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민속 마을이다. 우리나라에는 6개의 전통민속마을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아산 외암마을, 순천 낙안읍성, 제주 성읍마을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성 왕곡마을은 북방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은 금강산에서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동해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북쪽의 오음산을 주산(主山)으로 해서 동쪽은 골무산(骨蕪山), 남쪽은 호근산(湖近山)과 제공산(濟孔山), 서쪽은 진방산(唇防山) 등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명당이다. 그래서 왕곡마을의 행정 명칭은 죽왕면 오봉1리다. 5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왕곡마을은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동쪽에 동해 바다, 남동쪽에 송지호가 있는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지난 수백 년간 전란과 화마의 피해가 없었던 길지 중의 길지로 평가받는다. 특히 왕곡마을은 유선형의 배 모양 즉, 행주형(行舟形)의 지형이다. 송지호에서 왕곡마을을 바라보면 유선형의 배가 동해 바다와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의 길지 형상이 보인다. 이러한 방주형의 길지는 물에 떠 있는 배의 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한때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전한다. 우물이 없었던 시기에는 샘물을 이용하였고 근대에 와서 우물을 사용하였다.
고성 왕곡마을은 양근 함씨 함부열의 낙향 은거로 시작되었다. 고려 보문각 제학을 지낸 함승경(咸承慶)은 함부림(咸傅霖)과 함부열(咸傅說), 두 아들이 있었다. 형 함부림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고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반면 동생 함부열은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유배 가는 고려의 마지막 왕공양왕을 따라 간성읍 금수리로 낙향하였다. 공양왕은 1392년 7월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간성(현재의 고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1394년 3월 삼척 궁촌리로 이배(移配)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동래현령 김가행 등이 역모를 도모한 사건을 계기로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晉)과 함께 함부열의 형인 형조전서 함부림(咸傅霖)이 사약을 들고 삼척에 내려왔다. 양근 함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때 동생 함부열이 형 함부림에게 부탁하여 공양왕의 아들과 다른 왕족들만 죽이고 공양왕은 간성으로 피신시킬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함부림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며 간성으로 피신한 공양왕에게 자객을 보내 죽였다. 함부열은 공양왕의 시신을 금수리 수타사 근처에 있는 고성산 서쪽 기슭에 매장하였다. 이후 함부열은 죽을 때 유언하기를 공양왕 무덤 아래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전에 위쪽 공양왕 무덤에 축문이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공양왕의 무덤이 알려지면 후손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함부열의 후손들이 1983년 함부열의 묘역을 정비할 때 함부열의 묘 위쪽에서 회판이 발견되었다. 이에 문중에서 이 묘가 공양왕의 무덤임을 확신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함부열의 제사에 앞서 왕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현재 공양왕릉은 세 곳에 있다. 공양왕은 태조 3년(1394년)에 강원도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리고 태종 16년(1416년)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경기도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공양왕의 무덤은 국가가 공인한 고양시의 공양왕릉과 그가 살해된 삼척 지역에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양근 함씨 문중에서 전해지는 고성의 공양왕릉이 그것이다. 세 곳 모두 공양왕과 인연이 깊은 곳으로 나름의 흔적과 근거를 갖고 있다. 형 함부림은 본관을 바꾸어 강릉 함씨의 시조가 되고, 동생 함부열은 양근 함씨를 그대로 계승하여 양근 함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함부열의 손자 함영근이 간 성읍에서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왔다. 이후 왕곡마을에는 강릉 최씨가 이주해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정주해온 전통 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은 효(孝)의 마을로도 유명하다. 왕곡마을에는 효자비(孝子碑) 6기가 2채의 효자각에 모셔져 있다. 마을 입구 언덕 위에 자리한 효자각에는 함성욱(咸成郁)을 비롯한 4대 5효자비(4대에 걸친 5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가 있다. 함성욱은 부친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일을 더 살 수 있게 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그의 두 아들 함인흥(咸仁興)과 함인홍(咸仁弘) 역시 병환에 든 아버지에게 단지(斷指)를 통해 효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함인홍의 아들 함덕우도 아버지 함인홍을 위해 단지하였고, 그의 아들 함희용 역시 부친이 병들자 단지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효자비를 내려 1862년에 4대 5효자 비각을 건립하였다. 마을 안에 있는 효자각에는 함희석(咸熙錫)의 효자비가 있다. 함희석은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한 아버지가 고갯마루 길에 누워 있었는데 마침 산불이 났다. 불이 아버지를 덮치려 하자 하늘에 우러러 울부짖자 바람이 반대로 불어 불이 꺼졌다. 이 고개를 지금도 ‘효현(孝峴)’이라고 한다. 여묘살이 중에는 호랑이가 함께 지켜주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869년 조정에서 도정(都正)의 관직을 추증하고 효자각을 건립하였다. 국가에 대한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는 이렇게 서로 통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21대를 이어서 살아온 함정균 가옥을 비롯한 왕곡마을의 전통가옥은 폐쇄적인 북방주택이다. 가옥구조는 ‘ㄱ’자 형으로 안방, 도장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 내에 수용되어 있으며,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있는 함경도·강원도·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통집 구조이다. 양통집 구조는 겨울이 춥고 긴 산간 지방에서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구성된 것으로 겹집구조라고도 한다. 방 뒤에 방이 있으며, 대청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산간지방에서의 겨울철을 가옥 내부에서 지낼 수 있게 배치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가옥에서는 높은 기단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많은 적설량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툇마루가 없으며, 출입은 부엌을 통해서 하도록 하였다. 외양간의 출입도 부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부엌 앞으로는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했다.
사랑방은 마루를 매개로 안방과 연결된다. 사랑방 측면에 별도의 출입문을 두기도 하며, 사랑방 툇마루 아래 함실을 두어 별도의 난방을 하기도 한다. 사랑방 앞문은 채광과 통풍을 위한 문이다. 왕곡마을 한옥은 개방적인 앞마당과 폐쇄적인 뒷마당이 특징이다. 마을 안길과 바로 연결되는 앞마당은 가족의 공동작업 공간 역할을 하면서 타인에게 개방적이다. 대부분 대문이 없으며 따라서 앞쪽에는 담장도 만들지 않았다. 겨울철 바람과 눈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것인데, 충분한 일사량을 확보하는 한편 많은 적설량으로 인한 외부와의 고립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다. 반면 비교적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뒷마당은 여인들의 공간으로 비개방적이다. 왕곡마을은 집 마다 굴뚝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진흙과 기와를 한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았다.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고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항아리 굴뚝은 집집이 개성과 멋을 보여주는데 이는 한국 전통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외양간은 부엌과 붙어 있다. 외양간은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고 부엌 앞으로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했다. 외양간의 지붕 모양은 가적 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 한옥에 적용하는 거의 모든 지붕 양식을 보여준다. 외양간 지붕 모양으로 각각의 집을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외양간의 소는 넓은 농지와 함께 부의 상징이다.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