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유지하던 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늘 똑같은 게 싫었다.
비가 그친 밤, 서울대 음대 교수실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박종화 씨(38)는 “더 짧게 깎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1998년에는 나쁜 일들을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어 삭발을 했죠”라고 말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꾼 그는 새 음반 <HEROES>를 발표하고 독주회를 열었다.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과 ‘악흥의 순간’, 호로비츠가 편곡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27년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2007년 서울대 교수로 귀국한 그가 국내에서 처음 발매한 앨범이다.
“고국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서 삶을 마감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제 영웅이에요. 그들의 선율에 배어 있는 향수와 우울, 외로움에 공감이 가요. 저도 5세에 한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끼죠. 그들의 음악을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박 교수는 먼 길을 돌아 고국에 왔다.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음악대학 영재학교와 서울 선화예술중학교,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이탈리아 코모 마스터 클래스,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왕립 음악원 ,독일 뮌헨 음대 최고 연주자 과정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7개 국어가 가능하다. 억세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와 일본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의 악센트가 묘하게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들이 내 말만 듣고서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더라”며 웃었다. ‘피아노 유목민’으로 세계를 누빈 그에게 어떤 언어가 편하냐고 묻자 “내 모국어는 음악”이라고 답했다.
“제 피는 한국 사람이지만 교육은 주로 외국에서 받았어요. 몸은 동양인이지만 생각은 서양인이니 완전 짬뽕이죠. 한동안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했어요. 하지만 할 말이 있으면 일기를 쓰는 대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요. 글 대신 연주로 의사를 표현하니 제 모국어는 음악이나 다름없죠. 한글로 쓰고 듣는 데는 문제없지만 모르는 단어가 많아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늘어 신문에 칼럼도 써요. 하지만 한글로 이메일을 타이핑하는 속도는 여전히 느려요.”
고국이 나를 불렀다
외국에서 잘 나가던 그가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불과 33세에 교수직을 선택한 것도 화제였고, 비서울대 출신이라 더 눈길을 끌었다.
“친구가 ‘서울대에서 교수를 찾고 있다’며 권유했죠. 당시에는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쌓느라 바빠 교수직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몇 년 동안 아무도 못 뽑았다기에 그냥 지원해봤는데 운이 좋아 임용됐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고국이 저를 불러들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힘들었던 때 모국을 배우고 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이 오히려 낯설었다. 특히 고춧가루가 잔뜩 뿌려진 음식이 부담스러웠다.
박 교수는 “처음에는 골라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포기했어요. 이제는 매운 음식을 잘 먹어요”라고 말했다.
정체성 혼란은 시간의 힘이 해결해줬다. 어느 날 문득 어릴 적 듣던 한국 동요가 기억났다. 지난해 태어난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고향의 봄’과 ‘학교 종이 땡땡땡’을 라흐마니노프풍으로 편곡했다.
“주말에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요. 딸에게 들려줄 음악을 찾다보니 동요가 생각났어요. 한국인이자 아버지인 내 정체성을 자연스레 찾게 된 거죠.”
온돌방으로 꾸민 교수실
피아노 2대가 놓인 그의 교수실은 뜨끈한 한국식 온돌방이다. 자비로 나무 마루를 깔았다고 한다. 온돌방으로 꾸민 서양 음악 교수실은 처음이었다.
“바닥에서 발암물질인 석면과 접착제가 발견되어 수리를 했어요. 고치는 김에 같은 층에 있는 국악과 교수실처럼 온돌 마루를 깔았어요. 국악기는 대부분 앉아서 연주하니까요. 바닥이 따뜻하면 몸에도 좋답니다.”
아늑한 조명과 푹신한 소파로 꾸민 이 방에서 제자 11명을 가르친다. 일주일에 13시간 수업이 진행된다. 레슨이 연주 활동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오히려 제 선생님들은 ‘인생에서 꼭 한 번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가르치기 시작할 때가 배우기 시작할 때거든요. 어렸을 때는 선생님에게 배우고 가르칠 때는 학생들 실수에서 배워요. 다만 제가 좀 더 연륜이 많은 선생이 아닌 게 미안해요. 제자에게 줄 수 있는 최대 보물이 경험이잖아요.”
피아니스트 박종화 뒤에도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다. 일본 피아노의 거목인 이구치 아이코, ‘건반 위의 음유시인’ 러셀 셔먼, 거장 레온 프라이셔, 카를 울리히 쉬나벨,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엘리소 뷔르살라체 등에게 배웠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피아노의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박 교수는 3세에 라디오 소리를 피아노로 재현한 신동이었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가 아들의 절대음감을 발견했다.
“진짜 천재였다면 그때 들키지 말았어야 했어요.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어려운 삶인지 알았다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법률가나 은행가는 목표가 정확하지만 피아니스트의 미래는 불확실해요. 어디가 꼭대기인 줄도 몰라요. 내가 과연 좋은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는 가파른 산 중턱에 서 있는 기분이에요. 완벽한 연주는 불가능해요.”
그는 사업가 아버지를 따라 5세에 일본으로 갔다. 일본어를 모르는 채 동경 음대 영재반에 수석 입학했다. 장남이라 피아노는 취미로 배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학생 레슨 선생이 그의 비범한 연주에 놀라 자기 스승인 미유라 가츠코에게 데려갔다. 미유라는 일본 음악계 거목인 이구치 아이코에게 그를 소개했다. 암투병 중이던 이구치는 그를 인생의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암 초기였던 이구치 선생님은 여동생(피아니스트 박종경)과 저를 일요일에 가르쳤어요. 몸이 아파 저희 둘만 레슨하고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꼬박 6년을 배웠어요. 이구치 선생님은 망명 온 러시아 유대인에게 음악을 전수받은 분이었어요. 1980년대에 한국인인 제가 러시아 피아니즘을 배울 수 있어 정말 행운이었죠.”
세계 3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최연소 입상
그는 198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보스턴의 일반 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노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인 교회에서 미국 피아노계 거장인 러셀 셔먼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를 만났다. 셔먼의 부인은 피아니스트 변화경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였다.
“제 연주를 들은 셔먼 선생님이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입학했어요. 손만 놀리지 않고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죠. 기교를 과시하는 순간 음악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셔먼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음악적인 자극과 영감을 동시에 주셨죠.”
셔먼은 콩쿠르 출전을 금지했다. 음악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득하고 깊이 음악을 공부한 후에야 콩쿠르에 나갈 기회를 줬다. 1995년 처음 허락한 세계 3대 경연대회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연소 입상과 최우수 연주자상을 받았다.
학구열이 뜨거웠던 그는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유럽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1998년 이탈리아 휴양 도시 코모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해 카를 울리히 슈나벨과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레온 플라이셔, 알리시아 데 라로차,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 거장들을 사사하고 교류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는 슈나벨 선생님이 한 달에 한 번 가르쳐주시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음악적 교류를 했어요. 슈나벨은 아르투르 슈나벨(베토벤의 후계자) 아들이에요. 셔먼 선생님도 베토벤-체르니-부조니-스토이어만으로 이어지는 베토벤 음악 후계자죠. 슈나벨 선생님과 공부하면서 음악을 관찰하는 법과 영감을 배웠습니다.”
이듬해에는 바슈키로프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소피아 왕립 음악원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2003년에는 엘리소 비르살라제 교수 문하에서 독일 뮌헨 국립 음대 최고 연주자 과정을 공부했다.
배움에 늘 목마르다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후 파리로 가서 정착했다. 현대음악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었다.
“가장 혈기 왕성한 나이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프랑스에 간다니까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많이 말렸어요. 파리에서 현대음악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하면서 정착하려고 애썼죠.”
유럽 무대에서 그는 ‘번개처럼 나타난 한국의 젊은 천재’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와 뮌헨 헤르큘레스홀 등 세계 유명 공연장에서 연주했다. 또 세계적 오케스트라인 보스턴 심포니와 드레스덴 심포니,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 등과 협연했다. 변화무쌍하고 웅장한 연주로 청중을 몰입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항상 오늘보다 내일 더 연주를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몸이 허락한다면 한계에 도전하면서 발전하고 싶어요. 배우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소리 하나만 내도 깊은 표현력을 전달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구사하지 않았던 테크닉도 발견하고 싶고, 관객과 영적 차원으로 교류하고 싶어요.”
한편 개척자 정신이 강한 그는 지난달에 연극 모노드라마 <노베첸토>에 출연해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죽는 피아니스트 이야기로 연주를 맡았다.또 그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2007년부터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를 꾸준히 모으고 있기도 하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