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시원한 계곡 찾아 냇물에 발 담그고 부채 부치며 계곡물에 재어둔 수박, 참외 꺼내 먹으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없었으니 요즘 같은 여름나기는 상상도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짐작하는 상식과 실제는 많이 달랐다. 옛날에도 여름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얼음을 사용했다. 물론 상류층, 부자들에 국한된 이야기다.
조선 세조 때의 문인 서거정의 시에 양반의 여름나기 풍경이 보인다.
“얼음쟁반에 여름 과일 띄워라 / 오얏과 살구의 달고 신맛 섞여 있다 / 얼음쟁반에 담은 과일에 치아가 시리다”
여름이면 얼음쟁반(氷盤)에 신선한 연근, 참외 등 과일을 올려 더위와 갈증을 달랬다. 숙종 때 학자 김창엽의 시에도 얼음이 등장한다.
“고대광실 한여름, 무더위로 푹푹 찌는 날에 여인의 하얀 손이 맑은 얼음 내어온다. 앉은 자리에 두루 얼음 돌리니 대낮에도 하얀 안개 피어오른다. 웃고 떠드는 양반들, 더위를 모르는데 얼음 뜨는 그 고생 누가 알아줄 것인가?”
얼음을 물 쓰듯 펑펑 썼던 모양이다. 그러니 일반 백성은 여름에 쓸 얼음을 캐느라 겨우내 한강에서 강제노약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여름에 쓰는 얼음을 백성의 눈물이 얼어붙은 것이라는 뜻으로 누빙(淚氷)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양반이었다. 중국은 더했다. 상상을 초월한다. 한나라 문헌인 <천록각외사>에는 “한왕이 여름이면 찬 음식을 찾았다. 세자가 사재를 털어 얼음 방을 만들어 음식을 그곳에 저장해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2000년 전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도 아이스박스를 만들어 음식을 차게 보관했던 것이다.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혼쭐이 난 수양제는 여름이면 얼음 없이는 살지를 못했다. 말년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아리따운 궁녀 수천 명과 음란하게 놀았다. 여름에는 수양제가 더위에 지쳐 얼음 음료 100잔을 마셔도 갈증이 그치지 않아 의사가 항상 곁에다 얼음을 두고 지내도록 했다. 이를 본 궁녀들이 앞다투어 얼음을 사들여 쟁반에 올려놓고 은총 입기를 기다렸다.
<미루기(迷樓記)>라는 당나라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나라에는 아예 현대판 얼음조각인 아이스 카빙(Ice Carving)까지 등장한다. 양귀비의 오빠로 당 현종이 중용했던 양국충의 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장인을 시켜 얼음으로 봉황을 비롯한 동물의 형상을 조각한 후 금띠로 장식해 왕공과 대신에게 선물했는데, 그 옆에서 술을 마시면 여름에도 추운 기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개원천보유사>에 실린 이야기다.
동양에서 여름에 얼음을 이용한 역사는 오래됐다. <시경>에도 7월의 노래에 겨울에 얼음을 깨 창고에 저장한다는 내용이 보이고 주나라 때는 아예 얼음을 관리하는 벼슬까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시대에는 음력 6월이면 동빙고와 서빙고의 문을 열어 얼음을 각 관청에 나누어 주었는데, 얼음 수량이 적힌 나무패를 보이며 창고에서 얼음을 받아갔다. 얼음은 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입추까지 공급됐다.
1000년 전 동양 이미 빙과류 성행
얼음을 이용해 과일을 시원하게 하고 얼음물이나 얼음 조각으로 더위를 식히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대를 사는 우리처럼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 과일빙수를 즐기지는 못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000년 전에도 동양에는 별별 빙과류가 다 있었다. 일반 상식을 깨는 또 한 가지는 아이스크림은 서양에서 발달해 동양에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히려 일찍부터 동양에서 발달했다. 서양보다 훨씬 앞서 8~9세기 당나라와 10~11세기 송나라 때 다양한 빙과류와 얼음 즙을 먹었다. 9세기 말인 당나라 때는 이미 시장에 얼음 음료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당척언>이라는 당나라 소설에는 당시 수도 장안의 시장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상인들이 얼음에 향료와 꿀을 섞어 팔았다고 나온다. 이 무렵 장안에서 팔리는 얼음값은 금값과 맞먹었다고 했는데 고대에는 여름 얼음이 지배층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귀한 식품이었지만 시장에 얼음이 나왔으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권력층이 아니어도 돈만 있으면 얼음 음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은 금값에 버금갔을 지라도 수요가 공급을 초과했던 모양이다. 냉동기술이 없었을 것 같은 옛날에도 인공으로 얼음을 만들었다. 화약 제조기술을 응용해 얼음을 만드는데 화약 원료인 초석을 물에 넣으면 다량의 열을 흡수해 온도가 떨어져 얼음이 된다. 당나라 말 화약제조에 쓸 다량의 초석을 채취하며 제빙기술까지 발달하는데, 그 영향인지 송나라 때 동양에서는 다양한 빙과류가 발전하며 음식문화의 꽃을 피웠다.
송나라 시인 매요신이 쓴 시에 ‘빙소(氷酥)’라는 음식이 있다. “녹아 흐르는 빙소를 씹어 맛본다”고 읊었는데 빙(氷)은 얼음이고 소(酥)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연유 혹은 요구르트와 같은 식품이다. 얼린 연유, 요구르트다. 지금의 아이스크림 종류와 비슷했을 것 같다. 12세기에도 아이스크림과 비슷한 ‘빙락(氷酪)’이라는 음료가 보인다. ‘락(酪)’은 치즈와 비슷한 음식이니 얼린 치즈라고 할 수 있다. 느끼하면서도 상쾌하고 얼어붙은 것이 표표히 날리며 옥구슬 쟁반에서 깨어지는데 눈 같은 것이 입에 닿으면 스스로 녹는다고 표현했다.
‘내락반앵도(奶酪拌櫻桃)’라는 식품도 있는데 한자 뜻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액체 상태의 치즈 혹은 요구르트(奶酪)에 앵두를 넣고 저어 섞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꿀을 넣어 달콤한 맛을 살렸는데 송나라 궁정에서 여름철 최고의 별미로 여겼다고 한다. 현대의 빙수와 비슷한 빙과류도 보인다.
<몽양록>이라는 송나라 문헌에는 ‘설포매화주(雪泡梅花酒)’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설포(雪泡)는 눈과 거품이라는 뜻이니 빙수처럼 얼음을 갈아서 눈처럼 쌓아놓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런데 매화 술(酒)이라고 했으니 여름에 술에다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마신 것으로 짐작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요즘의 와인 빙수와 비슷할 것 같다. 또 설포두이수(雪泡豆爾水)도 있다고 했으니 이름으로 보면 두유를 얼린 것이 아닐까 싶다.
팥빙수와 흡사한 송나라 밀사빙
11세기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 “복날이면 황제가 조정 대신에게 팥빙수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위 식히라며 얼음 덩어리를 나누어 주었다면 모를까, 1000년 전 삼복더위에 황제가 팥빙수를 하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자로 쓰인 원문에는 팥빙수 대신에 ‘밀사빙’이라고 적혀 있다. 한자로 꿀 밀(蜜)에 모래 사(沙), 그리고 얼음 빙(氷)자를 썼다. 여기서 모래 ‘사’자는 진짜 모래가 아니라 팥소(豆沙)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꿀로 버무린 팥이니 단팥이다. 밀사빙은 곧 단팥으로 된 얼음이니 얼음과 단팥을 함께 먹는 식품이다. 팥빙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지금 먹는 것과 비슷한 개념의 팥빙수였을까? 적어도 곱게 간 얼음에 시럽이나 단팥을 올려야 현대적 개념의 빙수라고 할 수 있는데 얼음에 꿀 뿌리고 팥소를 얹었다고 빙수라고 추정할 수 있을까?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 없으니 밀사빙이 곧 팥빙수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밀사빙이 현대의 빙수와 비슷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중국이 아닌 일본 문헌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11세기 <마쿠라노소시(枕草子)>는 일본 고전으로 일왕 궁궐의 궁녀가 궁중생활에 대해 기록한 수필이다. 여기에 빙수가 나온다. 얼음을 칼로 갈아 낸 후에 쉽게 녹지 않도록 차갑게 식힌 금속그릇에 담아 얼음 위에다 칡즙을 뿌려서 먹었다는 기록이다.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얼음가루에 시럽을 뿌린 것이니 바로 빙수다. 일본의 전통 빙수 카키고오리(かきごおり)와 많이 닮았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왜 하필 칡즙이었을까 궁금하지만 일본이 고대로부터 칡 국수를 비롯해 칡을 이용한 식품을 발달시킨 나라란 점을 감안하면 특별할 것도 없다.
어쨌거나 일본에서 칼로 얼음을 갈아 빙수를 만들었으니 송나라 때 밀사빙 역시 얼음을 갈아 단팥을 얹은 팥빙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빙수 같은 빙과류를 직접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주로 얼음 쟁반에 과일을 차갑게 식혀 먹었다고 했으니, 지금과는 달리 차가운 얼음을 직접 먹지 않는 음식문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12세기 동양의 여름은 얼음 냉장고에 얼음조각, 아이스크림과 빙수까지 먹을 수 있는 얼음 천국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