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동쪽으로 5시간 정도 차로 달려가면 알자스 지방에 자리한 시아스의 프랑스 2공장을 만날 수 있다. 아직 한창 공사 중인 현장에 작업복을 입은 야전 사령관은 다름 아닌 최진철 시아스 회장이다. 2023년 가동에 들어간 시아스 로예 공장이 자리를 잡아가며 성공 가능성을 직감한 최 회장은 새로운 부지를 찾아 나섰다. 2공장에는 최 회장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라면을 생산할 예정이다.
“라면이든 만두든, 더는 ‘가져다 파는 방식’으로는 못 버팁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최진철(72) 회장은 단언했다. 현지 적응에 실패한 한국 기업이나 브랜드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그는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기본적으로 수입품은 유통기한의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컨테이너에 실어 40일을 흔들다 오면, 매대에 오르기도 전에 프리미엄 이미지는 사라집니다.”
그는 ‘입점만 하면 끝’이라는 통념도 깨야한다고 강조했다. 유럽 현지 유통 채널의 경우 입점부터 매출이 발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려 속칭 브랜딩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공장을 짓고도 3년 가까이 매출 ‘0’에 버틸 자금이 필요합니다. 현지화는 설비 투자라기보다 ‘시간 투자’에 가깝습니다.”
인터뷰는 어느새 음식사(食史)로 흘러갔다. 최 회장은 1970년대 초 중국산 고춧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김치조차 붉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한국 음식은 아시아에서 가장 소박했어요. 산이 70%라 농산물이 모자랐고, 기름이나 향신료가 귀했죠. 그래서 비빔밥 같은 ‘가난의 메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열량 과잉 시대’여서 그런 음식이 건강식으로 인정받습니다. 소박함이 곧 프리미엄이 된 거죠.”
그는 ‘명품 이미지’의 배경에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모두 꼽았다.
“스마트폰·자동차가 위생과 품질 신뢰를 깔았고, K‑팝·드라마가 감성을 입혔습니다. 한국 제품이 ‘싸구려’라는 인식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야기는 어느덧 최근 유럽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는 K‑
푸드의 상징인 라면의 프리미엄화에 성공한 원인으로 이어졌다. 유럽 현지에서 110g짜리 한국 라면은 2.5유로(약 4100원)를 훌쩍 넘기는데도 판매량은 해마다 두 자릿수로 뛰고 있다. 최 회장은 “동남아 60g 저가라면 시장이 지난해 20% 빠졌지만 한국 라면은 30% 성장했다”라며 흐름을 짚었다. 다만 그는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매운맛 하나로는 한계가 온다고 봤다. 현지화한 후속작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매운맛만 해도 수십 가지인데, 현지 혀가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시장이 넓어지기 어렵습니다.”
냉동 김밥 열풍은 ‘유행의 덫’을 여실히 보여줬다. 2024년 미국 트레이더조에서 품절 사태를 일으켰지만, 6개월 뒤 판매량은 상당히 감소했다. 최 회장은 “다른 회사들이 설비 100억원씩 투입할 때 우리는 7억원 투자해 기계 두 대만 샀다”라며 웃었다.
“제품력보다 ‘지속성’을 먼저 봤죠. 단일 품목으로 연 1000억원 매출을 만들 자신이 없으면 후발주자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그는 공장은 물론 식자재의 현지화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국내산 고추는 90% 수입, 쌀은 비싸고 축산은 사료 100% 수입입니다. 한국 원료로 만든 제품은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해법은 명확하다. ‘현지 원재료 + 현지 공장’을 통해 인증은 물론 가격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탄소 다이어트 시대엔 현지 조달이 ‘나쁜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됩니다.”
유럽 규제는 예고 없이 강화된다. 몇 해 전 라면류를 덮쳐 수입에 차질을 빚었던 에틸렌옥사이드 이슈가 단적인 예다. 그래서 그는 “제품 하나 팔려면 R&D보다 ‘규제 인텔리전스’가 먼저”라고 말한다. 본사에서 원료와 공정을 바꾸는 속도가 느리면 현지 공장도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해외 공장을 세우면 정책금융 지원을 받으리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유럽 규제는 예고 없이 강화된다. 몇 해 전 라면류를 덮쳐 수입에 차질을 빚었던 에틸렌옥사이드 이슈가 단적인 예다. 그래서 그는 “제품 하나 팔려면 R&D보다 ‘규제 인텔리전스’가 먼저”라고 말한다. 본사에서 원료와 공정을 바꾸는 속도가 느리면 현지 공장도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해외 공장을 세우면 정책금융 지원을 받으리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식품은 제조업·IT 중심 제도 설계에 끼지 못합니다.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어디에도 ‘글로벌 로컬 식품 펀드’가 없어요. 우리가 로예 공장 자금 때문에 1년을 허비한 이유입니다.”
대담 말미, 최 회장은 ‘경영 플랜’을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 세대는 5개년 계획을 짰어요. 요즘은 2년짜리도 소설입니다. 1년짜리 계획을 세우고 유기적이고 유동적으로 움직여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측 불가’의 시대를 인정하되, 세 가지 원칙만은 고집했다. 현지 공장을 통해 물류·관세·탄소발자국을 동시에 해결하고, 현지 입맛에 적응하기 위해 한국적 DNA를 지키되 레시피 번역은 과감하게 가져간다. 마지막으로 정책금융 공백은 현지 투자·현지 매출로 채운다는 것이다.
“한국 이름만 달고 아시아 코너에 머무르면 결국 저가 경쟁에 말려듭니다. 현지 공장에서, 현지 입맛으로, 현지 자본으로 달려야 K‑푸드 ‘두 번째 전성기’가 옵니다.”
프랑스 로예 공장을 나오는 길, 포장 용기 위로 붉은 글씨가 스쳤다. ‘최 씨 만두’. 언젠가 유럽의 대형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이 글씨가 낯설지 않게 보일 날이 올까. 최 회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한국어 라벨이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다음 공장을 짓고 있을 겁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6호 (2025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