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한다고 산에 오르면 왜 그리 철책들이 앞을 가로막는지… 그때마다 아, 내가 여전히 분단국가에 살고 있구나 실감한다니까.”
“동해안 바닷가만 가도 정신이 버쩍 들 때가 있어. 휴가 기간인데도 마음 다잡게 되고 괜히 군인들한테 미안하더라고….”
오랜만에 등산화 신고 나선 길에 뜬금없이 철책선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40대 중반이 코앞인, 근 6개월 만에 만난 친구들의 대화치곤 궁색했다. 요즘 말로 ‘심쿵’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핫한 일상을 기대했건만 입 밖으로 나온 얘기는 오르는 주식, 무소식이 무소식인 집값, 소리 없는 예금이 전부였다. 산 중턱까지 이어진 ‘쇼 미더 머니’류의 주제가 노선이 전혀 다른 철책으로 빠진 건 그러니까 순전히 북한의 김정은 덕분이었다.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건 여차하면 소리 소문 없이 버튼 누르겠다는 건가.”
“그걸 누가 어떻게 알겠어. 그나저나 그런 걸 개발할 기술력이면 서로 협력했을 땐 시너지가 엄청난 거 아니야?”
“그거야말로 누가 어떻게 알겠니. 빨리 저 철책선이나 시원하게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거야말로 ‘우생순’일 텐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란 말에 저마다 나름의 한 소리가 이어졌지만 허황되거나 신통치 않았다. 그 분위기가 민망했는지 눈앞에 버티고 선 철책에 괜한 투정이 쏟아졌다.
“좋은 경치 앞에 두고 돈 타령은…. 저어~기 정신 버쩍 차리라고 철책선 등장하신다.”
“그러게…. 저게 걷혀야 저 너머 절경이 눈에 제대로 들어올 텐데….”
팔각정 초소 전망대
한강의 또 다른 모습, 바람 따라 나선 길
일주일 뒤 나선 길의 행선지는 행주산성. 2013년 10월에 시민에게 개방된 ‘행주산성 역사 누리길’이 6월 걷기프로젝트의 시작점이자 도착점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곳은 한강변을 따라 철책선이 이어졌던 역사의 길이다.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한강에 설치한 그것을 2012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다. 분단을 상징하는 철책선의 길이는 총 12.9㎞. 누리길 주변의 철책이 완전히 걷힌 건 아니지만 손에 잡힐 듯 펼쳐진 한강의 풍경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날것부터 다소 인공적인 모습까지 다양하다.
고양 시정연수원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첫걸음부터 탁 트였다. 고양시 시민의 소통공간으로 마련된 시정연수원은 생각보다 너른 주차장이 이국적인데, 행주산성을 등지고 한강을 품고 있어 그저 들어선 위치만으로도 멋스럽다.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면 자연 그대로의 한강변이 지척이다. 행주산성 앞의 한강은 조선시대에는 행호(杏湖)라 불렀다는데, 강 폭이 넓고 물살이 약해 마치 호수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너른 강물의 흐름은 장중하다. 강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만 놓고 보면 움직임이 얕은 서해를 닮았다. 연수원 주차장에서 약 100m 떨어진 행주나루의 나룻배도 이러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여기서 잠깐,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는 한강의 고기잡이는 지금도 유효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환경오염에 서해로 나가는 물길까지 좁아져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행주나루에는 여전히 33명의 어부가 남아 있다. 여러 어종이 잡히는데 특히 자연산 민물장어가 유명하다.
물길은 잔잔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정반대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옷이 헐렁한 이들은 펄럭이다 못해 날아갈 것만 같다. 그만큼 매섭다. 그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면 행주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에 누리길 이정표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정 걷기 코스의 시작이다.
행주대첩비,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
경사진 내리막에 깎아지른 절벽까지…
역사 누리길의 총 길이는 4㎞ 남짓이지만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 기슭은 오르고 내리는 길이 숨 가쁘다. 오르는 계단의 경사도 그렇지만 내려가는 계단의 경사도 만만치 않다.
절벽 위에 자리한 팔각정 초소 전망대는 해가 떨어지며 비추는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는 초소로 사용됐는데 철책을 철거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초소 옆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강 건너 풍경을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오가는 자동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강변으로 방향을 돌리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새 떼가 한가로이 정겹다. 깔끔하게 정리된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이곳부터 이어지는 순찰로가 민물가마우지 수백 마리의 휴식지라고 새겨져 있다. 겨울철에는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고방오리, 쇠오리, 흰죽지 등 오리류가, 여름에는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등 백로들의 먹이터다.
강 풍경을 뒤로하고 산으로 걸음을 옮기면 느긋하게 걷기 좋은 오솔길이 빼꼼하다. 말 그대로 오솔길인데, 한 명이 앞서 나가면 뒷사람을 그저 뒤따라 갈 수밖에 없는 좁은 폭이 오히려 정겹다. 자그마한 통로 주변에 어찌 그리 수풀이 우거졌는지, 초여름 녹음이 짙어 바라보는 눈이 시려왔다. 간혹 그 녹음에 취해 숲으로 들어서는 이들이 있는데 벌이나 뱀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면 길이 아닌 곳은 가는 게 아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경치에 취하다보면 누리길 왼편에 행주산성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행주산성에서 인근 지역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정자 진강정으로 향하는 길인데, 진강정 뒤 고개를 오르면 충장공 권율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행주대첩비와 마주하게 된다.
곧게 뻗은 자유로, 마음 다잡는 길
대첩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눈앞에 걸리는 게 없다. 이곳보다 높지 않은 주변 풍광에 다시금 가슴이 탁 트인다. 서울 방향으로 시선을 멀리하면 왼쪽으로 북한산 자락과 대덕산, 인왕산, 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첩비 아래로 쭉 뻗은 자유로(강변북로)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왕복 10차선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는 장소로 이보다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기세가 등등해 보인다. 때마침 행주산성을 찾은 학생들의 대화가 귀에 꽂혔다.
“저기 쭉 뻗은 도로 좀 봐. 엄청 크고 넓다.”
“잘 봐둬. 저게 앞으로 우리 인생이야. 탄탄대로다!”
행주산성 역사 누리길 코스
고양 시정연수원→팔각정초소전망대→진강정→권율장군대첩비→대첩문→시정연수원 입구→고양 시정연수원(진강정~대첩문에 이르는 행주산성 구간은 유료(성인 1000원) 구간)
행주산성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화정역 → 011, 012, 85-1번 버스 → 행주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