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베를린 박물관이 패전 이후 동 베를린에 속하게 되자 1962년 프로이센 문화재재단이 다렘 박물관과 샤를로텐부르크 궁에 임시 박물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7년 후인 1969년 옛 법원 건물로 이전하게 된다. 사법부 및 행정기관의 용도로 사용됐던 바로크 양식의 이 박물관은 법원 건축가인 게를라흐(Philipp Gerlach)가 설계해 1735년 준공된 것으로 유대인의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기에 규모가 작았다. 따라서 1975년 베를린 시의회는 박물관을 확장할 것을 논의했다.
독일인들은 그들이 자행한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과오가 새 건물을 신축함으로써 그들만의 슬픔이 치유되는 공간으로만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 유대인을 ‘게토(ghetto;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에 격리시켰던 아픈 역사와 독일의 역사가 이제는 통합되길 바라고 있었다. 기존의 베를린 박물관과 완전히 독립된 공간인 동시에 통합이 돼야 했다. 이 의미는 역사도시인 베를린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재해석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최초 논의 후 한참 뒤인 1989년 국제현상공모(International Competition)가 실현되며 수많은 경쟁 속에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계획안이 당선됐다. 당시 그의 건축세계는 문화의 철학에 근거한 독창적이고 실험성이 강해 많은 사람들은 당선안이 실현되는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서의 난관과 실무자와의 갈등을 극복하며 마침내 2001년 9월 정식 개관을 하게 된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이 건축물로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을 받게 됐다. 또 그의 독특한 건축관이 잘 나타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 Berlin)은 개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박물관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유대인 역사, 예술 수집품, 역사적 기록에 대한 상설 전시가 있다. 그리고 광범위한 유대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특별 전시가 있다. 박물관 내부의 용도 또한 신중하게 고안된 공간에 의해 결정됐다. 또 여기에는 설치, 환경, 도서관, 미디어 러닝 센터, 식당과 공부방, 심포지엄 및 각종 이벤트가 개최된다.
선과 선 사이 (Between Lines)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평면 형태는 유대인의 상징인 ‘다비드의 별’ 형상이다. 선이 예리한 각으로 아홉 번 구부러진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평면 형태는 유대인의 상징인 ‘다비드의 별’ 형상이다. 선이 예리한 각으로 아홉 번 구부러진다. 이것은 지그재그 라인을 만들어 찌그러진 다비드의 별과 같이 해석된다. 이렇게 꺾인 날카로운 선들은 공중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로 그의 선에 대한 개념은 건물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선들은 아연도금의 금속성 외벽패널 파사드에서 길게 틈으로 나타나며 마치 견딜 수 없는 충격에 의해 벽이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외부로부터의 창과 문이 부족한 것은 고립과 분리를 의미하는 건축가의 의도된 해석에 기인한다. 이 건물은 겨우 인식될 만한 기능적인 문 이외에 눈에 보이는 출입구가 없다. 옛 법원 건물을 통해 출입하도록 돼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두 건축물의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다. 또 하나의 출입구는 유대인 박물관의 지하 출입구다. 지하층의 경사진 복도는 이민의 통로를 의미하며 선이 교차하는 또 하나의 통로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곳으로 높은 콘크리트 벽체로 사방이 막혔다.
기억의 공간 바닥에는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을 상징하는 강철 조각 작품이 깔려있다.
유일하게 꼭대기의 작은 틈으로 빛이 관통한다. 이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사방이 막힌 공간을 풍요롭게 채운다. 이 닫힌 공간에서 모든 방문자는 고요한 적막과 더불어 과거의 회상에 잠시 빠지게 된다. 기억의 공간 바닥에는 이스라엘의 현대미술가인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hman)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얼굴 형상을 강철로 조각해 불규칙하게 깔았다. 관람객의 발걸음에 의한 괴성은 희생된 영혼들의 비명소리처럼 느껴진다. 두 개의 복도는 지하에서 교차하지만 직각으로 만나지 않는다. 이 복도는 20세기 독일로부터 추방된 유대인들의 이민 경로를 상징한다. 복도는 경사져 있어 오르막을 오르는 것은 상승을 의미하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노력을 상징한다. 복도의 마지막 유리문은 추방의 정원(Garden of Exile)으로 연결한다.
정원에는 같은 높이에 동일한 간격의 49개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있다. 이 기둥들은 경사진 바닥에 기울어져 있어 기둥들 사이와 주변을 걸을 때 혼란을 느낀다. 모든 기둥에서는 도토리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는 위에서 하나의 덤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이민하는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는 동안의 유일한 은신처이자 이민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주변을 둘러싸는 벽보다 더 높이 솟아있다. 또한 이 기둥들은 유대인 화장터의 묘비를 연상시킨다. 역시 콘크리트로 지어진 홀로코스트 탑과 함께 박물관의 금속성 외벽과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하에서 계단을 통해 연결 되는 지상의 상설 전시공간은 동일한 단면 형태다.
지하에서 계단을 통해 연결이 되는 지상의 상설 전시공간은 동일한 단면 형태다. 지하층과 마찬가지로 미로와 같은 구조다. 각 층의 다양한 층고와 창들의 정렬은 각각 극명하게 구별된다. 창문의 유리는 틈 사이에 꼭 맞게 들어가 있고 선과 같은 창 사이에 보이는 베를린 도시는 기울어져 보인다. 이 창문의 형상은 밖에서도 구별 가능하다.
photo by Sarah Jane
박물관은 최고의 전시를 하기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건축을 했다. 그것은 박물관 본래의 목적대로 기능적인 전시공간의 작품 관람 대신 건축가가 의도한 다양한 공간을 통해 유대인들의 역사적 비극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전 작품인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을 헌정하기 위한 누스바움 미술관에서도 의도된 방식이다.
여기에 사용된 건축적 표현 방식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서도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회상이다. 경사진 천장과 벽에서의 틈은 전시된 그림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보완하지만 전시된 예술품들은 건축가의 예술작품인 건축물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누스바움 미술관에 이어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프로젝트 또한 독일-유대인의 역사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낙천주의 예술가 다니엘 리베스킨트
photo by Erik Charlton
우울한 음악가는 단조의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
비극에 천작하는 작가가 있을 수 있고 절망에 집착하는 영화감독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건축가는 비관론자일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 건축은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건물은 콘크리트와 철, 유리로 지어지나 실제로는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으로 지어진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1946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957년 이스라엘로 이주를 했다. 유년기에 음악 신동이라고 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클래식의 거장 이츠하크 펄만과 같은 해에 미국·이스라엘 문화재단(America-Israel Cultural Foundation, AICF) 장학생으로 선발돼 뉴욕으로 이주를 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후 연필데생에 심취해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 재학시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림 연습에만 몰두했다. 이런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예술가 꿈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어머니의 조언으로 바뀌었다. ‘예술가는 건축을 못 하지만 건축가는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음악과 미술 대신 건축을 선택했던 것이 세계적인 거장 건축가가 되는 첫 걸음이 됐다.
1970년 뉴욕의 쿠퍼 유니언에서 건축학사, 1972년에는 영국의 에섹스 대학원에서 건축이론과 건축역사를 전공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1989년에는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설계현상공모에 당선되면서 일약 세계적인 건축가로 떠올랐다. 2003년 911 테러로 붕괴돼 버린 뉴욕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재건축 국제현상공모(Ground Zero공모)에 선정돼 당시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건축가가 됐다. 이 작품에서 건축가는 어떤 이보다 낙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극을 긍정적인 힘으로 재탄생시키는 그의 건축관이 미국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고 비평가들은 예찬했다.
그의 대표작인 덴버 미술관, 펠릭스 누스바움 미술관, 대영 전쟁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등은 역동적이며 조형미가 뛰어나다. 그리고 기존의 건축언어를 부정하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작들이다. 또한 철학, 예술, 음악, 문화, 연극 등 박식한 이론적 사고로 새로운 담론을 건축에 접목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건축 작품은 파격적인 외관 디자인으로 많은 대중과 언론에 보도가 됐던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사옥이 있다. 초고층(72층) 주거건축물인 해운대 I’PARK의 경우 역사와 시대성이 반영된 건축과 무관하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인 덴버 미술관의 매스 개념과 커튼월 유리, 베를린 유대인 미술관 외벽에서의 선형들 그리고 대영 전쟁박물관의 스케치와 유사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유대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족사의 배경과 폴란드 공산정권의 암울한 유년시절 유대민족간의 차별에 의한 트라우마로 인해 차별화된 그만의 건축을 추구하게 된다. 동시에 음악적인 풍부한 감성으로 건축물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건축가, 즉 예술가로 평가 받는다.
덴버 미술관 (Denver Art Museum, 덴버, 미국) 산책을 나서는 두개의 선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지오 폰티가 설계한 미술관을 증축한 작품으로 인근에는 마이클 그레이브스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날카로운 예각의 건축형태로 반짝이는 거대한 티타늄 조각 같은 건축물이다. 기존의 미술관과 공공도서관 그리고 주변의 매장 카페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주출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덴버의 도시계획자인 제니퍼 몰튼과 루이스 샤프 덴버 미술관장, 미술관 이사회 및 후원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으로 혁신적인 건축물로 탄생됐다. 역사적으로 덴버의 발전 기반인 로키산맥의 빛, 지질, 철도 그리고 높은 해발고도의 빛에 반사된 시민들의 화사한 얼굴빛이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축적인 영감을 주었던 작품이다.
세계무역센터 마스터 플랜 (Ground Zero, 뉴욕, 미국) 기억의 기초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인의 관심 속에서 노먼 포스터, 리차드 마이어, 피터 아이젠만 등 최고의 건축가들이 참가한 국제현상공모에 당선된 작품이다. 전체 5개의 건축물을 낮은 건물에서부터 차례대로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과 같은 나선형으로 배치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상징인 독립선언의 해 1776년을 상징으로 최고 높이를 541m(1776피트)로 계획했다. 건물의 고층부에 생명의 찬양을 의미하는 식물원, 지상에는 폭파 잔해인 구덩이 일부를 존치해 추모공간으로 설계했다.
삼각형의 플라자에는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빛의 쇄기(The Wedge of Light)’라는 두 줄기의 빛이 있다. 한 줄기 빛은 매년 9월11일 오전 8시46분 비행기가 충돌한 시간과 장소를 비춘다. 나머지 빛은 10시28분 건물이 붕괴된 자리를 비추며 각인 시킨다. SOM 설계회사와 협력 작업과 설계과정에 일부 변경이 발생했지만 다니엘 리베스킨트만의 건축 콘셉트로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해운대 I’PARK (부산, 대한민국)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형태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사옥 이후 국내 두 번째 작품으로 당시 국내의 주거시설 중에 최고층(72층, 292m)의 건축물로 계획됐다. 각각의 높이가 다른 초고층 건물 4개동은 호텔과 주거시설이며 저층부에는 업무시설과 판매시설이 예각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해운대 지역에 역동적인 형태와 독창적인 아이콘을 형상화했다. 건물의 외관은 파도의 우아함과 바다 위 배들의 돛, 개화하는 동백꽃 그리고 한국 전통건축의 우아하고 힘 있는 곡선미를 콘셉트로 디자인됐다. 건물의 높이를 다양하게 하고 측면을 점점 가늘어지게 디자인함으로써 단조로운 수평선에 조형적인 구성미를 갖게 한다. 상업적인 건물이라서 그의 독특한 건축세계가 이미지 형상으로 국한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하학적인 선과 날카로운 메스 형태는 건축물의 외관과 내부에 다양하게 표현돼 있다.
[임우영 / 한미글로벌 엔지니어링팀 차장 wylim@hmglob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