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는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2011년부터 태풍이 지난 뒤의 해변을 걸었다.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은 플라스틱, 물 먹은 종이컵, 낡은 장난감과 호텔 라이터, 병뚜껑, 빗… 공장 출고의 규격을 벗어나 파도와 햇빛, 소금기의 층을 몸에 새긴 조각들이다.
“버려진 아이들을(오브제) 보면 가슴이 뭔가 저려와요. 햇빛이랑 파도랑 소금기가 만든 색과 모서리의 변화가 역사를 한눈에 말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버려진 존재들을 하나, 둘 주머니에 넣어 온다. 어느 날엔 주머니가 모자라 가방을 두 개 메고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엔 ‘버린 것’에 화가 났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관점이 뒤집혔다.
“쓰레기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버리는 건 우리의 문제죠.”
그에게 사물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다. 인간의 손길과 시간의 풍화를 통과한 뒤, 사물은 다시 등장한다. 김정아의 화면에서 그것들은 더 이상 폐기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낡은 인형과 장난감, 일회용 컵, 플라스틱 편린들을 바로크적 조명과 엄숙한 구도로 초대해 존엄을 회복시킨다. “예전엔 왕이나 귀족만 초상화의 대상이었잖아요. 그 대우를 얘네들(바다 쓰레기)에게도 해주고 싶었어요.”
김정아 작가가 최근 붙든 형식은 렌티큘러다.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움직임을 내장한 표면. 그는 이 형식에 자신이 현장에서 배운 믿음을 담았다.
“멀찍이 보면 변하지 않는 풍경 같죠. 그런데 내가 한 걸음 성큼 다가가면 달라져요.”
렌티큘러 화면은 멀리서 보일 때의 ‘오염’과 가까이 다가섰을 때의 ‘정화’ 사이를 오간다. 그 간격은 실제 현장에서의 변화와도 겹친다. 2010년대 초, 해변은 쓰레기의 구릉이었다. 이후 시민과 지자체, 학교, 기업 봉사가 합류하면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생겼다.
“밤에 가도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현장에서 변화가 눈에 보여요.”
그는 도덕적 잔소리 대신, 변화된 풍경을 눈앞에서 체감하게 하는 길을 택했다. 지저분한 현실만 들이밀며 혼내기보다, 사람들이 ‘깨끗한 걸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체감하도록 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의 거리를 무화하지는 않는다. 렌티큘러는 관람자의 몸을 요구하는 형식이다.
김정아의 이야기는 결국 경계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에서 거제로 삶을 옮긴 뒤, 그는 ‘사이’에 오래 서 있었다.
“작품에서 잠시 떠나 거제에 처음 갔을 때는, 바다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가운데 머무른 기분이었어요.”
그는 그 감각을 바다 쓰레기에서 보았다. 파도와 햇빛을 견딘 흔적, 닳은 모서리, 말라붙은 염분의 결….
“외로워서 친구를 만들어냈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노란 곰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며칠을 화실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았다는 일화는 그의 태도를 압축한다. 사람들은 ‘그걸 누가 좋아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되묻는다. 왜 우리는 반짝이는 것만 사랑하고, 닳고 바랜 것에는 쉽게 등을 돌리는가. 그래서 그의 화면은 ‘예쁜 것’의 바깥을 고집한다.
“예쁘지 않고 더럽고 마음이 덜 가는 것들을 보여주면,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어요.”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떠올린다. 금박을 벗겨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준 뒤 ‘흉물’이 된 동상. 그의 회화는 이 질문을 오늘의 색감으로 데려온다. 그래서 어떤 관객은 전시장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쓸모’의 논리에 밀려난 자신의 시간을 작품에서 마주했기 때문이다.
“겉만 보고 ‘예쁘네’라고 말하던 분도, 오래 들여다보면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죠.”
김정아는 서양화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판화를 하며 재료의 언어를 익혔다. 손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도자기를 굽고, 나무를 깎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사물로 오브제를 만든다. 그중에서도 한지 캐스팅은 그의 손에 가장 오래 남았다. 간판을 떠내고, 오브제를 감싸며, 물질의 표면을 기억의 표면으로 치환한다.
“한지는 중성이고, 욕망이 제거된 느낌을 남겨요.”
반대편에는 바로크적 초상의 기법으로 그린 유화가 있다. 낡은 장난감과 인형, 일회용 컵 같은 ‘자본주의의 순교자들’을 장엄한 조명 아래 세운다. 왕과 귀족을 그리던 형식의 권위를 ‘버려진 것들’에 돌려주는 역설. 그렇게 화면은 기능을 잃은 사물의 관계적 본질을 되살린다. 그 외에도 그는 환경시계 <9시 46분>, 납추와 납 쓰레기로 만든 <한없이 무거운>, 플라스틱으로 그려낸 <신(新) 십장생도>, 아름다운 노을의 프레임을 쓰레기가 넘나드는 <픽처레스크> 연작 등으로 스펙트럼을 넓혀 왔다. 형식은 변하지만, 질문은 한결같다.
“어떻게 하면 보게 만들까.”
김정아의 작품은 관람자를 느리게 만든다. 멀리서 혐오와 연민 사이를 흔들리던 감정은, 가까이 다가서면 색의 층과 표면의 시간에 오래 머문다. 렌티큘러는 각도를 요구하고, 한지 캐스팅은 결을 보여준다. 그의 유화는 바로크의 명암으로 시선을 붙잡는다.
한편, 제10회 메디치상 대상 수상을 기념하며 김정아 개인전이 2025년 11월 11~25일,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작가는 전시 이후 필라델피아와 한국을 오가며 새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