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6일 강남 선릉에 있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을 방문하여 ‘제2벤처붐’을 조성하겠다며 계획들을 발표했다. 신규 벤처투자에 연간 5조원을 쏟아붓겠다고도 했다. 보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나올 수 있도록 갖은 정책들을 아끼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2012년부터 시작된 창조경제 덕분에 수많은 창업가들이 스타트업을 만들었다. 벌써 6년이 지났다. 창업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 한국이 스타트업을 만들기 매우 좋다는 소문은 해외에도 퍼졌다. 러시아에서 온 방염제 제조 스타트업 ‘푸캄’의 김제니 CEO는 “여러 나라에서 일해봤는데, 한국은 창업하기 매우 좋고 관심 있는 회사와 연결이 되기만 하면 그 다음 단계로 가는 과정이 매우 빠르다”며 “게다가 한국은 제품의 질도 뛰어나고 혁신적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향후 아시아 제조 기지를 한국에 두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 기업은 6개(쿠팡,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 비바리퍼블리카(토스), L&P코스메틱(메디힐마스크팩), 옐로모바일, 크래프톤(배틀그라운드)) 정도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는 2019년 1월 기준으로 유니콘 기업이 미국 151개, 중국 80개, 영국 17개, 독일 8개라고 밝혔다. 적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정부도 유니콘 기업을 20개까지 만들겠다는 정책목표를 밝혔다.
‘스타트업’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자리 잡게 된 지금,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스케일업’이다. 정부가 무한정 자원을 풀어서 창업을 유도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겨서 매출을 일으키고 거대한 기업으로 키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이디어뿐인 제품에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서울 선릉로 디캠프에서 열린 '제2벤처 붐 확산 전략 보고회'에 참석해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SK그룹은 왜 OKR를 도입했나
스타트업을 스케일업하는 방법론 중에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는 OKR다. 최근 국내 대기업 중 한 곳인 SK가 OKR라는 경영기법을 도입한다고 하자 OKR가 직장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OKR란 인텔의 전설적 경영자인 앤디 글로브가 도입한 경영기법으로서 목표(Objective)와 핵심성과(Key Result)를 합친 말이다. 쉽게 말해 구성원들이 모두 이해하는 기업의 큰 목표를 정하고 그를 측정 가능한 지표로 객관화해서 매년 수차례 점검해 나가자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인텔이 경쟁자였던 모토롤라 등을 따돌리기 위해 사용했다. 그런데 오늘날 각종 데이터 분석도구들이 발달하면서 그 성공사례와 적용 가능성이 넓어지고 있다.
현재 OKR의 전도사로 유명한 사람은 실리콘밸리에서 한때 가장 잘 나갔던 벤처캐피탈 ‘클라이너&퍼킨스’에서 일하고 있는 존 도어(John Doerr)라는 사람이다. 그는 인텔에 있을 때 앤디 글로브와 함께 일했었고 OKR가 얼마나 중요한 성과를 내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침 존 도어는 구글이라는 회사에 투자를 하게 됐고, 구글이 점차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알아챈 뒤, OKR를 구글 경영의 기본방침으로 제안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등 창업자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면서 OKR는 구글의 문화가 됐다.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는 존 도어가 OKR에 대해 다룬 책 <중요한 것을 측정하라(Measure What Matters): 한국어판 제목 'OKR: 전설적인 벤처투자자가 구글에 전해준 성공방정식'>의 서문을 쓰면서 “OKR 기법은 구글을 10배, 아니 그 이상으로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며 “‘전 세계의 정보를 조직화하겠다’는 말도 안되게 미친 미션을 가능하게 한 것도 OKR의 힘이 컸다”고 적었다. 래리 페이지는 어떤 책이든 서문을 잘 써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을 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OKR만큼 검증된 방법론도 많지 않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아직 글로벌 수준까지 오지 않은 SK그룹의 역량을 보다 넓히기 위해 OKR 도입으로 기업성장을 모색하자는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그룹 입장에서 OKR를 도입하면 좋은 것은 한 가지 있다. 바로 대기업 특유의 사내정치와 관료문화를 없애는 것이다.
클라이너 퍼킨스의 파트너 존 도어. 사진출처=클라이너퍼킨스 홈페이지
▶사내정치가 아니라 OKR에 집중하라
OKR의 가장 큰 장점은 조직이 커지면서 생기는 사내정치와 관료주의를 없애는 효과이다.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을 하는 데 OKR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얼마만큼 근접한 성과를 냈는지를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수치로 표현하기 때문에 ‘목표’ 그 자체에만 진실되게 구성원들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생긴다. 흔히 스타트업들이 커져 나가면 조직 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라프텔을 창업한 김범준 창업자는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임승차자가 생기면 반드시 내보낸다”고 말했다. 그들 때문에 조직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선으로 리드하기(Leading outside the Lines)>를 지은 존 카젠버그 전 맥킨지 컨설턴트는 어떤 조직이든 ‘비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비선을 잘 이용하는 것이 경영을 잘 하는 비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OKR는 이 논리의 정반대에 서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79년 인텔이 8086이라는 CPU 칩을 내놓았을 때, 그들의 가장 큰 경쟁자는 모토롤라였다. 모토롤라는 68000이라는 16비트 칩을 내놓았는데, 이 제품은 분명히 인텔의 그것보다 빨랐고 프로그래머들이 다루기에도 편리했다. 경쟁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 때 인텔의 CEO였던 앤디 글로브는 ‘깨부수기 작전(Operation Crush)’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다.
그는 경영진들과의 논의 끝에 제품 업그레이드보다 8086 칩 사용이 왜 좋은 선택인지를 고객들에게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이 목표를 분명하게 인텔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알렸다. 인텔의 마케팅 직원들은 이제 프로그래머들을 찾아가지 않고 CEO들을 찾아가 ‘모토롤라가 당장은 쓰기에 편할지 모르지만 왜 장기적으로는 인텔을 써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인텔은 모토롤라를 공격하기 위한 분명한 목표를 세웠고, 일사분란하게 고객들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모토롤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존 도어가 쓴 책 <중요한 것을 측정하라>에는 당시 모토롤라의 한 직원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적혀 있다. “인텔은 2주 안에 고객들에게 8086을 써야 하는 이유들을 홍보하는 작업을 마쳤지만, 우리는 2주 내에 시카고에서 애리조나까지 가는 비행기 출장 결제를 받는 것도 어려웠다.” OKR를 도입한 인텔은 그 당시 실리콘밸리 IT 기업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조직이었다. 그래서 모토롤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앤디 글로브가 인텔 직원들에게 돌렸던 메일. 사진=MeasureWhatMatters
▶OKR는 경영의 민주화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대표이사나 회사의 오너가 무분별하게 설정한 목표가 있고, 그를 맞추기 위해 사내정치를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조직이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2016년 미국의 웰스파고 은행이 고객들에게 무분별하게 계좌를 많이 만들도록 했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웰스파고의 CEO 존 스텀프는 “모든 웰스파고 은행 고객들은 8개의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마케팅을 강화하라”고 목표를 설정했다. OKR에 딱 맞아떨어지는 구체적 목표설정이었다. 직원들도 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8개 계좌를 설명하는 근거는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존 스텀프가 8개의 계좌를 지시한 이유는 영어로 8(eight)이 ‘굉장하다’를 뜻하는 그레이트(Great)와 대구가 맞았기 때문이었다는 어이없는 이유였다. 결국 웰스파고는 무시무시한 벌금을 때려 맞았고 지금까지도 영업에 파격을 입고 있다.
OKR는 이처럼 단순히 경영자 한 사람의 목표를 구성원들 모두가 떠받드는 형식의 전체주의적, 나치즘적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OKR는 구성원들에게 해당 목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낸다는 전제 하에 시작하기 때문에 목표 그 자체가 경영자 또는 특정 개인의 이해관계에 부합한 것을 설정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OKR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그 목표를 ‘이재용 부회장의 가업승계를 최대한 부드럽게 한다’고 설정한다고 해 보자. 삼성전자 다수의 구성원들이 목표달성을 위해 뛸 리가 만무하다.
OKR는 사내에서 경영진이 목표를 정하고 모든 직원들에게 이를 공개하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위 목표들을 스스로 만들도록 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대표이사가 “올해 우리 제품 매출을 10배 신장시키자”는 목표를 제시한다면 홍보부에서는 “우리 제품에 대한 우호적 방송, 신문, 블로그, 유튜브 매체의 보도를 10배 올리자”는 세부 목표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즉 OKR를 도입한다는 것 자체가 목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다. 특히 OKR가 도입되면 구성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회사 전체의 거대한 목표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작은 말단 사원들도 회사가 다가가려고 하는 거대한 ‘미라클’에 동참해 나간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한마디로 경영의 민주화인 셈이다.
투명한 정보공개 또한 OKR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사진=픽사베이
▶개별 부서의 목표와 성과를 공개하면 나오는 효과
마지막으로 OKR에서 중요한 것은 핵심성과(Key Result)를 측정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가 목표달성에 얼마만큼 기여했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OKR의 중요성은 목표와 핵심성과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사내에 알리는 것이고, 그에 따라 투명한 보상을 주자는 것이다. OKR에서 주어지는 핵심성과 자체가 측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달성한 이들은 높은 보상을 받고,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평이한 보상을 받는 게 매우 당연해 진다. 또한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목표를 갖고 일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지기 때문에 ‘왜 옆 부서는 매일 일찍 퇴근하는거야? 우리는 매일 야근하는데’ 등과 같은 비아냥을 할 이유가 없다.
또한 구성원들 각각의 목표가 명확하게 보이면 협업도 쉬워진다. 마케팅 부서의 핵심성과 지표가 ‘올해 광고 노출을 통해 회사인지도 상승시키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올해 회사 이름을 온라인과 신문뉴스에 많이 내보내기’라는 목표를 갖고 있는 홍보팀과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OKR에 대한 정보 공개는 클라우드 시스템을 기업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더욱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게 됐다. AOL의 CEO였던 팀 암스트롱은 “OKR를 도입하게 될 경우 장점은 첫째, 극단적으로 개별 조직에서 하는 업무들이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며, 둘째, 그로 인해 실시간으로 협업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기업은 쪼개진 관료조직들의 분리된 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의 협업체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을 하면서 4~5명이었던 조직은 서서히 부서별로 나뉜다. 그때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긴밀하게 하려면 옆 부서에서 어떤 목표를 갖고, 어떤 성과지표를 위해 일하는지를 투명하게 서로 공유하는 일이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스타트업을 통해 일단 가설을 검증했다면, 이제는 해당 가설을 들고 시장에 나가 스케일업을 해야 한다. 한국 스타트업 중 스케일업에 제대로 성공한 기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올바른 스케일업은 사회적으로도 바람직
한국에서 기업을 창업하기는 매우 좋아졌다. 하지만 한국적 사고방식과 기존 대기업 오너식 경영방식으로 스타트업을 경영해 나가서는 스케일업이란 요원한 일이다. 스타트업을 스케일업해 나가려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영기법이 필요하다. 여기서 제시한 OKR는 그런 경영기업의 한 사례이다.
스케일업을 잘하는 것은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정책적으로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는 이유가 ‘대기업들이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고용을 중소기업 창업을 통해 늘리자’는 것인데, 스타트업이 스타트업에만 머물러서는 일자리 창출의 효과가 없다. 스타트업들은 스케일업을 해나가면서 성장할 때 가장 많은 고용을 필요로 한다. 특히 스타트업들이 올바르게 조직을 늘려나가는 것이 스타트업 본인의 조직은 물론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영국, 덴마크 등 주요 각국들이 이미 2014년 이후 글로벌 경기회복을 위해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 쪽으로 정책의 역점을 서서히 돌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국에서도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위한 다양한 정부 차원의 활동들이 나타나고 있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은 20개의 유니콘 기업을 키우겠다고 했다. 정부의 의지나 대기업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타트업들 스스로 스케일업을 할 수 있는 역량들을 갖추는 것이다. 예를 들면 OKR 같은 경영기법을 도입한 선배들에게 배우는 것이다. SK도 아직 제대로 도입하지 못한 OKR지만 이제 커 나가고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도입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50대 어른에게 수영을 가르친다고 하여 그가 수영선수가 되긴 어렵다. 그러나 3살짜리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친다면 선수가 될 확률이 훨씬 높은 것과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