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추억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지기 마련인가보다. ‘불금’이 한참 지난 토요일 새벽 3시쯤 홍대의 한 골목을 지나가다보면 어김없이 수십 미터 길게 늘어선 줄을 목격할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흘러간 정취가 깊게 느껴지는 술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분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학생용 탁자와 의자들이 늘어섰고 한편에 자리 잡은 DJ박스 뒤에는 LP판이 빼곡했다.
큼지막한 흰색 도화지에 적힌 대기명부를 살펴보니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에도 100여 팀이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도 심상치 않은 것이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듯 최백호의 ‘세월이 가면’이 흘러 나오자 20대 중반의 여대생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신사까지 한 목소리로 ‘떼창’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음악이 바뀌고 박진영의 데뷔곡 ‘날 떠나지마’가 간주로 흘러나오자 곳곳에서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테이블 간 경계는 허물어졌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가요를 테마로, 복고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주점 ‘밤과 음악 사이(이하 밤사)’의 주말 밤 풍경이다. 2006년 처음 생겨난 이후 독특한 콘셉트와 분위기가 입소문을 타며 지점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평일에는 부장님부터 신입사원까지 함께 어우러지는 회식장소로, 주말이면 추억과 함께 피 끓는 젊음을 불사르는 클럽으로 각광받으며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점포로 늘어났고 밤과 음악 사이는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래봐야 주점인데...’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지만 놀라지 마시라. 20여 개 점포에서 발생하는 주식회사 밤과 음악 사이의 매출은 지난해 200억을 훌쩍 넘어섰다.
시나브로 대중문화계에 주는 파급력도 커졌다. 7080 흘러간 가요들이 음원차트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당시의 가수들이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트렌드를 선도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응답하라 1994>와 전편인 <응답하라 1997>을 연출한 신원호 PD는 “밤사에서 술을 마시다가 영감을 받아 드라마를 기획하게 됐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글로벌 스타 싸이는 지난해 말 ‘밤사’를 패러디한 ‘땀과 음악 사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으로 90년대 클럽을 연상케 하는 콘서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올해는 ‘밤과 음악 사이’를 타이틀로 하는 뮤지컬드라마 형식의 공연도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제대로 놀던 ‘딴따라’의 아지트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야구)을 했는데 철없이 싸움도 많이 해서 벌금도 많이 냈어요.(웃음) 정신을 차리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니 음악밖에 없더라고요. 흥이 많으신 아버지와 음악에 미쳐있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부터 음악이 거의 귀에서 떠난 적이 없었거든요.”
밤사를 탄생시킨 김진호(48)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원조 딴따라’라고 정의했다. 막걸리 한 사발에 멋들어진 노랫가락을 안주 삼았다는 실향민 아버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이자 DJ로 많이 알려진 둘째형 김철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격동의 학창시절을 마치고 무작정 당시 이름을 날리던 클럽과 나이트를 찾아가 DJ보조생활을 시작했다.
“20만원 월급 받으면 10만원은 월세내고 5만원은 자주가는 대폿집 외상값을 갚았어요. 남은 5만원으로는 판을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주변에서는 미쳤다고들 했죠. 좋은데 이유가 없잖아요? 그때부터 모은 판이 고스란히 밤사에 소장돼 있습니다.”
다년간 배고픔을 견디며 유명 DJ반열에 올라선 그는 경험을 살려 7080년대 팝 음악을 모은 ‘추억의 롤라장’, 가요들을 모은 ‘클럽DJ 가요 리믹스’, ‘클럽DJ 댄스뮤직’ 등 여러 히트앨범을 낸 바 있다. 그는 “리믹스 앨범들로만 1천만 장 이상을 팔았다”고 회고했다.
시간이 지나 음반기획자로도 나서며 그는 리쌍 1·2집, 애즈원과 럼블피쉬 등의 앨범을 기획하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불현듯 음반기획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원인은 MP3의 등장이다.
“밤을 새가며 음반기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가 문득 ‘MP3를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는 시대에 1만원이 넘는 음반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저 없이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을 그만두고 그가 처음 뛰어든 곳은 의류사업이었다. 당시 DJ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해외유명 브랜드의 양복을 사 입었지만 만족도는 크게 높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업아이템을 발견했다. ‘질 좋은 맞춤양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 김 대표는 직원 수가 늘고 회식자리가 잦아졌지만 회사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주점이 없다는 것이 항상 아쉬웠단다.
“동네에 망한 식당을 하나 발견했어요. 이곳을 싸게 인수해 지인들과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죠. 난로를 들여놓고 모아 놓은 수천 장 LP판을 걸어놓고 고구마 구우면서 밤새 소주잔을 기울였어요. 입구 미닫이문에는 작은 간판도 걸었는데 우리가 주로 밤에 모여 술을 마시고 음악을 좋아하니 별 생각 없이 밤과 음악 사이라고 정했죠.”
2005년 12월 한남동 밤사 1호점은 이렇게 탄생됐다. 그런데 지인들을 위한 아지트로 꾸민 장소에 음악소리를 듣고 들어와 잠시 앉아 술을 마시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김 사장은 이때 아예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음악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변변한 안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15년 동안 다니던 골뱅이집에 가서 레시피를 사들이고, 20년 단골 두루치기 집에서 재료를 공급받아 안주를 만들기로 했다. 2008년 홍대 2호점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밤사의 인기가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가 많은 지역적 특성에 맞게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유승준, 노이즈 등의 90년대 댄스곡을 위주로 음악을 틀기 시작하며 30~40대는 물론 당시 음악을 잘 모르는 20대도 밤사를 찾기 시작했다. 홍대, 강남역 등 문을 여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자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이면 밤마다’ 등 유사한 콘셉트의 아류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음악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요. 손님들의 마음을 가라앉게도, 신나게도 만들 수 있는 노하우가 있거든요. 밤사가 가진 가장 큰 특색이자 무기죠.”
지점이 하나하나 늘어가며 관리가 힘들어질 법도 하지만 김 대표는 수많은 프랜차이즈 제안을 고사하고 있다. 소수의 지인들과 함께 운영하는 몇몇 점포를 제외하고는 ‘품질유지’ 및 콘셉트 통일을 위해 직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40~50대 위한 새로운 콘셉트 구상 중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을 거두고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 대표는 곧 새로운 콘셉트의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명 ‘OOO 뮤직박스’라는 타이틀로 40~60대가 맘껏 즐길 수 있는 클럽을 만드는 것이다. 뮤직박스 앞 빈칸은 매주 또는 매일 바뀌는데 이는 이 세대가 향유했던 나이트클럽이름으로 채울 예정이다.
“온전히 40대 중반부터 60대를 아우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루는 ‘마이 하우스 뮤직박스’, 또 하루는 ‘씨에스타 뮤직박스’로 만들어 그때 나오던 음악만 모아서 틀 생각입니다. 40대 중반 이후 특히 여성분들은 10년에 한번 외출 하는 경우도 많아요. 예전 50대 여성분이 오랜만에 외출해 밤사를 찾아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일상이 바쁘기도 하지만 맘 편히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늦은 봄에는 음악을 통해 60대까지 미친 듯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