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속성을 깊이 파고들어야 느낌이 축적되죠…이 시대의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
입력 : 2012.11.12 11:21:52
수정 : 2012.11.28 15:21:23
지난 10월 중순 약속 장소인 마로니에 공원에 성석제는 배낭을 메고 나왔다. 며칠 전 자전거로 양평을 달리는데 앞에 가던 이가 전화를 받느라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가 줄어든 것을 모르고 추돌해 손가락을 다쳤다고 했다.
그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이다. 고향 상주에서 6학년 때 시작해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탔다. 읍에 속하는 동네였지만 읍내에서 가장 멀어 이웃한 면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3~4km씩 걸어 다니다 자전거를 타게 됐다. 덕분에 운동회에서 마을 대항 시합을 하면 으레 1~2등은 그의 마을이 차지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서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된 것은 8~9년쯤 됐다.
“처음 자전거를 타면 몸과 자연과 자전거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걸 맞춰 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몸에 맞는다. 그러면 엄청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무아지경이 된다. 자전거 소리만 들리고 나도 없고 자전거도 없다.”
소설의 자양분이 된 고향
그의 부모는 자식들 공부를 시키려고 고향을 떴다.
“1975년인가 수출 드라이브가 한창일 때였다. 집 팔고 논 팔고 상경했다. 자식들 공부 시키겠다고…. 집엔 지금 친척이 산다. 그래서 실향민이 됐다. 아마 우리 세대 90%가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영원한 상주 사람이다. 그의 고향이자 그의 소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는 음식이나 맛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어렸을 때 음식을 먹어야 정신적 허기가 채워진다. 일 년에 십여 차례 내려가는데 한 번 가면 2~3일씩 있다가 온다. 고향이 상당히 크다. 어렸을 적엔 학교와 집만 오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올라와 지금도 갈 곳이 많다. 넓고 깊은 곳이다.”
그게 소설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했다.
“일부러 쓰려고 하지는 않으나 그렇게 된다. 어린 시절 자연에서 보낸 덕분에 계속 그 쪽을 보게 된다. 지금은 양로원화 된 장수마을이라 소설의 자원이 될 이야기는 없으나 10년 정도는 거의 그쪽에서 저장된 원유를 파먹듯이 썼다.” 제2의 고향 역시 그의 작품의 밑거름이 됐다. “서울에 올라와 가리봉동과 독산동에서 살았다. 사춘기를 벌집촌에서 보냈다. 거기엔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쪽방 사는 산업전사들과 친해져 그들의 삶을 목격했다. 어려운 사람들끼리 더 많이 싸웠고 좀도둑도 많았다. 카세트라디오 같은 조금 값이 나가는 물건을 훔쳐가곤 했다.” 성석제는 그렇게 자양분이 된 어렵던 시절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더 여유가 있고 유머가 풍부한 지도 모르겠다.
“잘 만난 유전자 덕분에 소설의 자원이 많은 편이다. 성장기에 어렵게 산 사람들 얘기가 즐비하다. 한국 소설에는 부자들 얘기는 안 나온다, 눈길이 자연히 어려운 사람 쪽으로 간다. 힘들고 못살고 어렵고 짓눌리고 아프고…. 그런 사람들이 소설의 에너지다.” 그런데 그의 전공은 문학이 아니다. 법대엘 갔으니 자식들을 위해 고향을 떠난 부모에겐 보람을 안겨줬을 터였다. “그런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번번이 부모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고…. 대학 가서 1학년은 원 없이 놀았다. 집에 절반 정도 들어갔을까. 그나마 들어갈 때마다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계열 입학을 했는데 그래도 법과가 나을 것 같아서 그리로 갔다. 가서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기형도를 만나다
그렇게 그는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문학에 접어들었다. 친구 기형도(시인)도 만났다. 그러나 낭만에 취할 시기는 아니었다.
“바로 민주화의 봄을 만나 시위하고 농성하고 서울역으로 진출했다. 역사의 굴곡의 현장에 있었다. 학교는 휴교를 하고…. 법과 다니다 군대간 학생은 드물다. 군대 마치고 와서 보니 다섯 명만 군대엘 갔다. 그래서 (다섯 명 가운데) 수석졸업을 해 단상에 올라가 총장하고 악수도 했다. 나보다 훨씬 잘한 기형도는 여학생이 더 잘하는 바람에 수석을 놓쳤는데….”
이렇게 그의 문학 인생은 시로 출발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친구들이 모두 시를 써서 억지로 쓰게 됐다. 기형도가 나보다 먼저 등단했다. 시를 계속 쓰려면 등단하자고 했다. 아마추어로는 못 쓸 것 같다고. 그런데 프로가 되니 청탁을 받기 전에는 쓰지 못하겠더라.”
그는 기형도와 시상을 공유할 정도로 가까웠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가 죽었다. 그의 시를 정리하다보니 그가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가 그를 소설의 길로 인도했다. 사실 그가 자라난 환경이나 정서적 토양은 시보다 소설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큰 것은 시적인 것은 아니고 소설적인 것이다. 그래서 (시조차)서사적인 게 많이 담겨 있다.”
졸업 후 그는 잠시 출판사에 다녔다. 그러나 4~5개월 정도 다니다 (방랑)병이 도져서 본격적으로 지방을 돌아다녔다.
“제주도로 가서 거기서부터 올라왔다. 1년 정도를 방랑인지 방황인지를 했다. 마침 (시인으로) 등단한 뒤여서 약간은 핑계도 됐다. 그렇게 놀다가 동양시멘트에 들어갔다. 입사 후 바로 결혼을 했고 아파트도 당첨됐고 아이도 낳았다. 6년 다니며 기본적인 것은 해 놓고 다시 그만뒀다. 시로 먹고 살 수는 없고 고민하다가 고추 장사를 할까 생각했다. 가볍고 환금성도 뛰어나고…. 그래서 음성 청송 등 산지를 돌아다녔다.” 그게 소설가가 될 기회를 만들어줬다.
“내가 우연히 시집을 두 권 냈는데 한 권은 1991년에 냈고 두 번째 시집을 낼 분량이 돼 정리를 하겠다며 두 달 정도로 생각하고 1994년에 신림동 고시촌엘 들어갔다. 그동안 시 쓰려고 생각하다 안 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시는 정신이 맑아야 하는데 그해따라 너무 더워 맑은 정신이 안됐다. 그것을 정리하느라 여름이 지나니 책 한권이 됐다. 소설인지 시인지 애매한 것이었다. 그걸 내니 소설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어오면 쓰고, 또 들어오면 쓰고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됐다.”
경상도 사나이 같은 그의 소설
성석제는 누구나 처음 봐도 경상도 사나이라고 알아챌 수 있다. 사투리 섞인 말투며 (처음엔) 약간은 무뚝뚝한 표정이며…. 그게 그의 소설에도 묻어나는 것 같다. 그에게 엄청난 문학상들을 안겨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한 대목을 보자.
‘황만근. 황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해가 가며 차츰 신지(神智)가 돌아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어 알껍질을 까주었다. 그리하여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이렇게 처음엔 딱딱하게 시작하는 것 같은데 지나면 재미있다. 그는 소설가 특유의 본성으로 그걸 설명한다.
“소설 쓰는 게 광산 파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광부들이 거죽을 팔 때는 힘들다. 처음 잡은 연장도 서툴고, 그러다 몸이 적응하면 된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누구나 처음엔 다르게 쓰려고 한다. 화법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속도나 분위기 모든 것을 다르게 하려고 한다. 처음 누구를 만나면 어색해 하다가 알게 되면 친해지는 것처럼.”
그의 소설이 읽을수록 맛이 나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런데 그것 말고도 풍기는 게 있다. 알 듯 모를 듯 무협지 분위기가 난다.
‘여산이 세 번 연속 발길질을 가한다. 소금쟁이가 물 위를 뛰어갈 때처럼 가볍게 양발을 놀려 쳐들어온다. 정묵은 시선을 여산에게 고정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 순간 배롱나무 가지가 머리에 닿는다. 정묵이 멈칫하는 순간, 여산의 돌려차기가 작렬한다. 정묵이 휘청하고 쓰려지려다 간신히 나무를 잡는다. “양귀비 뒷발차기!” 여산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위풍당당>에서
“내 또래 사춘기를 보낸 사람들이 베이비부머인데 그때가 무협지 전성기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읽은 축에 속한다. 무협지를 읽기 좋은 환경이었다. 아버지 친구가 전국구 규모의 무협지 대본소를 운영했으니…. 그게 영향을 많이 준다. 사람도 인풋이 아웃풋이 되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성석제의 소설은 재미가 있다. 그런데 직설적인 게 아니라 해학적이며 은근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근원을 고향에서 찾는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웃는데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하회탈 같은 웃음”이라고 했다.
“농부에겐 낙천성이 있다. 그걸 보고 받은 것이 있다. 나도 내가 쓴 것을 보고 웃을 때가 있다. 농부가 일하듯이 나도 매일 조금씩 일을 한다. 그러다보면 은은히 깃든 문장에 낙천성이 있다. 그런 게 쌓이다가 폭발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설가인 그가 어려서 읽은 무협지를 어떻게 평가할까.
“무협지 스타일은 대중적이라 쉽게 읽히지만 거칠고 문장의 완성도도 낮다. 지금은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가 없다. 옛날 무협지가 국립도서관에 다 있는데 (당시엔) 그렇게 재미있던 것을 (지금은) 열 페이지를 못 읽겠다. 그러나 그게 은연중에 스며들어 아직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어떤 요소가 나를 탐닉하게 했을까. 현재 추리적 기법과 연관해 소설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는) 무협적 기법이라고 할까. 신비주의 초인주의 같은 것, 또 한자 조어로 함축적 의미를 주는 것도 있다.”
그는 무협지에는 ‘신분상승’이나 ‘염정’ 같은 요소가 있는데 소설에 그런 것을 넣으려면 너무 간지럽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스스로도 재미가 없어 못쓴다고 했다. 권선징악조차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게 인간이고 소설이다. 절대악 절대선 절대미 캐릭터를 소설에 쓸 수는 없다. 굳이 그런 것을 쓰려면 묘사하지 않는 것, 설명하지 않는 것, 그런 방식을 쓴다.”
묘사를 하다보면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여산의 경우(<위풍당당>의 한 캐릭터) 과거를 알 수 없게 했다. 독자가 유추하게끔 했다.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는 있었으나 나중에 없앴다.”
왜 그래야 할까. “자연은 아무리 자세히 묘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오묘하다. 그런데 사람은 자세히 묘사하면 상상의 여지를 빼앗아 버린다. 자연은 그래도 질리지 않으나 사람은 질린다. 사람은 누구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패턴화 한다. 물리게 할 바에야 그냥 놔두는 게 낫다.” 그는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문학이 희망을 주는 것도 삼가야 한다고 한다.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내면을 응시하게 해야 한다. 정서적 연대를 갖거나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주면 된다. 덮어 버리고 위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희망을 주는 것은 다른 세계다. 게임이나 무협지의 세계가 아닐까.”
어쨌든 그는 이 시대 내로라하는 이야기꾼이다.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 “쓰기 시작하면 계속 들어온다, 우연히 들어온다. 주변에서 하는 남의 대화도 귀에 들어오고 날씨가 도와주고 태풍이 와서 도와주기도 한다. 내가 쓰려는 것과 연관이 되어 문장이 된다. 쓰려는 의지와 생각이 자성을 띄는 것 같다. 주변의 사물이나 사건 등을 끌어당긴다. 마치 감전된 것 같다. 정말 안 될 때는 꿈에 계시(?)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파고드는 그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는 두루 얇게 섭렵하기보다 깊게 파고들어야 제대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고 한다.
“속성을 깊이 들어가면 깊이 들어갈수록 느낌이 축적된다. 그게 이야기가 된다. 넓게 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새로운 대상, 여성
그런 자세가 여성을 다루는 소설에도 통할까. 성석제는 지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가 쓴 소설이 이삼백 편은 된다. 그 가운데 여성을 다룬 게 단 한 편뿐이다. 나를 사랑해준 여성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장소도 바꿨고 분위기도 바꿨고 여성스러운 노트북까지 새로 샀다.”
그래도 남자인 그가 여성들의 속내를 어떻게 들여다볼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속은 모르겠고…,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허구라서 조심하는데 신비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 내 자신부터 재미가 없어진다. 억지로 한다면 몰라도 접근해서 나갈 수도 없으니….”
그래서 사실에 접근하기보다 한 가지라도 느낌을 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느낌을 축적하려면 속성을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니…, 이래저래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지금 세상사의 거의 대부분처럼 되어버린 경제가 그의 소설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물리학까지 소재로 끌어들인 그이기에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그는 경제는 소설이 잘 안 되는 문장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거시적으로는 쓸 것이 없고, 한 번 시도는 해봤지만 논설이 된 것 같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불평등이나 빈곤 등을 다루어야 하는데 수치가 나오면 주장이 된다.
허구가 아니라 실제를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다큐식으로 쓰면 어떨까. 다음다음 정도에나 생각해볼까….”
성석제
지난 9월 말 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이 연 철학카페에서 성석제 작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줄 알았던 황동규 시인과의 일화로 처세의 기본을 얘기했다.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어느 날 스승님이 흙탕에서 넘어졌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인간이 재미있다”고도 했다. 우직한 표정의 그는 옛 시골 이야기꾼처럼 이렇게 재미있고 또 재치 넘치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국내 손꼽히는 다작 소설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발상도 기상천외하다. 올봄 출간한 <위풍당당>은 시골 어느 마을로 흘러든 사람들이 혈연 아닌 ‘사회적’ 가족이 되어 조폭들을 혼내주고 있다. 1960년 경북 상주 출신. 연세대 법대를 나왔고 1986년 <유리 닦는 사람>으로 등단했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이효석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최근작 <위풍당당>을 비롯해 <칼과 황홀> <인간적이다> <소풍>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등 다수의 장·단편을 냈다.
좋아하는 소설가는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와 프랑스의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등. 특히 셀린느의 작품은 아주 치열한데 웃겨서 재미있다고 했다. 한국 작가로는 벽초 홍명희와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