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위에서 바라본 바다가 푸르다 못해 시리다. 며칠간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미세먼지는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초입에 이르자 입자가 흩어졌다. 쨍하게 뜬 해, 그 아래 푸른 하늘, 또 그 아래 푸른 바다까지, 그야말로 은하수 없는 푸른색 하늘과 바다에 하얀 쪽배 하나 띄우고 계수나무 아래 토끼 한 마리 만나러 유랑을 떠난다 해도 별반 이상할 게 없는 날씨다.
그 기막힌 날에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해파랑길 위에 섰다. 실제로 해파랑의 의미이기도 한데, 부산시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 770㎞에 이르는 길이다. 그 중 44코스는 양양 수산항에서 낙산해변, 낙산사, 정암해변, 속초해맞이공원으로 이어지는 총 12.5㎞의 도보코스로, 평평하게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비교적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한여름 휴가철이면 아직 해가 뜨겁지 않은 아침이나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에 걷는 이들이 많다. 낙산, 정암, 설악 등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나름 선선할 무렵에 걷는 영민한 트레커들의 비결이다.
수산항
▶강원도 요트 관광의 중심, 양양 수산항
44코스의 시작은 양양의 수산항이다. 항구가 자리한 수산리는 약 350년 전 최 씨와 문 씨, 김 씨 등 세 가구가 들어와 살며 마을을 이뤘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한데, 포구 주변에 숲이 울창하면 바다에 고기가 몰려든다 해서 마을주민들이 일부러 심고 정성껏 가꿨다고 한다. 1991년에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이곳은 2002년에 방파제와 소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물양장 등 기본시설이 완공됐다. 항 곳곳을 수놓듯 자리한 요트는 이러한 시설들 덕분인데, 양양군에서 요트계류시설을 늘리며 해양관광어항으로 거듭나고 있다. 둘러본 풍경만으로도 강원도 요트관광의 중심이라는 말, 괜한 말이 아니다. 물은 맑다 못해 깨끗하다. 항구에 앉아 발아래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면 파도에 따라 바닥모습이 달라지는 게 보일 만큼 투명하다. 물이 좋으면 당연히 낚시하는 이도 많은 법. 방파제가 높아 파도가 잔잔해지면서 우럭과 노래미를 노리는 낚시도사들에게 아지트 중 아지트로 손꼽히기도 한다. 방파제 옆에 두꺼비 한 마리가 동해바다를 쳐다보는 형상의 두꺼비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보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낙산해수욕장 입구
▶젊은 날의 추억, 낙산해변
수산항에서 출발해 쏠비치리조트, 바다와 강이 만나는 남대천을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아니 대학시절 MT 한 번 떠나봤던 이들에겐 추억의 장소인 낙산해수욕장에 도착한다. 마침 취재에 나선 날이 해수욕장 개장일이어서인지 평일인데도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꽤 눈에 띄었다. 아는 이들은 다 알겠지만 이 낙산해수욕장의 파도, 좀처럼 쉬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만큼 독하고 매섭다. 당연히 조심 또 조심해야한다. 무턱대고 발을 담갔다가 휩쓸려 내동댕이쳐지기 일쑤다. 이미 그런 이들이 꽤 많았는지 해변 곳곳에 모자부터 심지어 선글라스, 안경까지 주인 잃은 남의 것들이 뒹굴고 있었다. 오랜만에 바다를 찾은 이들 입장에선 괜스레 서운한 순간이건만 바다는 그러거나 말거나 호기롭게 휘몰아친다. 동해안 해수욕장 중 경포대와 함께 명소로 꼽히는 낙산 해수욕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4㎞에 이르는 백사장이 압권이다. 해마다 1월 1일 새벽이면 사람들로 빼곡히 메워지는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소나무숲 사이사이에 나무데크로 길을 내 걷는 이들의 걸음을 유도하고 있는데, 주변에 횟집과 맛집이 즐비해 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낙산해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절경은 낙산사다.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이 사찰은 지난 2005년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며 국민적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부에 제작 시기가 12세기 초로 추측되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돼 있는데,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고쳐 지으며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지금도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손꼽히는 낙산사는 그런 이유로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원통보전, 보타전, 의상대, 해수관음상 등 낙산사 내부의 길만 산책해도 하루가 뿌듯할 만큼 풍광이 뛰어난데, 특히 높이 15m, 둘레 3m에 이르는 해수관음상에서 내려다본 낙산해변은 숨이 턱 막힐 만큼 광활하고 아름답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에서 바라본 의상대
▶아담하지만 매력적인 해변, 정암해수욕장
낙산사에서 내려와 다시 길 위에 서면 설악해변을 지나 정암해변이 눈에 들어온다. 해변에 내려서지 않아도, 그러니까 차가 지나는 7번 국도의 인도변에 마련된 데크를 걷다보면 동해바다의 이모저모를 먼 시선으로 즐길 수 있는데, 굳이 걷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마치 달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 같은 숨어있는 비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마련돼 있다.
간간이 자갈이 섞인 부드러운 모래가 매력적인데, 낙산해수욕장과 달리 바다 속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가족단위로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이 비교적 많다. 해변 바로 앞에 카페와 라운지가 자리해 걷다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특히 여름 한철, 그러니까 피서철이면 정암1리 마을 부녀회에서 해변에 향토먹거리식당과 농특산물판매장을 운영하는데 감자부침개나 도토리묵부터 토종닭까지 메뉴도 다양하다.
정암해변에서 고개 들어 멀리 바라보면 저 앞에 손에 잡힐 듯 오똑 서있는 등대 하나와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물치항이다. 양양군의 북쪽 끝에 자리해 속초시와 경계에 서있다. 물치라는 지명은 ‘물가에 발이 있다’ ‘남쪽과 북쪽의 한 동네 중심에 강이 내린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예부터 강릉 북쪽에서 원산 이하 지역 중 가장 큰 시장이 들어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고, 지금도 바로 앞에 설악산 입구가 자리해 관광객이 모여 쉬어가는 곳이다. 요즘엔 횟집타운으로도 유명한데, 흔히 속초나 양양하면 떠올리는 대포항 대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