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는 그간 터무니없는 저평가를 받아왔다.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 자본시장 유동성 경직, 산업 경쟁력 저하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특히 지배구조 문제가 증시 상승의 발목을 잡았다. 대주주 이익 보호 중심의 구조는 자본 수혈을 막았고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을 어렵게 했다. 주요국 대비 PBR(주가순자산비율)은 낮은 수준이었고 1배를 밑돌았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전후로 한국 증시의 밸류업 기대감이 유입되면서 증시가 상승했다. 거기다 상법 개정안이 재차 국회에서 발의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명문화 등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할 여러 방안들이 포함돼 있는 만큼 한국 증시의 투명성이 제고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증권가에선 코스피지수가 올 하반기 3000선에 안착해 상승랠리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본다. 저평가 해소를 선반영 중이라고 하면서도 반도체, 바이오, 방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군의 성장과 주가 상승을 기대한다는 희망찬 전망을 내놓는다.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먼저 복수상장 비율이 주요국 대비 높다. 대주주가 성장성이 높은 사업 부문을 분할해 상장시키고 자금을 조달하려는 동기가 컸기 때문이다. 복수상장으로 생긴 더블 카운팅 문제는 기업 가치 평가의 왜곡, 시장 신뢰 저하, 자본 배분의 비효율을 초래했다. 특히 IT(정보기술), 경기소비재 기업들의 더블 카운팅 이익 규모가 가장 컸다. IPO(기업공개)나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된 자금은 경영권 프리미엄이 높은 대주주에게 추가 자금 운용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또한 승계를 위한 일감 몰아주기 등 다양한 대주주 지분 강화 편법이 존재해 지배구조 불투명성과 비효율성으로 주주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많았다.
상법 개정안은 이 같은 지배구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6월 5일 윤석열 정부에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및 국회 재표결 부결로 폐기됐던 상법 개정안이 다시 발의됐다. 개정안은 지난해 11월 이정문 정책위 수석부의장이 발의한 안과 유사하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 전자주주총회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3%룰 도입 등이 담겼다. 전자 주주총회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통령이 공포한 날부터 시행된다고 돼 있다. 앞서 발의된 안들과 다른 점도 있다. 제 542조의 7 집중투표제에 관한 특례는 이번 본회의에 상정될 안에서 제외됐다.
이번 상법 개정안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 542조의 12의 3%룰로 꼽힌다. 기존엔 최대주주가 특수관계인에게 지분을 각각 3%씩 분산해 총합 의결권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에선 특수관계인 지분까지 합산해 3%를 초과하는 부분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된다. 이에 따라 3%룰은 경영진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하는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경민 대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상법개정안 강도가 낮아졌지만 새로운 개정안이 재상정되는 과정에서 한국 주식시장의 지배구조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확산된 만큼 중장기적으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규모 확대도 대주주의 영향력을 약화하고 경영감시 기능을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1명 선출 체제에선 감사위원회 내 대주주 측 후보가 여전히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개정안대로 2명으로 확대되면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이 더욱 높아지고 대주주의 의사결정에 대한 견제 기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대주주의 의결권이 지나치게 제한되면 기업의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를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상법 개정안은 단순히 주주권 강화 차원을 넘어 ESG 경영, 내부 통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단체소송제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논의와 맞물려 향후 지배구조 리스크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투자자,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여지를 확대하면서 플랫폼 및 대기업 중심 규제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입법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상법 개정이 실제로 시행될 경우 자본시장 내 투자자 행동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날 전망”이라며 “자사주 매입·소각,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등 주주 권한을 실질적으로 확대하는 제도들이 병행되면 기업의 주주친화적 행동 유인이 강화될 수 있다”고 했다.
한편에선 상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재계에선 일제히 우려 목소리가 나왔는데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는 논평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된 것은 우리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며 “재조업이 주력인 우리 기업의 경우 중장기적 설비투자를 위한 정상적인 의사결정까지 소송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한국경제인협회도 “행동주의 펀드들의 과도한 배당 요구, 경영 개입, 단기적 이익 추구 행위 등이 빈번해져 기업이 경영에 전념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코스피 기준 한국의 PBR은 여전히 0.9배로 미국, 영국, 호주, 인도 등 주요국 중 유일하게 1배 미만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밸류업 정책이 시행된 이후에도 상장사 주가는 여전히 저평가 상태에 머물러 있다. 자사주 매입·소각이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은행, 증권 등 금융주가 상승하며 디스카운트가 다소 해소되는 모습이 보였지만 12·3 비상계엄 이후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다.
ROE(자기자본이익률) 또한 높은 편이 아니다. 신한투자증권 등에 따르면 한국의 ROE는 10.1%로 미국(20.4%), 영국(15%), 독일(11.4%), 인도(14.9%), 브라질(16.8%), 중국(11.8%), 멕시코(17.3%) 등이 더 높았다. 주주환원율이 낮고 산업 이익 성장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당장의 이익 성장을 달성하기 어렵다면 자산 효율화의 목적으로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주주환원을 확대해야 하는데 실제로 현재까지 이 같은 사례가 나타난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상법 개정안이 도입된 후 지배구조 투명성과 주주가치가 제고되면 국내 증시의 이익지표와 더불어 지수가 상승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자사주 소각 기대감이 높은 종목들과 자산 재평가를 통해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필요한 곳들도 주목을 받고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PBR이 0.5배 미만이고 자사주 지분율이 10% 이상인 종목들로 ▲POSCO홀딩스 ▲SK ▲롯데지주 ▲금호석유화학 ▲KCC ▲한화생명 ▲현대해상 ▲CJ대한통운 ▲코리안리 ▲HDC ▲태광산업 ▲미래에셋생명 ▲하림지주 등을 꼽았다. 아울러 감액배당과 배당 확대가 예상되는 곳들에도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KOSPI 200 고배당지수는 연초 이후 지속적인 상승 흐름을 보였다.
국내 증권사들은 올 하반기 코스피지수가 한층 더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대부분의 증권사가 3000선을 거뜬히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각 증권사가 제시한 코스피지수 최대치는 ▲IBK투자증권 3100 ▲NH투자증권 3100 ▲LS증권 3200 ▲대신증권 3150 ▲유진투자증권 3050 ▲하나증권 3100 ▲한국투자증권 3150 ▲한화투자증권 3000 ▲현대차증권 3000 등이다. 지난해 말 한국 증시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으로 제시했던 외국계 증권사인 골드만삭스도 ‘비중확대’ 의견을 내놨다. 당초 한국 경제가 달러 강세와 관세 불확실성으로 어려워질 것으로 봤으나 국내 정치 및 정책 효과가 글로벌 경기 둔화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코스피지수도 하반기 최대 3100선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봤다. JP모건도 12개월 내 코스피지수가 3200선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아울러 정책 수혜 업종도 주목하라고 권했다. LS증권은 지주, 증권, 유
틸리티, 반도체, 내수유통 업종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봤다. 중복상장, 물적분할 등 지주사 디스카운트 요인이 해소될거란 기대감이 유입되고 자사주 비율, 배당성향이 높고 저평가된 지주사 주식들로 수혜가 집중될 것이라 예상한다. 아울러 AI(인공지능) 반도체 투자를 통한 국내 소규모 기업들의 활성화가 예상되고 미국 관세 협상에 따른 일부 품목 면제 및 유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봤다. 유틸리티 업종의 경우 전기요금의 점진적인 인상과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가 예상된다고 전망한다.
최광혁 LS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증시 거래대금 증가에 따라 증권업종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자사주 소각 등 금융업종 내 밸류업 정책기조 확산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노후 전력망 교체 및 신규 전력망 구축을 위해 신규 발전용량을 늘려야 하는 상황으로 근본적인 전기요금 인상에 따라 국내 전력망 투자도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금융투자업계는 국내 증시 저평가가 해소되는 국면에서 미국발 관세전쟁 리스크가 어느 정도 완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홍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