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모 스포츠신문에서 올해 상반기의 7대 유행어를 선정했다. 광고 카피로 쓰였다가 유행어가 된 사례도 하나 들어갔다. 사실 예로부터 광고에 쓰였다가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행어가 된 광고 카피는 많았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제품 구매할 때의 상황 이외에도 투표, 남녀 미팅, 신입사원 선발 등 뭔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흔히 비슷한 표현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거의 20년 전에 좋은 오렌지를 보고 외쳤다는 ‘따봉’은 브라질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감탄사 중 하나로 자리 잡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은 워낙 사회가 다양화돼서인지 위의 예와 같이 특수한 상황을 떠나 일상생활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범용적으로 쓰인 광고 카피 유행어를 찾기가 힘들었다.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되고 인기를 얻어서 그것이 광고의 카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번에 유행어로 선정된 광고 카피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다. 가장 많은 패러디가 등장한 소재였다고 한다.
노래방의 정식 곡목으로 올라서 남녀노소가 흥얼거리기까지 했다고. 그건 차두리가 광고 모델로 등장한 “간 때문이야”, 바로 대웅제약의 우루사 광고다. “간 때문이야” 열풍의 성공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전문 모델이 아닌 차두리의 운동선수다운 순수함과 건강함에 코믹함까지 갖춘 광고 모델, 또 그에게 슈퍼맨 같은 키치(kitch)스러운 색깔을 입히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의 반복 등이다.
이런 비슷한 요인을 활용해 작년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방영되고 있는 광고가 있다. 바로 천호식품의 산수유 광고다. 산수유 광고는 노래는 하지 않지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참 좋은데~” 식의 반복된 말로 깊이 각인을 시켰다. 우루사 광고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최고경영자인 김영식 회장이 직접 출연했다는 것이다.
한국 최초로 TV 광고 모델로 등장한 사장님은?
기업의 브랜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인자이자 대표 얼굴로서 최고경영자나 창업자가 광고 모델, 특히 TV CF에 등장한 사례가 외국에서는 상당히 많다. 패스트푸드 체인인 웬디스의 창업자 데이브 토마스는 1989년부터 사망하는 2002년까지 800여 편의 웬디스 광고에 출연했다.
꼭 광고에 모델로 나오지 않았더라도 강연이나 큰 발표회나 행사의 주인공으로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주축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 버진 그룹의 리처드 브랜슨이나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나서는 것에 대한 겸양의 도에 입각한 전통적 반감,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정치적인 이유로 최고경영자나 창업자가 대중을 향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그렇게 활발하게 나서지 않았다. 광고로 보면 1981년 6월에야 처음으로 CEO가 TV CF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한국플라스틱공업주식회사의 신제품인 골드륨 론칭 광고에서 당시 대표이사였던 서재식 사장이 봉황이 그려 있음직한 명패가 놓인 전형적인 사장님 책상에 앉아 근엄한 표정과 말투로 소비자에 대한 약속을 연설문과 같은 형식으로 낭독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플라스틱의 서재식입니다. 그동안 PVC 업계를 이끌어온 저희 한국플라스틱이 이번에 미국 콩고륨과 손잡고 패션 플로어 골드륨을 생산하게 됐습니다. 회사의 명예를 걸고 특히 품질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애용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지금 보면 어색하지만 CEO가 직접 TV CF에 출연했다는 자체로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마지막 부분의 “회사의 명예를 걸고 특히 품질에 최선을 다했습니다”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며 유행어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최고경영자 광고 모델들
‘자사 광고 모델로 나선 사장들, 비전과 신뢰 높여 투자 유인’이란 제목을 단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최고경영자의 자질과 역량이 투자자들의 투자결정요인으로 떠오르자 최고경영자들이 직접 자사 광고의 모델로 나서고 있다. 종전에 광고에 등장하던 사장들은 대부분 자사 제품의 선전에 주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투자자를 대상으로 자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장이 직접 투자자에게 투자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12월4일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다. 기사처럼 1990년대는 최고경영자 광고 모델의 전성시대였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이다. 미국 MIT 공학박사 출신이라는 배경과 부드러운 외모와 제스처로 배순훈 사장은 1993년과 1994년 연속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최고의 광고 모델로 뽑히기도 했다. 배 사장 영향인지 국내의 대표적인 그룹 중에서 유독 대우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이 TV 광고에 많이 등장했다. 대우자동차의 김태구 사장이나 대우자동차판매의 최정호 사장이 대표적이다.
이후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광고에 출연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산업군을 떠나서 창업자가 출연한 광고와 전문경영인으로 양분할 수 있다. 창업자의 경우 제품의 성능을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신뢰와 보증에 무게가 더욱 가 있다. ‘최씨 고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간 광동제약 창업주 최수부 회장이 출연한 일련의 광고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경옥고의 경우 아예 “광동제약 창업주 최수부입니다”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이성적으로 “일본 수출로 호평받고 있는 경옥고를 드링크로 개발했습니다. 경옥고 자신 있게 권해드립니다”며 제품 소개를 한다.
전문경영인 경우에는 경영철학이나 모델, 비즈니스 성과를 알리는 데 주력한다. 물구나무 선 사진으로 유명했던 어느 은행장의 “전 가끔씩 세상을 뒤집어 봅니다”라는 광고가 좋은 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창업주이든 전문경영인이든 최고경영자가 나오는 광고는 전문성, 성실, 믿음, 진정성이 중요한 의약품이나 고관여제품에 잘 어울린다.
크라이슬러 광고에 등장한 리 아이아코카는 최고경영자가 출연해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광고 모델로 회자된다.
대우그룹의 사례에서도 언뜻 추측할 수 있듯이 최고경영자가 광고 모델로 가장 많이 나서는 산업군이 자동차가 아닐까 한다. 최고경영자가 출연해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광고로 얘기되는 리 아이아코카의 1980년대 초 크라이슬러 광고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리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의 기적과도 같은 재기와 포드에서 쫓겨나다시피 해 복수를 다짐한 개인의 인생 스토리까지 합쳐져서 연예인과 같은 명성을 누렸다.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성과와 개인사와 함께 그가 출연했던 10년 동안의 크라이슬러 광고물들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유감스럽게도 리 아이아코카 이외에는 자동차 부문에서 최고경영자가 등장해 그리 성공한 광고를 보기 힘들다. 대우자동차판매 최정호 사장의 경우 원래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했던 것처럼 광고에서의 연기와 대사 처리가 지금까지 광고에 출연한 한국 최고경영자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공장 라인을 다니면서 “요즘 대우차 타보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개인적으로 그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본 포드자동차의 “Have you driven Ford lately?”를 그대로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무 소리 없이 한동안은 김 사장까지 똑같은 내레이션을 하며 대우자동차 광고를 했다. 그만큼 당시엔 광고 업계가 해외시장에 어두웠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자동차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아이아코카도 그랬지만 위기 상황에서 주로 광고에 등장한다. 2001년 SUV 차량인 익스플로어에 장착된 파이어스톤 타이어의 품질 결함으로 이미지나 실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포드자동차는 창업주인 헨리 포드의 증손자로 당시 CEO였던 윌리엄 클레이 포드를 모델로 한 네 편의 기업 이미지 광고를 방영했다. GM에서도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도, 존폐가 문제가 되던 2009년 9월 “May the Best Car Win”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AT&T 회장을 역임하고 그해 7월10일 GM 최고경영자 지위에 오른 에드 휘태커는 첨단시설이 구비된 GM의 디자인센터를 돌아다니며 60일 동안 만족하지 못하면 그 기간 동안에 언제라도 환불을 해주겠다는 야심만만하면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GM의 새로운 마케팅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그런데 최고경영자가 출연한 포드와 GM의 이 광고들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실제로 성과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랬을까?
최고경영자를 광고 모델로 출연 시 10가지 주의사항
세계 최고의 광고전문지 '애드 에이지'에 최고경영자를 광고 모델로 쓸 때 퍼블리시티와 신뢰도 부문에서 최대의 효과를 거두고 역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사항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10가지에서 포드와 GM뿐만 아니라 한국의 최고경영자가 출연한 광고의 승패가 엇갈린 이유와 앞으로의 성공요인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기본 맷집을 지녀야 한다.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디지털 시대의 광고에 최고경영자를 전면 노출시키는 것은 대중의 도마 위에 최고경영자를, 바로 기업브랜드 자체를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중의 이유 없는 비방과 칼질을 충분히 이겨내거나 어떤 경우엔 무시할 수 있는 맷집과 강심장을 가진 경영자여야 광고 효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일약 CF 스타로 떠올랐다.
산수유를 출시한 천호식품의 김영식 회장의 경우 이 같은 역경을 스스로 이겨낸 최고경영자로 적합하다. 사실 윌리엄 클레이 포드는 쉽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믿음직한 이미지를 주는 데는 실패했다.
둘째, 기업에 대한 대중들의 일반적인 평가와 연동해 경영자의 출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GM의 경우 기업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절하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반응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기업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반향이 큰 재판이 벌어진다든지 부정적인 이슈가 화제가 돼 기업인 전반에 걸쳐 여론이 좋지 않을 경우에 최고경영자가 광고에 출연하면 소비자들에게 비판거리를 던져주는 격이 된다.
셋째, 공허한 약속은 금물이다. 소비자들이 구체적으로 느끼고 혜택을 입을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제품과 연계가 돼야 한다. 포드의 경우 미국 역사 속의 포드자동차라는 감동적인 영상을 꾸몄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행동이 없었다. 대우의 ‘탱크주의’는 대우전자 제품들이 얼마나 단단하고 충격에 강한지 보여주는 장면이 세계 유수 대학 출신의 대우임직원들과 함께 방영이 됐기에 배순훈 사장의 메시지에 믿음이 더해졌다.
넷째, 출연하는 최고경영자 자신의 인간으로서 개성과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은 자유발랄함을 넘어서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브랜슨이 광고 모델로 출연하는 자체가 뉴스가 되고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우의 배순훈 사장도 온화하면서 차분한 분위기와 미국 명문대 공학박사라는 타이틀이 함께 후광효과를 발휘했기에 성공적인 캠페인을 이끌 수 있었다. 김영식 회장 또한 경상도 사투리와 투박한 모습이 차별점으로 작용했다.
다섯째, 자칫 잘못하면 경영자가 출연하는 광고는 역설적으로 기업이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고 보일 우려가 있다.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안 되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CEO가 간절하게 호소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GM이 위의 광고를 했을 때 ‘1980년대 초 크라이슬러보다 더욱 절망적인 상태’라는 식의 해석이 나왔다.
여섯째, 새로이 외부에서 영입된 최고경영자보다는 내부 출신의 인물에 소비자들은 더욱 신뢰를 보내는 경향이 있다. ‘변화’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GM처럼 외부 출신의 인물이 최고경영자, 곧 CEO로 취임해 광고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좋은 접근방식이 아니다.
일곱째,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으로 다양한 채널을 이용해 캠페인 전개를 해야 한다. 한 차례 쇼 형식으로 한다면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저 어려운 한 순간을 모면하거나 호도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쉽다. 근본적으로 일반인들이 거리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블로그를 포함한 소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광고 이외에 전방위적인 소비자 접촉을 해야 한다.
여덟째, 캠페인의 실질적인 목적과 대상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광고대행사 측으로 보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고려해 경영자를 광고에 등장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 나쁘게 말하면 클라이언트에 아부하는 도구로 이용되거나 책임을 함께 나눠지려는 시도가 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자기만족, 자아도취형 광고가 만들어진다.
아홉째, 지나치게 개인으로서 최고경영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위험 분산 차원에서도 1인에게 짐을 지워서는 곤란하다. 스타마케팅에서 어느 한 개인 스타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가 그 스타가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려 곤혹을 겪는 것이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최고경영자를 광고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는 차별점이 될 수 없다. 여타 광고와 다른 형식을 취했을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별점을 찾아야 한다. 그 차별점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브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