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가진 남자라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라는 가족 구성원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날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때 가족들은 그에게 힘이 되고 마지막 버팀목이 되기도 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순간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것은 여자와는 다른 남자들만의 세계다. 보다 근원적인 생명의식 속에서 아이라는 한 인간을 낳고 기르며 여성이 느끼는 처절함이 어떤 것인지 남성이 결코 알 수 없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남성의 세계이다.
긴 투병생활을 끝내고 가정으로 돌아온 남자가 가족에게 느끼는 감사의 마음도 그렇다. 어렵고 힘든 질곡의 나날을 마감하고 마침내 무엇을 이룩했을 때 가장으로서 남자가 느끼는 가족에 대한 뿌듯함도 그렇다. 사업의 실패, 친구로부터의 배반, 가까웠던 이웃으로부터의 냉대, 사회적 몰락…. 그런 것들은 어쩐 일인지 혼자가 아니라 쌍으로 혹은 떼를 지어 찾아온다. 가정만이 자신을 지켜주는 단 하나의 기둥이었음에 남자가 절실해 질 때도 그렇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마지막까지 자신을 껴안고 보듬어 주는 가정이 남아 있다고 느끼는 것도 남성만의 세계다.
‘한수산 필화사건’이라고 불리는, 국가기관이 고문을 통해 황당한 사건조작을 시도했던 그때, 육체는 능멸당할 대로 능멸당하고 영혼은 갈가리 찢겨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 또한 그랬다. 내 집이었다. 이곳이 있기에, 이곳만이 겨우 내가 숨 쉴 생명의 텃밭임을 알았다.
그렇다 집이었다. 집이란 길과 길을 이어주는 자리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고, 길이 시작되는 곳에 또 집은 있다. 나그네는 집이 있기에 하룻밤을 머물며 잠자리에 든다. 그의 하루하루는 날은 저무는데 길은 멀다. 아침이 오면 다시 떠나야 하는 나그네에게 있어 집은 육체의 샘물이자 영혼의 쉼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정은 남자가 한 생애의 삶을 경영할 수 있는 삶의 추이자 닻이 된다.
평생 소설을 써 오면서도 때때로 나는 내가 쓰는 한국어는 참 이상한 언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라는 대명사가 소유격으로 쓰일 때이다.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지방 정도는 괜찮다. ‘우리 가족입니다’ 하고 소개를 하면서 ‘우리 아들, 우리 딸’입니다 할 때까지도 들어줄 만 하다. 그러나 ‘우리 집사람입니다’ 하는데 이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마누라를 누구랑 함께 소유한다는 말인가.
그런 걸 책이라고 써놓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사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구나 싶은 책이 있다. 소위 ‘행복한 가정 만들기’ 운운하는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행복한 가정의 십계명’ 따위를 보고 있자면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가정은 안 만들고 사는 게 났겠다 싶다. ‘가족은 공동운명체다’ ‘가족과 머무는 시간의 길이만큼 행복의 길이가 비례한다’는 그런 십계명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차라리 ‘인간은 끝내 죽고, 가족도 끝내 헤어진다’라고 하는 게 더 진실이 아닌가 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나이기에 나의 가정경영은 0점이 아니라 마이너스권에 속한다. 딸 하나, 아들 하나의 네 식구, 우리 가족은 도대체 의견통일이라는 것을 이뤄본 적이 없다. ‘가족이 함께 여행이나 가면 어떨까?’ 말이 나오자마자 과반수를 넘기기 힘든 게 우리 가족이다.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자면서 찾아간 동해안의 호텔에서 한 번도 우리 가족은 모두가 일어나서 함께 해돋이를 맞이한 적이 없다. 함께 식사를 하러 가려해도 먼저 싸우고 나서야 집을 나서는 게 빌어먹을 우리 가족이다. 어려서는 그랬다. “난 햄버거, 난 돼지갈비, 난 뷔페”라고 하는 식이었다. 겨우겨우 합의하여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식당엘 가도 메뉴판 속 스테이크의 숲을 헤치고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절묘하게 ‘김치볶음밥’을 시켜대는 마누라가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다.
가족에 대한 어떤 일반론에도 속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가족은 내 가족, 우리 가족일 뿐이다. 내가 저들과 다르듯이 내 가족, 내 가정은 저들의 가정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치와 율법에 있어서도 달라야 옳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평생을 집에서 살았다. 평생의 대부분을 직장이 없는 전업 작가로 글을 쓰며 살았으니 나에게는 직장이 집이고 출근하는 곳도 퇴근하는 곳도 집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제일 큰 방은 언제나 내 서재였다. 안방이 되어야 할 큰 방을 남편의 일터로 빼앗긴 아내는 한평생 장롱이라는 것이 없이 살았다. 아무리 은은한 자개장롱을 가지고 싶었다 한들 들여놓을 방이 아내에게는 없었다. 지워지지 않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다.
아이들에게도 지워질 수 없는 미안함은 있다. 초등학교를 네 곳이나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나는 ‘어른이 되면 이것만은 지켜 내리라’ 하는 결심이 있었다. 결코 내 아이들에게는 이사를 다니는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주민등록법상으로 보자면 나는 이 결심을 지키기는 했다. 아들은 태어난 집에서 고2까지 자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서류 속에서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시작한 삶을 제주로 일본으로까지 아비를 따라 옮겨 다녀야 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밖에 결혼식 주례를 서지 못했을 정도로 나는 사회적 존경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살았다. 그런 내가 단 한 번 스승의 아들 주례를 선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자리에서 이제 새로운 가정을 이룩해야 할 젊은 부부에게 가정의 의미를 서로에 대한 ‘부드러움(tenderness)’과 ‘존중(respect)’이라는 두 단어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웨인 왕 감독의 영화로 더 유명한, 메이미 탄(譚恩美)의 소설 ‘조이 럭 클럽’의 대사 하나를 인용하면서였다.
가정은 서로를 존중하는 데서 기둥이 서고 서까래가 얽힌다. 내가 그의 주장과 의사를 존중할 때 비로소 관계의 튼실함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남편이 아내를 뭘로 보고, 자식이 부모를 뭘로 알 때 그걸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한다.
벌써 오래전이긴 하지만 한때 서울시내 택시들이 ‘손님을 가족처럼’이라는 표어를 붙이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분노에 차서 항의의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손님을 손님으로 대접해야지 왜 가족처럼 아느냐. 과장하자면, 손님을 내 식구처럼 알기 때문에, 멀쩡한 아내를 두고도 바람이나 피우는 나쁜 남편처럼 손님 대접이 개판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움이란 일상에서의 따스함이었다. 말 하나, 표현 하나에도 정이 깃들고 배려를 담은 관계를 이어가라는 뜻이었다. 10여 년쯤 살고 나면 남편이란 자는 화장을 하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따위의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경지(?)에 가 닿는다. 제발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모든 부부싸움의 근원은 부드럽지 못한 데 있다는.
내 삶을 돌아볼 때, 삶의 의미는 평화에 이르는 것이었다. 지위의 높고 낮음, 돈이나 재산이라는 교환가치의 많고 적음은 결코 나를 평화 속으로 이끌지 못했다. 어려서는 몰랐다. 더 높은 것이, 더 많은 것이 나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끌어 결국 평화롭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노년의 황금연못 기슭에 서 있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안다. 평화, 그것의 근원은 가정 그리고 가족이라는 구성원들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오늘을 사는 남자는 숭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사랑이 그러해졌듯이 살아가는 일 또한 숙명도 야망도 되지 못한다. 직장도 사업도 자유업도 모두가 그렇다. 하나하나가 산업사회의 작은 톱니가 되어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이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작은 부속품으로 역할을 다할 뿐이다. 중소기업을 이룩하겠다거나 대기업의 임원이 되겠다는 따위를 우리는 ‘야망’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오늘 남자가 살아가는 일이 그렇다.
그렇기에,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새록새록 더해 주는 가족이 있고, 하루하루 옹달샘을 두 손을 오므려 퍼 올리듯 그들과 함께 하는 가정의 가치는 평화의 바다 저편 기슭을 향해 철썩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