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시계 브랜드는 ‘위블로(Hublot)’다. 1980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44살. 유럽의 로열패밀리들에게 사랑받으며 ‘왕들의 시계’라 불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이 그리스 국왕에게 공식적으로 건네는 선물로 위블로를 선택했고,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브가 노벨상 시상식에서 살짝 손목을 내보이며 화제를 낳았다. 이 외에도 엘튼 존, 조르조 아르마니, 앤디 워홀 등 유명인이 착용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프랑스어로 ‘배의 현창(둥근 창)’이란 뜻의 이 시계는 이름부터 요트 운항 시 착용해야 하는 시계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100년 이상의 헤리티지를 내세운 브랜드가 즐비한 명품시계 시장에서 짧은 시간에 위상을 확고히 한 건 승마, 요트, 폴로 등 ‘하이엔드 스포츠워치’란 콘셉트를 내세운 덕분이다. 이 의도된 마케팅의 첫걸음으로 위블로는 모나코 요트클럽과 스페인의 유명 요트경기에 공식 타임키퍼로 참여했다. 이후 요트 세일링과 관련된 모델이 연이어 출시됐고, 모나코 요트클럽을 위해 제작한 첫 번째 제품이 모나코 국왕에게 헌사되며 특별함을 더했다. 유럽과 북미 지역의 하이엔드 스포츠로 알려진 폴로 후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후원 스포츠와 관련한 스페셜 에디션이 출시되는 건 당연한 일. 위블로는 하이엔드 스포츠의 명성을 브랜드와 접목하며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더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축구 사랑은 UEFA컵과 월드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시기부터 위블로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점차 넓어지기 시작한다. 위블로는 최근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타임 키퍼로 활동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타임키퍼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위블로의 스포츠 사랑은 창립자가 갖고 있던 브랜드 아이덴티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카를로 크로코(Carlo Crocco)에 의해 탄생한 위블로는 시계 제조 역사상 처음으로 고무 소재와 골드를 결합해 주목받았다. 이탤리언 스포츠 정신에서 영감을 얻은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유행과 상관없이 우아하고 미니멀한 스포츠 워치’가 캐치프레이즈였다. 크로코는 이러한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 독창적인 시도를 쉬지 않았다. 브랜드명이기도 한 배의 현창을 모티브로 둥근 베젤에 나사가 6개씩 박혀 있는 독특한 디자인을 비롯해 내구성이 일반 고무의 10배에 가까운 러버 스트랩을 차용하며 이름을 알렸다. 2005년 완성한 ‘빅뱅(Big Bang)’ 시리즈에선 당시 위블로의 파워풀한 이미지와 독창적인 기술력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골드와 세라믹, 탄탈과 러버 등 독특한 소재를 결합한 빅뱅의 콘셉트가 바로 ‘퓨전(Fusion)’이었다. 이후 위블로는 ‘최초’ ‘차별화’ ‘독창성’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춘 클래식 퓨전, 스피릿 오브 빅뱅, 스퀘어 뱅, 마스터피스 등의 컬렉션을 완성한다.
2008년 위블로는 루이비통과 크리스챤디올 등 명품패션과 주류 브랜드를 거느린 LVMH그룹과 동행하게 된다. 2004년 당시 스와치그룹의 블랑팡에서 위블로에 영입된 장 클로드 비버 회장의 브랜드 성장 전략을 눈여겨 보던 LVMH가 인수에 나섰다. 이후 비버 회장은 LVMH 시계 부문 회장이 됐다. 당시 비버 회장이 택한 전략은 앞서 나열한 스포츠와 스타 마케팅이었다. 위블로는 하이엔드 스포츠 외에 유럽 축구리그의 타임키퍼로 나서면서 2030세대 공략에 성공했고 스타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마케팅 외에 기술 개발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그때만 해도 위블로는 자체 제작한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2008년부터 무브먼트 제작에 돌입했고, 2009년 무브먼트 제조사인 BNB를 인수하며 기술 개발에 탄력을 받게 된다. 위블로는 2010년부터 스위스 니옹에 자리한 매뉴팩처에서 100%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장착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짧은 시간에 명성과 소재 개발, 기술력까지 어느 분야도 허투루 하지 않고 탄탄한 브랜드”라며 “단지 수집가들 입장에선 여러 파트너십과 스폰서 이후 출시되는 수많은 리미티드 에디션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내 명품 시장에선 위블로 등 LVMH그룹이 거느린 브랜드의 직진출이 화두가 되기도 했다. 국내 시장의 빠른 성장성에 주목해 유통사를 끼지 않고 직접 영업·유통에 나서는 것.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명품시장의 규모(면세, 중고거래 제외)는 21조9909억원으로 전년(19조6767억원) 대비 11.7% 증가했다. 세계 7위 규모다. 이러한 시장 상황에 LVMH는 올 들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현대백화점 판교점 등 주요 매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LVMH의 또 다른 시계브랜드 태그호이어도 일부 매장(압구정동 갤러리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롯데백화점 본점 에비뉴엘, 현대백화점 판교점)을 중심으로 직접 영업을 진행하고 있다.
LVMH는 지난해 6월 코오롱FnC와 맺은 스페인 명품 브랜드 ‘로에베’의 한국 사업 계약을 종료하고 로에베코리아유한회사를 설립했다. ‘셀린느’도 지난해 말 신세계인터내셔날과 계약 종료 후 올해부터 직접 운영 중이다. 명품 플랫폼의 한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의 국내 직진출은 유한회사 설립과 임차료,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이 있지만 유통사를 거치지 않아 마진율을 높일 수 있다”며 “경기 둔화 등 글로벌 명품시장이 주춤한 상황에 상대적으로 실적이 괜찮은 국내 시장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위블로의 주력 제품은 LVMH 위크에서 공개된 열번째 마스터피스 ‘MP-10 투르비옹 웨이트 에너지 시스템 티타늄(이하 MP-10·4억3560만원)’이다. 라카르도 과달루페 현 위블로 CEO는 “위블로 MP 컬렉션에 걸맞은 시계라면 기존 컴플리케이션을 재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별한 무언가를 창조하고 발명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며 “이제부터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시계의 존재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MP-10은 5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592개의 부품, 2개의 선형 추, 35° 경사를 이루는 1개의 투르비옹, 1개의 원형 파워리저브로 완성됐다. 단 50피스만 생산되는 이 시계에는 시계 바늘 대신 끊임없이 회전하는 4개의 디스플레이가 자리잡고 있다. 위쪽 1/3에 해당하는 부분에 시간과 분 표시가, 가운데 1/3에는 그린존과 레드존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원형 파워리저브, 아래쪽 1/3에는 투르비옹 케이지에 초가 표시된다. 위블로는 이 시계의 무브먼트와 다이얼을 하나로 결합했다. 그러니까 무브먼트가 곧 시계의 얼굴인 셈이다.
[안재형 기자 · 사진 위블로]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