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머니(Old Money)룩’이 인기다. 올여름 런웨이를 휩쓸더니 F/W시즌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선망의 대상인 명품부터 디자이너 브랜드, 스트리트 패션까지 이른바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 혹은 ‘스텔스 럭셔리’라 불리는 올드머니룩을 주목하고 있다. 패션 전문가들은 올 3월 전 세계에 공개된 미국 드라마 <석세션>의 네 번째 시즌이 불을 지폈다고 말한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HBO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재벌가 상속에 대한 스토리로 인기를 얻고 있다. 드라마 전개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 가문의 경영권 다툼을 연상시키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연히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상위 1%. 그들이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게 SNS 목록의 타깃이 됐다. 특히 그들의 패션이 MZ세대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대대로 자산을 상속받아 늘 부자였던 상류층의 스타일, 올드머니들의 패션은 신기술로 급성장한 신흥부자(뉴머니·New Money)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뉴머니룩이 화려한 로고로 부를 과시했다면 올드머니룩은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 없지만 깔끔하고 기품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법정에 출두한 할리우드 배우 귀네스 팰트로의 패션 스타일도 전형적인 올드머니룩으로 회자됐다. 귀네스 팰트로는 지난 2016년 미국 유타주의 디어밸리리조트 초급 슬로프에서 발생한 스키 충돌 사고로 소송을 당했다. 사고를 당한 이는 스키 뺑소니를 주장했고, 팰트로 측은 터무니없다며 맞소송을 냈다. 세계적인 배우의 법정 출두에 대중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정작 관심은 로고가 보이지 않는 간결한 디자인의 코트와 가방에 집중됐다.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구프’의 옷을 입고 법정에 등장했다. 당시 착용한 크림색의 스웨터가 595달러(약 77만원), 올리브색 롱코트는 1200달러(약 156만원)로 알려졌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이 사건 이후 스텔스 럭셔리 트렌드를 조명한다. <타임>은 “로고나 브랜드를 알 수 없지만 누군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며 ‘알 수 없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올드머니룩은 스텔스 럭셔리와 궤를 같이한다.
옷 안감이나 가방 안쪽을 살피지 않으면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가 없지만 실크나 캐시미어, 양가죽처럼 고가의 소재를 사용해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클래식하고 미니멀한 아이템으로 돋보이는 스타일을 연출하는 방식이다. SNS를 통해 확산된 이러한 트렌드는 국내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네이버 데이터랩 검색어 트렌드를 살펴보면 올 5월 초부터 ‘올드머니룩’의 검색량이 껑충 뛰기 시작해 7월 초에는 5월 대비 100배 이상 늘었다.
그렇다면 올드머니룩이 전 세계 패션·뷰티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선 팬데믹 이후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이들과 신흥부자(뉴머니)들의 양극화를 원인으로 꼽는다. 국내 패션계의 한 관계자는 “팬데믹 시대에 부자는 더 부자가 됐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더 힘들어졌다”며 “소득불평등이 심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부자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좌절감에 빠진 젊은 세대에게 찐부자들의 스타일이 선망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그레이스 켈리, 다이애나 비, 케이트 미들턴 등으로 대변되는 전 세계 왕족이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품 브랜드의 한 매니저는 “올드머니룩은 브랜드를 드러내며 자신을 과시하는 대신 조용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성향이 두드러진다”며 “멀리서 보면 흔한 바지와 스웨터일 수 있지만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고급 소재의 기품과 디테일한 디자인이 전혀 다르다”고 전했다. 윤리적인 방법으로 채취한 ‘로로피아나’의 캐시미어 스웨터,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된 ‘샤넬’의 트위드재킷, 화려하지 않은 ‘에르메스’의 가죽 액세서리를 찾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러한 트렌드가 바탕이 됐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수입하는 ‘브루넬로 쿠치넬리’도 그중 하나. 최상급 캐시미어를 사용하는 이 브랜드는 올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나 늘었다. 올드머니룩의 국내 인기는 패션 플랫폼의 매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의 지난 8월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8.5배나 늘었다. 에이블리 측은 “스텔스 럭셔리 트렌드가 자리잡으며 관련 상품 판매가 급증한 게 원동력”이라며 “심플한 로고 또는 기본에 충실한 클래식한 디자인 상품이 인기를 끌면서 거래액 성장을 견인했다”고 밝혔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에이블리에서 구매할 수 있는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 중 가디건 품목의 거래액은 8월 한 달간 전년 동기 대비 21배나 성장했다. 특히 카디건의 인기가 높은 ‘비비안웨스트우드’는 거래액이 14.5배나 늘었다. ‘꼼데가르송’도 100% 울 소재의 블랙 와펜 카디건이 인기몰이에 나서며 거래액이 4.6배 증가했다. 디자이너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선보이는 이른바 ‘디자이너 브랜드’도 올드머니룩의 선택지로 인기가 높아졌다. 롯데온(ON)의 한 관계자는 “올 초부터 닉앤니콜, 틸아이다이, 엽페, 시야쥬 등 디자이너 브랜드가 본격 입점하기 시작했다”며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매출은 매월 전월 대비 평균 40% 이상 늘고 있다”고 전했다.
올가을·겨울 시즌 여성복 스타일에도 올드머니룩이 묻어난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올 F/W 시즌에는 개인의 취향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트렌드가 공존하는 가운데 미니멀리즘이 전체적인 무드로 나타날 것”이라며 “시크하면서 전문적인 느낌을 주는 테일러링룩과 간결해진 프레피룩 등이 강세를 보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 그레이 같은 클래식한 컬러를 활용하는 착장이 눈에 띌 것”이라고 전했다.
구호, 르베이지, 빈폴, 메종키츠네, 아미, 꼼데가르송 등을 전개하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일상을 되찾은 소비자들이 한동안 보복 소비의 모습을 보이다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본인의 소비에 대해 고찰하게 됐고 ‘의식 있고 신중한’ 소비 패턴으로 변화했다”며 “이제는 과잉 소유의 시대가 끝나고, 더 적게 소유하는 대신 더 가치 있는 아이템을 오랫동안 사용하거나 지속 가능한 제품을 구입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떠오른 올드머니룩도 미니멀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다”며 “로고가 없는 심플한 디자인, 절제된 컬러, 좋은 소재를 적용한 웰메이드 아이템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유행보다 오랜 시간 일상에서 빛을 발할 은은한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는 ‘르메르’는 흐르는 듯한 실루엣, 풍성한 드레이핑, 오묘한 컬러, 좋은 소재로 완성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클래식 더플코트, 미니멀한 디자인과 롱&린(Long&Lean) 실루엣, 유니크한 색감이 돋보이는 로브 코트 등이 F/W시즌 대표 상품이다. 미니멀리즘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브랜드 중 하나인 ‘띠어리’도 이번 시즌에 캐시미어, 울, 크레이프 등 부드럽고 은은한 광택의 고급 소재, 미니멀한 디테일, 모노톤의 색조에 집중했다. 울, 캐시미어 혼방 소재의 라운드 쇼트 재킷, 울 소재를 적용한 크롭 더블버튼 재킷, H라인 미니 스커트가 결합된 블랙 드레스 등을 선보였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전개하는 ‘델라라나’는 올드머니룩의 정석과도 같은 프리미엄 캐시미어 컬렉션을 출시했다. 특히 ‘더블 브레스티드 캐시미어 롱코트’는 이탈리아 콜롬보사의 퓨어 캐시미어 100% 소재를 사용했다. 표면의 은은한 지블링 가공(모직 표면에 물결 문양 요철감이 생기도록 가공하는 것)이 고급스럽고 무게가 가벼워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다.
한섬이 운영하는 여성복 브랜드 ‘시스템(SYSTEM)’은 올드머니 스타일의 핵심 키워드를 ‘리터닝 레거시(돌아온 유산)’로 요약한다. 가죽점퍼에 니트를 믹스해 클래식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내는 ‘텍스처 블록 레더 집업점퍼’가 주목받고 있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