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① 렘브란트의 고향 네덜란드 라이덴, ‘빛의 마술사’ 영감얻은 풍차로 명성
입력 : 2019.02.01 14:10:50
수정 : 2019.02.01 14:13:01
밝고 어두운 명암 속에 비친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강인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 중 1628년에 그려진 22세의 자화상은 특히 그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광선 때문에 얼굴은 어둡고 희미하지만, 사람들은 청년 렘브란트의 모습을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어떤 사물을 옆으로 흘겨보는 듯한 그의 눈매와 두루뭉술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 등의 실루엣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은은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의 마음은 매료된다. 세계적인 화가 렘브란트,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본다.
▶라이덴에서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은 네덜란드의 라이덴이다.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17세기의 라이덴은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도시 인구가 5만여 명에 이를 만큼, 유럽에서도 꽤 알려진 도시였다.
흰색으로 칠해진 라이덴 중앙역을 벗어나 구시가지로 5분 정도를 걸으면 렘브란트 작품에도 등장한 풍차가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언제부터 풍차가 이 마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끔한 풍차는 렘브란트 집안의 내력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집안은 집에 풍차가 있는 방앗간을 운영했는데, 미술평론가들은 이 풍차가 바로 렘브란트 특유의 빛을 이용한 그림의 원천이라고 평가한다. 풍차의 날개가 바람에 의해 돌아가 빛이 가려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날개가 지나가면 밝은 태양 빛이 쏟아지는 명암을 어릴 적부터 눈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구시가지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의 영혼이 담긴 명작들이 건물마다 걸려 있다. 마치 야외 미술관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거리와 건물 외벽, 신호등, 골목길 등 곳곳에 붙여진 그의 그림이 도시 어딜 가든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도시에 걸린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라이덴에서 머물 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자긍심도 높다. 곳곳에 전시된 그림은 달리는 자동차와 운하를 가로지르는 배에서도 볼 수 있고, 멋진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감상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은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보테르 마르크트 거리에 서면 볼 수 있는 <작업실의 화가>(1628년경)이다. 건물 외벽을 완전히 덮을 만큼 큰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렘브란트를 만날 수 있다. 캔버스의 2/3를 이젤과 캔버스, 자연 채광을 흠뻑 받는 방 안, 한 귀퉁이에서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건물 벽면에 걸린 큰 팔레트에 그가 그린 자화상과 다양한 작품들이 그려져 있고, 건물과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 그의 작품이 걸려 있어 마음껏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제는 그야말로 렘브란트의 도시가 된 라이덴. 그는 이곳에서 1606년 7월 15일에 태어났다. 방앗간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와 그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여느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년 렘브란트는 어린 시절 제도권에서 받는 교육보다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결국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들어간 라이덴 법학과를 자퇴하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청년 렘브란트는 1624년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연 데 이어 1632년까지 이곳에서 친척과 이웃 노인, 성서 등을 소재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어느새 2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네덜란드 내에서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22세 때 그린 자화상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렘브란트의 예술적 고향, 암스테르담
고향 하늘을 떠나 푸른 꿈을 안고 암스테르담으로 올라온 청년 렘브란트는 1632년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작품을 계기로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다. 1634년 명문가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을 했고, 이후 암스테르담에서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명성도 얻게 된다.
하지만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 일반적인 사조였던 평면적인 초상화에 만족할 수 없게 된 렘브란트는 종교나 신화적인 소재를 이용한 그림 혹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렇게 탄생한 그의 자화상은 모두 100여 점이 넘는다. 스무 살의 청년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의 그의 일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화상에서는 소박하거나 겸손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때로는 귀족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렘브란트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 아내 사스키아와 아름다운 사랑을 할 때는 얼굴에 기쁨과 희망이 스며있고, 그녀와 사별한 후의 자화상에는 절망과 좌절 등이 묻어있다. 사실 렘브란트는 결혼한 이후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어 아내와 아들을 외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내를 잃은 뒤에도 도박과 술에 빠져 불안한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노년에는 파산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그의 자화상처럼, 렘브란트의 노년은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처럼 애달팠던 셈이다. 힘겨운 노년 시절을 보내던 그는 1669년 단풍이 노랗게 물들어가던 어느 가을날, 유화 600여 점과 에칭(동판화) 300여 점, 소묘 수백여 점 등을 남기고 한 줄기 빛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그의 작품과 명성은 수많은 비평가에 의해 파란 하늘을 영원히 찌를 만큼 높아졌다.
렘브란트는 바로크의 거장으로 불린다. 가장 훌륭하고 바로크적인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국립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15~19세기에 활동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과 아시아의 작품 등이 전시된 국립미술관에는 렘브란트만을 위한 특별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단연 <야경(The Night Watch)>이라는 작품이다. 엄청나게 큰 이 작품 앞에 서면 땀을 흘리며 고된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자신의 키보다 두 세배나 큰 캔버스를 앞에 두고 사다리를 탄 채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렘브란트의 모습 말이다. 한 손에는 팔레트를,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쉴 새 없이 캔버스 위를 누비며 내면에 숨 쉬고 있는 열정과 예술혼을 쏟아냈을 것이다.
막상 이 작품은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에 의해 혹평과 무시를 받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잃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롯이 작품에 몰두하면서 완성한 그림이지만 당시 유행하던 화풍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술계에서 외면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의 사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처럼 그 시대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 후세에 인정받는 것이 예술가들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이태훈 칼럼니스트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이태훈은 스포츠서울과 월간조선에서 1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세계 80여 개국을 여행했고, 현재는 신세계 TV쇼핑, 헬로TV, MBC, KBS, CBS, SBS 등 공중파 라디오와 TV에서 여행 패널, 예술문화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여행의 Scene 세계>, <조선궁궐>, <한옥>, <끌리다 거닐다 홀리다>, <예술의 도시>, <뷰티풀 티베트>, <뷰티풀 유럽> 등 16권이 있다.
[이태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