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골프를 시작했을 때는 좋은 스코어를 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골프는 점수를 겨루는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스코어보다 라운드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떤 마음으로 코스를 걸었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세계 최고의 사이클 선수였던 랜스 암스트롱은 자신의 자전거 인생을 담은 책 제목을 <이건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It’s Not About the Bike)>라고 붙였다. 고환암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그는 자전거를 단순한 경기 도구가 아니라 삶을 다시 붙잡게 해준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자전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골프를 대할 때면 같은 생각을 한다.
“이건 골프 이야기가 아니다.”
골프채와 골프공이 주인공이 아니다. 골프를 하며 배우는 절제와 인내,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 동반자를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골프의 가치라고 믿는다.
요즘 골프는 장비와 데이터가 빠르게 발전했다. 비거리를 늘려주는 드라이버가 나오고, 거리 측정기와 GPS, 스윙 분석기까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골프는 장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한 번의 선택이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골프 천재로 불렸던 미셸 위도 프로 데뷔 초 규칙을 잘못 적용해 실격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큰 실패처럼 보였지만, 그 경험은 이후 더욱 성숙한 선수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음 라운드에 반영하느냐다.
골프와 바둑은 전혀 다른 경기처럼 보이지만, 승부를 대하는 철학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배운 나는 양상국 사범에게 정식으로 사사하면서 비로소 승패보다 복기의 중요성을 배웠다. 바둑은 대국이 끝난 뒤부터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골프도 다르지 않다.
라운드가 끝난 뒤 스코어만 확인하는 것으로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 어떤 홀에서 실수가 나왔는지, 퍼팅은 몇 번이었는지, 무리한 공략은 없었는지 돌아볼 때 비로소 다음 라운드가 달라진다.
많은 아마추어 골퍼들은 비거리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싱글 골퍼들은 다른 것을 본다. 그린 적중률(GIR), 스크램블 성공률, 그리고 퍼팅 수를 먼저 확인한다. 좋은 스코어는 250m 드라이버보다 2m 퍼트를 얼마나 줄였는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골프는 화려한 샷보다 실수를 줄이는 스포츠다. 그래서 코스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 무리하게 투온을 노리기보다 안전하게 레이업하는 선택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기회를 잡으려 하기보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는 용기가 더 큰 성공을 가져온다.
바둑의 위기십결 가운데 ‘기득탐승(旣得貪勝)’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유리하다고 욕심을 내면 오히려 승리를 놓친다는 뜻이다. 골프에서도 욕심이 가장 큰 적이다. 버디를 의식하는 순간 보기로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한다.
‘사소취대(捨小取大)’ 역시 골프와 닮아 있다. 러프에서 무리하게 그린을 노리기보다 안전하게 페어웨이로 빼내는 것이 결국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 작은 욕심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 큰 스코어를 얻는다.
골프는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클럽 하나를 선택하는 일부터 공격할 것인지, 안전하게 갈 것인지 까지 매 순간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골프는 스윙보다 사고방식을 먼저 보여주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골프를 치다 보면 하루에 36홀을 도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물론 체력만 된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18홀을 천천히 걸으며 동반자의 경험을 듣고, 코스를 읽고, 자연을 느끼는 시간이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골프는 많이 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즐기는 데 있기 때문이다.
라운드가 끝난 뒤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 서로의 좋은 샷을 이야기하고 실수를 웃으며 돌아보는 시간도 골프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버디 숫자가 아니라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날의 분위기다.
그래서 나는 골프를 단순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골프는 사람을 조급하게도 만들고, 겸손하게도 만든다.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새로운 용기를 준다. 한 번의 실수에 흔들리지 않는 법, 기다릴 줄 아는 법,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준다.
오랫동안 나는 골프를 하며 느낀 생각을 짧은 글과 시로 기록해 왔다. 이름하여 <소묘시초(素描詩抄)>이다. 거창한 문학이 아니라 라운드 속에서 만난 작은 깨달음을 한 편 한 편 스케치하듯 남긴 기록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기록은 골프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기록이 되어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코스에 나설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오늘도 공을 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시간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프는 결국 골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문화 진작을 통한 국격 향상과 통일 기반 조성을 실천해왔다. 핸디(O)의 골프 실력자다. 아시아 100대코스 선정위원장과 대한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골프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