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AI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좌우한 것이 미세공정과 고대역폭메모리(HBM)였다면 이제 경쟁은 칩과 칩을 연결하고 전력과 신호를 전달하는 ‘반도체 기판’으로 확산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 등 여러 고성능 칩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과정에서 첨단 패키징과 기판의 역할이 커지고 있어서다.
그 중심에 고성능 패키지기판인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가 있다. 현재 AI 서버용 고성능 패키지기판 시장에서는 일본 이비덴이 엔비디아 등 주요 AI 반도체 업체의 공급망을 선점하며 70~80% 수준의 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시장 확대는 후발 업체에도 틈을 만들고 있다. AI 반도체 업체들이 부품 조달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공급처를 넓히면서다. 삼성전기는 서버용 FC-BGA와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실리콘 커패시터 등을 함께 공급할 수 있는 종합 부품 역량을 앞세워 이비덴을 추격하고 있다. 아직 뚜렷한 강자가 없는 차세대 유리기판까지 등장하면서 기판 시장의 경쟁 구도도 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패키지기판은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 사이에서 전력과 신호를 전달하는 부품이다. 과거에는 칩을 지지하고 외부 회로와 연결하는 역할이 주로 강조됐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기판 자체가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요소로 올라섰다.
AI 가속기에는 GPU와 HBM 등 여러 고성능 반도체가 집적된다. 처리해야 할 데이터와 소비전력이 늘면서 칩 사이의 신호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고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업계 한 전문가는 “과거에는 반도체 칩을 지지하고 외부 회로와 연결하는 역할이 주였다면 이제는 GPU와 HBM 등 고성능 반도체를 고밀도로 연결하고 전력과 신호를 안정적으로 전달하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며 “기판의 배선 밀도와 신호 무결성, 전력 공급 능력이 제품 성능과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AI 서버용 FC-BGA는 PC나 스마트폰용 기판보다 크고 구조가 복잡하다. GPU와 CPU, AI 가속기의 수많은 입출력 신호를 처리하면서 높은 전력까지 안정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기판 면적이 커지면 열에 의한 휨이나 신호 왜곡 문제도 커져 제조 난도가 높아진다.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360 아이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AI 서버용 고성능 패키지기판 시장은 2025년 92억4000만 달러(약 13조7000억원)에서 2032년 184억5000만 달러(약 27조3400억원)로 약 두 배 성장할 전망이다.
현재 이 시장에서 가장 앞선 기업은 세계1위 일본 이비덴이다. 업계에서는 이비덴이 AI 서버용 고성능 패키지기판 시장에서 70~80% 수준의 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비덴의 강점은 기술력뿐 아니라 주요 고객사와 오랜 기간 쌓아온 공급 관계에 있다. AI 반도체용 기판은 범용 부품처럼 완성된 제품을 제시해 공급하는 방식과 다르다. 새로운 칩 설계 단계부터 고객사와 공동 개발하는 경우가 많고 이후 시제품 제작, 성능 평가, 장기간의 신뢰성 검증을 거쳐야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
양산 경험과 수율, 공급 안정성까지 검증돼야 하는 만큼 신규 업체가 진입하기 쉽지 않다. 이비덴이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고객사를 일찍 확보한 것이 높은 시장점유율로 이어진 배경이다.
이비덴은 선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부터 2028년까지 5000억 엔을 투입해 AI 서버와 고성능 서버용 IC 패키지기판 생산능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실적에서도 AI 수요 확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비덴은 2025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매출 4162억 엔, 영업이익 620억 엔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각각 12.7%, 30.3% 증가했다. FC-BGA 등을 담당하는 전자사업 매출은 2433억 엔으로 23.4%, 영업이익은 452억 엔으로 68.5% 늘었다.
다만 시장이 커질수록 경쟁도 거세지고 있다.
경쟁업체들이 생산능력을 늘리는 가운데 고객사들도 한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비덴 입장에서는 성장 시장을 선점한 효과와 함께 후발 업체의 추격에도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비덴을 추격하는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전기다. 삼성전기는 2022년 서버용 FC-BGA 양산에 성공한 뒤 AI 서버용 고사양 기판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관건은 고객 기반이다. AI 서버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부터 이비덴이 글로벌 CPU·GPU 업체와 공급망을 구축했다면, 삼성전기는 AI 가속기와 서버 CPU용 FC-BGA 공급을 늘리며 고객사를 확대해야 한다.
삼성전기가 내세우는 차별화 요소는 ‘종합 부품 공급 역량’이다. 삼성전기는 FC-BGA뿐 아니라 MLCC와 실리콘 커패시터를 모두 생산한다. 이들 부품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회로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삼성전기는 모바일 기판 시장에서 기판 내부에 전자 부품을 넣는 ‘임베딩’ 기술을 축적했다. 향후 서버용 기판에 MLCC 등 수동 부품을 내장하는 방식이 확대될 경우 기판과 부품을 함께 설계하고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삼성전기는 부산과 베트남 생산거점을 중심으로 고부가 기판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기술 경쟁력 못지않게 이를 실제 글로벌 AI 반도체 고객사 공급으로 연결하는 것이 향후 점유율 확대의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AI 시장 확대는 국내 기판업계에도 기회가 되고 있다. AI 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글로벌 고객사들이 공급처를 복수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늘어날수록 기판과 같은 핵심 부품의 공급 차질은 AI 가속기 생산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정 업체에 공급이 집중될 경우 생산 차질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삼성전기가 글로벌 고객사의 품질 검증을 통과해 안정적인 대체 공급처로 자리 잡는다면 이비덴 중심의 시장 구조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국내 기판업계도 AI를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꾸고 있다.
LG이노텍은 서버용 FC-BGA 시장 진출을 추진하는 동시에 북미 빅테크와 AI용 대면적 FC-BGA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대덕전자는 AI 서버와 고성능컴퓨팅(HPC)용 FC-BGA 개발과 생산 확대에 나섰고 코리아써키트 역시 AI·HPC용 고사양 패키지기판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수혜 범위는 서버용 인쇄회로기판(PCB)까지 넓어지고 있다. 이수페타시스는 AI 서버용 초다층 PCB(MLB)를 중심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PC가 중심이던 국내 기판업계의 성장축이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현재 FC-BGA 시장에서는 이비덴이 크게 앞서 있지만 차세대 기판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아직 뚜렷한 승자가 없는 ‘유리기판’ 시장이 열리고 있어서다.
현재 고성능 패키지기판은 주로 플라스틱 계열 소재를 사용한다. 하지만 AI 반도체 패키지가 커질수록 열 때문에 기판이 휘는 현상을 제어하기 어렵고 미세 회로 구현에도 한계가 생긴다.
유리는 열에 의한 변형이 상대적으로 적고 표면이 평탄해 회로를 더욱 촘촘하게 만들 수 있다.
AI 반도체가 대형화하고 하나의 패키지에 연결해야 할 칩이 늘어나면서 차세대 소재로 주목받는 배경이다.
아직 본격적인 양산 단계는 아니다.
업체별로 시제품 생산과 수율 개선, 고객 검증을 진행하는 단계여서 기존 FC-BGA 시장의 순위가 그대로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삼성전기는 일본 스미토모화학과 협력해 유리기판 핵심 소재와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세종사업장 파일럿 라인에서 시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내년 이후 양산체제 진입을 목표로 한다. SKC 자회사 앱솔릭스도 반도체 유리기판 생산 기반을 구축하고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이비덴은 당분간 기존 AI 서버용 고성능 IC 패키지 기판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유리기판 상용화까지 시간이 필요한 만큼 당장은 FC-BGA 중심의 시장 구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명확하다. 현재 시장에서는 이비덴이 구축한 고객 기반을 삼성전기 등 후발 업체가 얼마나 파고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동시에 유리기판에서는 어느 업체가 먼저 안정적인 수율과 양산 능력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새 경쟁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인프라 투자가 지속될수록 패키지기판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한국 기업들이 차세대 기술 개발과 고객 기반 확대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가 향후 시장 판도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AI 반도체 경쟁은 이제 칩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성능 칩을 어떻게 연결하고, 안정적으로 전력과 신호를 전달하느냐까지 경쟁 영역에 포함됐다. 현재 FC-BGA에서는 이비덴이 크게 앞서 있지만 공급처 다변화와 유리기판이라는 변화가 시작되면서 삼성전기를 비롯한 한국 기판업체에도 추격의 여지가 생기고 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