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⑤ 악성 베토벤의 고향, 독일 본(Bonn) 라인강변서 산책 즐기며 악상 떠올려
입력 : 2019.06.05 16:56:58
수정 : 2019.06.05 16:57:23
1783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쾰른의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게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선제후 소나타_3 Piano Sonatas WoO 47>를 헌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일찍이 네 살 때부터 음악에 매료되었습니다. 이처럼 빨리 제 마음을 아름다운 하모니로 가득 채워주신 뮤즈를 저는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으며, 여신 또한 저를 아껴주시는 듯합니다. 뮤즈는 예전부터 “네 마음속의 하모니를 적어라”라고 제 귀에 속삭이며, 저를 계속 재촉합니다. 이에 저의 첫 작품을 옥좌의 발밑에 바침을 허락해주소서.”
이 편지는 소년 베토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독일 본에서 쓴 것이다. ‘음악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베토벤의 삶과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에 가봐야 한다. 물론 2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보낸 오스트리아 빈도 중요하지만, 베토벤의 어릴 적 감수성과 음악의 원천이 된 본은,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의미 있는 도시이다.
과거 서독의 수도였던 본은 로마 시대 때 ‘카스트라 보넨지아’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고, 16세기 이후 쾰른 대주교 겸 선제후의 궁정 도시로 성장했다. 궁을 둘러싼 귀족들의 집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본은 부유하고 교양 넘치는 도시로 변모했다. 많은 귀족과 부를 바탕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화 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시가지는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인해 언제나 활기가 넘쳐난다. 오렌지 빛깔의 오후 햇살이 뮌스터 광장에 가득 뒹굴고, 광장 중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파괴되지 않은 베토벤 동상이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또한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음악은 여행자들의 마음을 더욱더 풍요롭게 한다.
베토벤의 열정적인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본의 여행은 그가 태어난 생가부터 시작된다. 그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의 자취를 좇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난 집과 그가 뛰어놀던 골목길,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니던 교회, 산책을 즐기던 라인강변, 오르간을 연주하던 대성당,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꽃피우던 카페 등. 본에서 그와 관련한 유적지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구시가지 광장을 돌아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길바닥과 건물 한 벽에 베토벤의 얼굴 그림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베토벤의 생가이다. 3층 규모의 생가는 외부에서 보면 다른 집과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건물 한가운데 마당과 정원이 있고 그 양쪽으로 건물 두 채가 들어서 있는 구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헐릴 위기에 놓였지만, 본 시민 열두 명이 기금을 모아 이 생가를 사들인 후 베토벤 기념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짙은 담쟁이 넝쿨 잎 사이로 여러 개의 베토벤 흉상이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얼핏 보면 베토벤의 흉상이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바람결에 날리는 물결 모양의 머리카락만큼은 한결같아서, 그것만으로도 베토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당에 서 있는 흉상을 감상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일명 ‘베토벤 하우스’로 불리는 생가에는 열두 개 방이 전시실로 꾸며져 있고, 방마다 세계에 흩어져 있던 150여 점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의 초상화, 그가 쓰던 악기, 친필 악보 등 베토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그랜드피아노다. 나무의 질감과 색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피아노를 보는 순간 당장이라도 베토벤이 튀어나와 우리를 위해 멋진 연주를 해줄 것만 같다. 네 살밖에 안 된 어린 베토벤이 아버지로부터 열심히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도 그려지고, 사춘기 시절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 밤새 세레나데를 치던 모습도 스쳐 간다.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생가 꼭대기인 다락방에 오르면 또 다른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가 바로 1770년 12월 17일에 베토벤이 태어난 곳이다. 다른 방과 달리 전시물은 없고 방 한가운데 베토벤의 흉상 하나만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텅 빈 방에 서보면 그 느낌은 상상 이상이다. 눈을 감는 순간부터 다락방에는 베토벤의 음악 선율로 가득 차오른다.
2평 남짓한 이 작은 다락방에서 태어난 베토벤이 전 세계를 뒤흔들 줄이야.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할아버지는 독일 쾰른 선제후의 궁정 합창단에서 음악 감독을 지냈고, 아버지 역시 선제후 합창단의 테너로 활동했다. 이런 이유로 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모차르트처럼 멋진 연주 솜씨를 뽐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토벤은 네 살부터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음악 훈련을 받았고, 여덟 살인 1778년 3월 26일 처음 공개 연주회를 했다. 열두 살 때는 궁정 예배당 오르간 연주 보조를 맡을 정도였다.
베토벤의 또 다른 흔적을 찾기 위해 좀 더 구시가지 깊숙이 들어가면 그가 세례를 받았고, 열 살 때부터 오르간을 연주했던 성 레미기우스 성당이 나온다. 지금은 세월에 의해 아주 많이 낡았지만, 과거 베토벤이 고사리손으로 멋진 연주를 했던 곳이다. 성당은 본에 있는 고딕 양식 건축물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1276년에 건축을 시작해 14세기 말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매일 아침 이 성당에서 연주했고, 예배가 없는 시간에도 이곳에서 오르간 연습을 하거나 놀이터처럼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지금의 오르간은 베토벤이 사용하던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그가 사용하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었다. 성당 좌측 회랑에는 성수를 담아 놓은 세례반이 있는데, 이 성수로 베토벤이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레미기우스 성당은 베토벤의 출생에서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그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레미기우스 성당 이외에도 생가에서 여섯 살 때 이사한 라이 거리 24번지. 라인강변에 있는 이 집은 제빵업자 고트프리드 피셔의 소유지로서 베토벤 가족이 세 들어 살던 곳이다. 여기서 베토벤의 둘째 동생 요한 판 베토벤이 태어났다. 24번지에서 100m 정도 걸으면 본의 젖줄이자 독일의 기적을 만든 라인강이 나온다. 강변은 베토벤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곳이다. 그는 평생 이곳에서 산책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빈에도 베토벤의 산책로가 있을 만큼,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라인강변을 찾아 음악의 원천인 뮤즈를 만났다. 이럴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선율이 흘렀다.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귀가 먼 베토벤이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멋진 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혼에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뮤즈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만난 뮤즈가 아니었다면 베토벤의 천재성은 무르익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본을 가는 이유는 바로 베토벤이 사랑한 뮤즈를 만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