다 더 긴 3년간의 오크 숙성과 3년간의 병 숙성을 거친 후에 출시된다. 색은 매우 진하지만 맛은 훨씬 부드럽다. 묵직한 과일향이 매력적이지만 이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셀러에서 해를 보낼수록 더욱 더 좋은 맛을 낸다는 기대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