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이코노믹클럽 행사에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중요한 메시지를 시장에 전달했다. 그는 사회자가 ‘증시가 급락하면 연준이 시장 안정화를 위해 개입할 것이냐’고 질문하자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파월 의장은 이어 “시장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시장 자체는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연준이 증시 변동성에 일시적으로 개입하는 이른바 ‘연준 풋(Fed put)’ 기대를 시장에서 걷어냈다. 또한 이날 파월 의장은 금리인하가 아직 시기상조라는 뜻을 시장에 전파했다. 그는 “정책 기조에 대한 조정(금리 인하)을 고려하기 전에 연준은 더 명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밝혔다. 물가상승률이 꺾이거나 목표치로 확실하게 돌아갈 거란 경제지표가 나올 때까지 금리 인하 결정을 미루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메시지도 내놨다. 파월 의장은 “관세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높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같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인플레 상승과 성장 둔화를 포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로나19 확산 당시 반도체 수급 어려움으로 자동차 가격이 올랐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관세로 인한 공급망 교란이 물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전달했다. 한마디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미국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였다. 금리인하와 ‘연준 풋’ 기대감이 사라진 탓에 파월 의장 발언 직후 미국 증시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파월의 발언을 지켜본 트럼프 대통령은 분노로 가득 찬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4월 17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유럽중앙은행(ECB)이 일곱 번째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항상 너무 늦고 틀린’ 연준의 파월은 어제 또 ‘엉망진창’인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유가는 하락했고 식료품 가격도 내려갔고 달걀 가격도 내려갔으며, 미국은 관세 덕분에 부자가 되고 있다”며 “파월은 지금이라도 ECB처럼 금리를 반드시 인하해야 하고 파월의 해임은 빠를수록 좋다”고 썼다. 사실상 내년 5월까지 임기가 남은 파월을 자리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다.
실제 백악관은 파월의 해임 방안을 지난 수개월간 면밀하게 관찰한 것으로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와의 사적인 모임에서 파월 의장을 임기 전에 몰아내고 그 자리를 워시가 맡는 방안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했다고 전했다. 다만 워시 전 이사는 파월 의장을 해임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파월 의장이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 행정부 재무장관인 스콧 베센트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는 파월 의장을 해임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없다고 강조한다. 반면 파월을 해임할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어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 같은 철학을 백악관 참모들에게 수차례 전파했으며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런 내용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월가는 추측한다.
시장의 관심은 트럼프 대통령이 실제 파월을 해고할 수 있는지로 모인다. 월가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라고 설명한다. 연준법은 독립성 보장을 위해 의장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한다. 해임은 위법 행위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파월 스스로도 전혀 물러날 뜻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파월 의장은 “연준의 독립성은 당파를 떠나 민주당, 공화당 의원 사이에 널리 지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나라고 하면 물러날 것인가”를 묻는 한 기자 질문에 정색하며 “아니다”라고 답한 적도 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무리수를 두고 파월 해임을 선언하면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될까. 기존 판례를 보면 법원에서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다만 판례가 변경될 수 있는 가능성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험프리 대 미국(Humphrey’s Executor v. United States)’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35년 선고된 이 판례는 대통령이 독립적 규제기관의 위원을 자의적으로 해임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판례에 따라 연준 의장을 비롯한 독립기관 수장은 정치적 보복이나 임의적인 이유로 해임되지 않도록 보호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연방 대법원이 관련 사건을 심리하기로 하면서, 이 같은 법적 장치가 무력화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해당 판례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비판적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인 윌리엄 험프리를 해임했다. 험프리는 후버 대통령에 의해 임
명된 인사로, 루스벨트의 정책 방향과 궤를 달리했다. 해임 이후 험프리는 반발했으며, 사망한 후에는 유족이 소송을 이어받았다. 미국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만장일치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해임 조치가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FTC가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설립된 독립적 행정기관이며, 해당 법률(FTC Act)에 따라 위원은 ‘정당한 사유(for cause)’ 없이 해임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례는 이후 90여 년간 미국 내 독립기관 수장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주는 핵심 근거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미국 대법원이 이 판례의 유지 여부를 다룰 사건을 곧 심리할 예정이다. 최근 일부 보수 성향의 법조계 인사들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해당 판례가 대통령의 행정 집행 권한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보장 관행을 무시하고 해임한 노동관계위원회(NLRB), 공무원성과체계보호위(MSPB) 등 여타 독립기관의 고위 당국자들과 관련한 사건을 심리 중이다. 미 연방 대법관 구성은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2017∼2021년) 당시 임명한 3명을 포함, 현재 6대 3으로 보수가 우위에 있다.
백악관과 연준의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 판례가 뒤집힐 경우, 미국 행정부가 금리 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기존 판례가 폐기되면 연준의 독립성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홍장원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