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홀로 이동하는 와중에 카트 전면에 표시된 스코어 카드를 보고 동반자가 잘못 기록한 것 같다며 조용히 필자에게 귀띔했다.
세 홀 전 보기를 기록했는데 더블 보기로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캐디에게 직접 말은 못하고 필자에게 나지막이 말했지만 못내 아쉬운 어투였다.
캐디에게 클레임을 걸기엔 연장자로서 너무 스코어에 연연한다는 이미지를 동반자들에게 심어줄까 부담스런 모양이었다. 눈치를 채고 필자가 캐디에게 말해 바로 수정했다. 남 일이 아니다. 필자도 소리 없이 지속적으로 경고를 보내는 내면의 나와 갈등을 빚을 때가 있다. 캐디가 스코어를 착각해 잘못 표기할 때다.
한 타라도 적게 적으면 그냥 눈감고 넘기려고 한다. 만약 한 타라도 올려 표기하면 바로 이의를 제기해 수정한다.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현장에 심판이 없는 유일한 게임이란 점은 자신을 가장 잘 속이는 경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구한 골프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골프란 최악의 적인 자신과 함께 플레이하는 것이다.”
(핀리 피터던). 이래서 자신에게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진신고는 경기를 떠나 인간 승리로 다가온다.
당연함이 특별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지난주 프로경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데이비스 라일리(미국)가 CJ컵바이런넬슨 대회에서 거리측정기 부정사용으로 2벌타를 받고도 마지막 홀 이글로 극적으로 컷을 통과했다. 그는 4월 4일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2라운드 잔여 경기 17번홀(파3)에서 티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려 퍼트 2번으로 홀 아웃했다. 전날 7번째 홀만 끝내고 이날 이어진 2라운드 잔여 경기 8번째 홀이었다.
티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려 파를 기록했지만 자신의 거리측정기에서 경사 측정 수치가 표시되는 점을 깨닫고는 스스로 신고했다. PGA투어는 경기 진행 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한 달간 선수들이 거리측정 장비를 사용하도록 허용 중이었다.
거리만 측정하도록 할 뿐이지 경사도 측정 기능은 허용되지 않았다. 라일리는 거리측정기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 기능이 켜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자진 신고해 2벌타를 받았다.
이에 따라 파는 더블보기로 수정됐다. 그는 다행히도 마지막 홀(파5)에서 약 3.3m 이글 퍼트를 넣고 커트 라인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다.
경기 전 캐디와 함께 경사 기능이 꺼졌다고 확인했지만 측정기를 케이스에서 꺼내면서 의도치 않게 활성화된 것 같다고 그는 설명했다. “거리 측정기를 켜자 경사 수치가 나타나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2타를 그냥 날려버리는 느낌이었다.”
라일리의 이런 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 2013년 US 주니어 아마추어 결승전에서 스코티 셰플러(미국)와 경기 중 버디 퍼트를 시도하려다 어드레스 과정에서 공이 움직였다고 자진 신고했다.
그 홀에서 보기로 물러선 라일리는 셰플러에게 3대2로 졌다. 경기 승리 대신 인간 승리를 택한 것이다.
“틀림없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느꼈고 이를 명확하게 밝히고 싶었다.” 2024년 8월 미국프로골프(PGA) 플레이 오프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 3라운드에서 규칙 위반을 자진 신고한 사히스 티갈라(미국)의 고백이다.
3번홀에서 벙커 샷을 하다 클럽으로 모래 알갱이를 미세하게 건드린 것 같다고 동반자에게 알리고 경기위원에도 신고했다. 벙커 샷 룰 위반은 방송 화면을 돌려봐도 판독하기 어려웠다.
그의 자진신고 이유가 감동이다. “확실하게 룰을 위반했고 대가를 치렀지만 기분 좋다. 만약 신고하지 않았다면 잠을 못 이뤘을 것이다.”
여기서 받은 2벌타가 아니라면 투어 챔피언십 3위가 아닌 공동 2위에다 보너스도 750만달러가 아닌 1000만달러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 돈 33억원을 날리는 대신 양심을 지켰다.
2021년 노르웨이에서 TV 중계를 보던 어머니가 미국에서 경기(PGA)를 끝낸 아들 호블란에게 규칙 위반을 전화로 알려 화제가 됐다. 마크한 곳에서 원래 자리로 공을 옮기지 않고 퍼트를 한 것 같다며 경기 후 주차장으로 향하던 아들에게 전화했다. 호블란은 경기실로 돌아가 자진 신고해 2벌타를 받았다.
1925년 US오픈에선 선두였던 보비 존스가 러프에서 살짝 공을 움직였다고 스스로 신고해 상대에게 우승을 넘겨줬다. 당시 매스컴의 칭찬에 대한 그의 반응이 레전드급이다.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다. 그럼 내가 은행 강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칭찬할 것인가.” 구성(球聖)이란 말이 골프 실력에만 근거를 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숱한 명언들은 골프에서 취약한 인간 본성을 알려준다. 골프가 단체 종목이자 개인 종목이기 때문이다.
“18년 동안 탁자에 앉아서 상대하는 것보다 18홀 매치플레이를 한 번 해보는 쪽이 상대를 더 잘 알 수 있게 한다.”(그랜트랜드 라이스)
“아무리 친한 동료라도 티에서 그린까지 동반자 3명이 전혀 타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 3명이 페어웨이에 있고 혼자만 숲 속에 있을 땐 더욱 그렇다.” (밀튼 그로스)
“골프는 신사 경기다. 이 부분이야말로 경기의 기본 정신이다. 선수들이 자기 스코어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오늘 처럼 ‘경사 기능이 우연히 작동했다’는 자진신고도 그 신뢰의 일부라고 본다.”(라일리)
하지만 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좀더 편안한 골프로 나아가는 것 같다. 엄격한 룰을 정해 내기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타인 플레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한다.
예전에는 타인의 룰 위반에 무척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나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한다. 동반자와는 가능하면 우정을 쌓고 싶다.
“골프에서 테크닉은 겨우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철학, 유머, 비극, 로맨스, 멜로드라마, 우정, 동지애 등이다.”(그랜트랜드 라이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 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