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던 일의 몇 퍼센트가 이제는 버튼 하나로 대체되는 걸까.”
미국 월스트리트에 근무하는 한 금융맨의 실제 푸념이다. 최근 뉴욕 맨해튼 비즈니스맨들의 메일함에는 “조직 효율화(optimization) 업데이트”, “운영 모델 재정렬”, “우선순위 재조정” 등으로 시작되는 메일이 자주 온다. 흔한 공지 메일처럼 보이지만 읽는 사람은 안다. 이 메일이 누군가의 자리와 연결돼 있다는 걸. 더 낯선 건 속도다. 예전엔 분기 말에나 들리던 단어들이 요즘은 한 달 간격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그사이, 팀의 업무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료조사는 챗봇이 10분 만에 끝내고, 보고서 초안은 자동으로 뼈대를 세운다. 회의록은 요약돼 팀 채널로 자동화 방식으로 배송된다.
지금 미국 고용시장의 공기는 ‘대붕괴’와는 결이 다르다. 한 번에 무너지는 대신, 서서히 산소가 줄어드는 방식에 가깝다. 미 노동부 JOLTS(구인·이직·해고) 최신 통계를 보면 2025년 10월, 전문·사업 서비스(Professional and Business Services) 부문의 해고·감원율은 2.1%로 집계된다. 같은 달 제조업의 해고·감원율(1.0%)과 비교하면 체감이 왜 “사무실 쪽이 더 춥다”로 기울어지는지 이해가 된다. 물론 이 분류 안에는 컨설팅·회계 같은 전형적 화이트칼라 업종뿐 아니라 인력파견·임시고용 같완충지대도 함께 들어 있어 단순 비교는 위험하다. 그런데도 시장의 온도 차가 ‘사무실 중심 산업’에서 먼저 나타난다는 신호로는 충분하다.
더 중요한 건 해고 자체보다 채용이다. 기업은 보통 “먼저 덜 뽑고, 그다음에 줄인다”.
JOLTS에서 구인(오픈 포지션)이 빠르게 줄고, 채용이 둔화하는 흐름은 화이트칼라 직군의 불안을 키운다. 게다가 실업률이 크게 튀지 않아도 체감 경기는 나빠질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선 비자발적 시간제(경제적 이유로 파트타임을 선택한 경우) 증가가 눈에 띄는데, 이는 해고 대신 근로시간이 얇아지는 국면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호다. 사람들은 직장을 ‘잃는’ 대신 ‘덜 버는’ 상태로 밀려나고, 그러면 소비와 심리가 먼저 움츠러든다. 화이트칼라의 위기감은 여기서 시작된다. “당장 잘리진 않아도, 다음 자리가 안 보인다”라는 공포다.
화이트칼라가 느끼는 불안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내 직업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업무가 쪼개진다.” 생성형 AI의 강점은 ‘결정’보다 ‘결정 전 과정’에 있다. 정보 수집, 문서 초안, 비교표, 요약, 이메일 초안, 고객 응대의 반복 문장 같은 것들.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쓰이던 ‘중간 과정’이 자동화되면, 조직이 하는 선택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사람을 당장 자르기보다, 다음 채용을 멈추자.”
그래서 지금의 변화는 대규모 실업 쇼크보다 인력 재배치와 업무 영역의 효율화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 시대의 고용 충격은 의외로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올라온다. 신입·주니어가 맡던 일은 대체로 반복적이고 문서 중심이다. 회의록 정리, 리서치 초안, 자료 정리, 이메일 템플릿 응대, 간단한 분석 리포트. 이 영역이 자동화되면 회사는 “신입을 줄이고도 굴러간다”라고 착각하기 쉽다. 착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학습과 승계가 끊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 손익 계산표에서는 신입 채용 축소가 가장 빠른 비용 절감으로 보인다. 그래서 ‘해고율’보다 먼저 ‘채용 기회’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불안이 확산한다.
실제로 최근 대졸자들이 겪는 노동시장도 녹록지 않다는 신호가 나온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최근 졸업자(대학 졸업 후 비교적 짧은 기간의 구직자) 고용 여건이 “도전적”이라는 톤으로 실업률과 ‘학력 대비 낮은 일자리 비중(Underemployment) 지표’를 제시해왔다. 이 말은 “대졸 프리미엄이 사라졌다”가 아니라, “대졸 진입로가 예전만큼 넓지 않다”에 가깝다. 더 불안한 대목은 중간층이다. 주니어를 덜 뽑으면, 2~5년 뒤 중간 실무를 맡을 인력이 비어버린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업은 두 가지를 택한다. 외부에서 경력자를 더 비싸게 데려오거나, AI로 업무를 더 표준화해 ‘얇은 조직’을 유지하는 쪽이다. 후자가 현실화하면 화이트칼라의 승진 사다리는 더 가팔라진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4호 (2026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