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⑩ 유대인들에겐 ‘죽음의 선율’ 바그너…홀로코스트 때 울려퍼진 그 곡
입력 : 2012.07.06 10:49:08
수정 : 2012.07.25 15:06:44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바그너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중 ‘발퀴레’
작곡가 바그너(1813~1883) 음악은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선율’이다. 독일 총통 히틀러(1889~1945)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할 때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 3막에 등장하는 ‘순례자의 합창’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질식해 죽어가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 음악이 어쩐지 끔찍하게 들린다.
바그너 음악은 한때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유럽 사람들에게 ‘공포의 선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군대가 행진할 때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중 ‘발퀴레의 기행’이 쓰였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추앙했으나 결국 그의 음악에 오점만 남겼다. 그러나 히틀러 때문에 바다처럼 깊고 우주처럼 드넓은 바그너의 음악 가치는 결코 추락하지 않았다.
사실 유대인 음악가들도 음악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그너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비록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작품 연주를 전면 금지시켰으나 지휘자 주빈 메타(76)와 다니엘 바렌보임(70)이 연주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산됐다.
한동안 잠잠했으나 최근에도 바그너 작품의 연주 움직임이 있었다. 지휘자 아셔 피쉬(54)가 지난 5월 18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오케스트라 100명을 이끌고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려 했다. 이스라엘 오페라단도 바그너 음악극을 공연하는 것을 검토했다가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협회의 반발로 전격 취소했다.
유대인을 증오하고 독일 독립 혁명에 가담
사실 유대인들이 바그너를 싫어할 만하다. 그는 독일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유대인을 경멸했다. 유대인 작곡가들이 독일인의 정서에 해를 끼친다고 비난했다. 1850년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출판한 수필 음악 속의 유대주의를 통해 라이벌 작곡가 멘델스존(1809∼1847)과 마이어베어(1791~1864) 등 유대인 작곡가들을 공격했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들과 우정을 지켰다. 그의 마지막 음악극인 ‘파르지팔’ 초연을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에게 맡겼다.
바그너는 독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드레스덴 혁명에도 적극 가담했다.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연방국가였다. 하지만 혁명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는 스위스로 망명을 떠난다. 궁핍한 생활로 시련을 겪었지만 오페라 작곡에 매진하는 시기였다.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걸작이 작곡됐으며 ‘오페라와 희곡’ 등 각종 음악 이론서를 완성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혁명 전력과 오랜 망명 생활이 뜻하지 않은 영광을 가져다줬다. 그의 음악을 지독하게 사랑했던 독일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와 부귀영화를 누렸다. 국왕은 화려한 저택과 작곡료를 주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까지 지어줬다. 바그너가 죽은 후 장남 지크프리트가 시작한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오늘날 세계적 오페라 축제로 자리 잡았으며 자손들도 그 덕을 보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작곡가
바그너
바그너는 정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직선적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음악적 소신을 드러내 각종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우선 그는 선율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기존 고전주의 음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음악은 문학, 연극과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는 이론을 펴며 급진적인 낭만주의 음악을 이끌었다. 시대를 앞서간 바그너의 음악은 대담하고 강렬하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그의 음악극은 ‘마르지 않는 우물’에 비유된다. 파고 또 파도 끝없이 새로운 가치와 매력이 샘솟는다. 그리스 비극과 신화, 철학, 종교 등을 복잡하게 엮어 존재의 모순과 구원을 다룬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유난히 사랑의 감정에 솔직한 탓에 수많은 여자들을 홀렸다. 스위스 망명시절에는 신세를 졌던 갑부 오토 베젠돈크의 부인 마틸데와 지독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경제적 도움을 준 은인을 배신했을 정도로 위험한 사랑의 부산물이 바로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틸데의 시에 곡을 붙인 <베젠돈크 가곡집>도 유명하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이 연애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오페라 가수였던 미나에게 들통나는 바람에 쓸쓸하게 끝났다.
하지만 실연의 아픔은 고스란히 오페라에 녹아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켈트인의 옛 전설을 소재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노래했다. 용맹한 전사 트리스탄은 왕의 아내가 될 이졸데를 데리고 오는 중에 시녀의 실수로 ‘사랑의 음료’를 마신 후 이졸데와 관계를 맺는다. 하루를 못 만나면 병이 나고 사흘을 못 만나면 죽는 음료 때문에 이졸데는 왕비가 된 후에도 트리스탄과 불륜을 지속했다. 그러나 곧 들통나고 만다. 추방된 트리스탄은 연인을 잊을 수 없어 병상에 눕게 되고 이졸데를 데리고 올 사자(使者)를 보내놓고 기다리다가 숨을 거둔다. 이졸데도 그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낭만주의 오페라의 정점인 이 작품은 연주 시간만 4시간이 넘는 대작. 1856년 뮌헨에서 작품이 초연됐을 때 에로티시즘으로 범벅이 된 무대에 질겁한 남자 관객들이 아내를 극장 바깥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사랑과 죽음, 실의, 밤의 이미지로 가득 찬 이 작품의 백미는 2막. 야심한 밤 밀회를 나누던 두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왕에게 발각되는 장면이다. 낮(이별)을 저주하고 밤(죽음과 만남)을 찬미하는 몽환적인 사랑의 이중창은 40분 넘게 계속된다. 바그너는 유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의 아내이자 작곡가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불륜에 빠져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코지마와 자녀 3명을 낳은 바그너는 아내 미나가 죽은 지 4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코지마를 빼앗긴 후 뵐로는 바그너의 반대파에 섰으며 평생 그를 증오했다.
공연 중엔 못나가 ‘오페라의 독재자’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며 지칠 줄 몰랐던 바그너의 정력은 음악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관 무대에 나흘 동안 18시간에 걸쳐 공연하는 마라톤 음악극을 올렸다. 26년에 걸쳐 쓴 ‘니벨룽겐의 반지’로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4부작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이 엄청난 공연이 끝나면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 성악가, 청중들은 녹초가 된다. 독일 낭만파 악극의 절정을 보여준 이 작품은 고대 북유럽 신화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어간다. 줄거리가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면 된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신과 거인, 난쟁이 종족 ‘니벨룽겐’, 인간이 싸움을 벌이는 게 기둥 줄거리다.
라인강의 황금으로 반지를 만들어 끼는 자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얻게 되지만 대신 영원히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는 난쟁이 알베리히가 황금을 훔쳐 반지를 만들면서 비극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늘과 땅, 지하 세계를 지배하던 신, 거인, 난쟁이, 인간이 서로 반지를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분출하는 욕망, 사랑, 배신, 음모, 저주가 4부작에 걸쳐 펼쳐진다.
4부작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 중 주인공인 지그프리트(저주와 복수에 맞서기 위해 신이 만들어 낸 최고 영웅)를 중심으로 보자면 4부작은 3대에 걸친 가문의 이야기. 지그프리트의 할아버지 세대 이야기가 ‘라인의 황금’, 부모 세대 이야기가 ‘발퀴레’, 지그프리트의 성장과정 이야기가 ‘지그프리트’,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결말이 ‘신들의 황혼’이다. 방대한 규모에 걸맞게 관현악과 성악은 장엄하고 웅장하다. 육중한 오케스트라 선율, 깊고 무거운 노래, 신화적 공간을 연출하는 장대한 무대가 압권이다. 그러나 워낙 공연 시간이 길고 무대 제작비가 많이 들어 자주 공연되기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잡기 버거운 줄거리와 등장인물 이름을 미리 예습하지 않으면 ‘고문’이 될 수도 있는 오페라다.
하지만 ‘오페라의 독재자’ 바그너는 공연 중간에 관객이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그가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아예 세로 통로를 없앴다. 공연 중간에 나가려면 20여 명에게 피해를 끼쳐야 한다. 관객이 끝까지 봐야 할 만큼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니체가 그의 오페라 공연 도중에 자리를 떴다는 이유로 대판 싸우고 절교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바그너는 대중이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의 오페라를 종교라고 여겼다. 실제로 대표작 <탄호이저> <니벨룽겐의 반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은 인간과 신의 세계를 아우르는 걸작이다. 쇼펜하우어 철학과 그리스도교, 불교 영향으로 인간 존재의 모순과 구원을 선율에 녹였다. 바그너가 큰 소리 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의 열성팬이 아닌 청중은 괴로웠다. 바그너 오페라를 들으면서 20분 정도 자다가 깼는데 성악가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긴 시간과 난해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음악팬들이 많다. 일명 바그네리안(Wagnerian)으로 바그너에 대한 어떤 공격도 허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