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 안 타봤어? 무게 중심을 낮추면 안 넘어진다니까.”
무릎을 굽히고 한껏 허리를 낮춘 남자가 뒤따르던 여자에게 큰 소리로 훈수다. 자세를 낮춰야 넘어지지 않는데, 스키 타는 자세가 그 자세이니 이렇게 하라는 둥, 그렇게 발을 디디면 넘어지기 십상이니 다른 발을 내밀라는 둥 조근조근 설명하던 목소리가 거슬릴 만큼 높아졌다.
“스키는 무슨 스키. 먼저 가라고!”
내 그럴 줄 알았다. 꽁꽁 언 눈길에 갑자기 웬 스키 얘기는…. 여자가 내뱉은 한마디에 남자는 말 그대로 얼음이 됐다. 가장 바람직한 사과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라 했던가. 남자가 뜬금없이 쓰윽 손을 내민다.
“미안해 여보. 내 목소리가 컸네. 내 손잡고 기대. 내가 데려다 줄게.”
엇. 이번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여자가 조용히 한마디 한다.
“여보. 창피하니까 그냥 가자. 좀 떨어져서 와….”
전라북도 진안군의 자리한 마이산에 함박눈이 내렸다. 올겨울 내릴 눈이 모두 내린 것처럼 탐방로 일대가 온통 눈밭이다. 사람이 잦은 길은 이미 빙판이 됐고 뜸한 길은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녹록지 않은 분위기에도 방문객의 발걸음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겨울 절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삼삼오오 오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진안고원 중심에 자리한 마이산은 암마이봉(해발 687.4m)과 숫마이봉(681.1m)의 산세가 빼어난 명소다.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는 용출산(湧出山), 조선시대 초까지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리다 현재는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 불리고 있다. 사계절 내내 풍경이 수려한데, 봄에는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의 벚꽃길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두 봉우리가 연출하는 설경이 회자되는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설경이 한 수 위 아닐까.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금당사, 탑영제, 명려각, 문화재 매표소, 탑사, 은수사로 이어지는 탐방로는 겨울이 가기 전 꼭 한번 들러야 할 산책코스다.
사실 마이산 등산은 남부주차장에서 시작해 탑영제, 탑사, 은수사, 천왕문을 거쳐 암마이봉과 북부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주요 코스다. 난도가 높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데, 약 6.8㎞ 구간을 4시간가량 걷게 된다. 그러니까 이 코스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오래 걸을 수 있는 지구력이 관건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 은수사까지 오른 뒤 되돌아 나간다. 겨울엔 길이 미끄러워 입산 통제도 진행되는데, 올 겨울에도 암마이봉 천왕문, 봉두봉 방면 2개의 출입구가 내년 3월 중순까지 통제된다. 자의반 타의반 은수사가 탐방로의 종점이 되는 셈이다.
눈 쌓인 겨울 산책의 필수품은 아이젠이다. 신발에 끼워 미끄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휴대용 아이젠 하나면 스키 자세 운운할 필요 없이 거뜬히 산에 오를 수 있다.
남쪽에서 바라본 마이산은 곳곳에 움푹 패인 구멍들이 셀 수 없이 많다. 타포니(Tafoni·물리적·화학적 풍화 작용으로 암석의 표면에 형성된 움푹 파인 풍화혈(風化穴))라 하는데, 마이산은 세계 최대 규모의 타포니 지형으로 2019년 국가지질공원이 됐다. 이채로운 건 그 안에 가지런히 쌓여진 돌탑인데, 누군가의 소원이 담긴 돌탑이 눈에 들어오면 금당사 지나 탑사와 은수사가 멀지 않았다는 의미다.
마이산은 특이한 봉우리만큼이나 돌탑이 유명한데, 수많은 돌탑을 품은 탑사로 들어서면 절로 숙연해진다. 직접 돌을 쌓아 탑을 올린 이는 조선 후기에 은수사에 머물던 20대 청년 이갑룡이다. 효령대군의 16대손인 그가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30여 년간 쌓은 돌탑은 120여 기.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탑을 쌓았다는데, 오방탑, 중앙탑, 일광탑, 월광탑 등 이름도 다르고 모습도 제각각인 80여기의 돌탑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섰다.
탑사를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면 은수사에 닿는다. 고즈넉한 풍경이 탑사와 사뭇 다른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기도를 올린 장소로 알려졌다. 기도 중에 마신 샘물이 은같이 맑아 이름도 은수사(銀水寺)가 됐다. 실제로 이 사찰의 태극전에는 이성계가 꿈에서 금척을 받는 몽금척도(夢金尺圖)와 금척의 복제품이 있다. 또 그가 백일기도 후 심었다는 수령 650여 년의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도 여전하다.
지금은 입산통제 시기이지만 은수사에서 암·수마이봉 사이 천황문까지는 약 2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다. 이곳은 물이 갈라지는 분수령이다. 암마이봉의 북쪽으로 난 물길은 금강, 숫마이봉 남쪽으로 난 물은 섬진강의 원류다.
▶ 마이산 역고드름
겨울철 저녁 7시 무렵에 정한수 한 그릇을 떠놓으면 다음날 물 표면 위로 솟은 역고드름을 발견할 수 있다. 산 전체가 돌덩어리이고 사방이 돌로 이뤄져 밤에 기온이 뚝 떨어지는데, 이와 함께 경내를 휘감아 도는 계곡의 바람이 그릇의 물을 위로 밀어 올려 생성된다고 알려졌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