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런웨이를 떠들썩하게 했던 ‘올드머니(Old Money)룩’의 최대 수혜자는 어떤 브랜드일까. 국내외 패션업계에선 주저 없이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Loro Piana)를 꼽는다. 로고도 없고 트렌디하지도 않은 이 브랜드는 화려한 컬러나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최상위 상류층이 즐기는 브랜드의 조건으로 떠오르며 상위 1%를 위한 명품 ‘콰이어트 럭셔리’ ‘스텔스 럭셔리’란 수식어를 얻게 됐다. 한 백화점 명품관 관계자는 “로로피아나 고객은 불황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며 “과시형 소비보다 내적 만족을 추구하고 충성도가 굉장히 높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경향은 실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로로피아나코리아가 공시한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지난해 매출이 1266억원으로 1193억원이었던 전년 대비 6.1%나 늘었다. 영업이익도 67억원에서 77억원으로 15% 증가했다. 한 수입업체 대표는 “국내에서도 올드머니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유수의 패션브랜드가 동참하고 있지만 이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명품의 기세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가격이 높은 이유를 소비자가 이해하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가 로로피아나”라고 전했다
로로피아나는 페루 안데스 산맥에 서식하는 낙타과 동물인 비쿠냐 울과 중국 북부, 몽골 등지에서 자라는 카프라 히르커스 염소의 최상급 캐시미어만을 사용한다. 양을 기르는 방식부터 패브릭을 제조하는 과정까지 외부 아웃소싱 없이 본사에서 직접 관리한다. 비쿠냐 폴로셔츠가 744만원, 캐시미어 스웨터 코트가 2508만원인 이유다.
1924년 피에트로 로로피아나가 창업한 로로피아나는 1800년대부터 모직물 판매업에 종사한 가업이 뿌리가 됐다. 제조와 생산방식에 기술 혁신이 중요하다고 확신한 피에트로 로로피아나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회사를 원했고, 이탈리아 북부 코르소 롤란디 지역에 ‘로로피아나 앤 컴퍼니(Ing. Loro Piana & C)’를 설립한다. 사실 초기에는 패션 브랜드라기보다 원단 제작사로 이름을 알렸다. 1941년에 그의 조카인 프랑코 로로피아나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하이패션 모직 원단과 직물 분야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당시 로로피아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엄선된 고급 섬유와 캐시미어를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 판매했다. 최상급 소재에 대한 평판은 전 세계 일류 재단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때부터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로로피아나의 특별한 파트너로 자리하게 된다. 최근엔 국내 업체인 코오롱이 로로피아나 원단을 사용한 프리미엄 라인을 판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오롱이 로로피아나 라인으로 선보인 안타티카 롱패딩 가격은 130만원. 안타티카 라인 중 가장 비싼 제품군이다.
1970년대에 로로피아나의 수장은 가문의 6대손인 세르지오와 피에르 루이지 형제가 물려받았다. 이들 형제는 신소재 개발과 함께 완제품 제작 등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로로피아나는 이때부터 브랜드의 이름을 앞세운 패션 상품을 제작했다. 1990년대 말에는 의류는 물론 신발, 스카프, 액세서리 등을 선보이며 종합 패션 브랜드로 거듭났다. 1992년에 한국에 진출한 로로피아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회장과 임원들이 즐겨 입는 정장의 소재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성행하던 맞춤 양복점을 공략했던 것.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전까지만 해도 한 해 100억원의 원단을 국내 남성복 브랜드와 맞춤양복점에 공급했다. 당시 로로피아나 원단을 사용한 양복 정장은 한 벌에 300만원을 호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는 로로피아나의 단골 고객으로 유명한 베르나르 아르노 LVMH그룹 회장이 직접 인수에 나선다. 당시 LVMH는 로로피아나 지분 80%를 20억유로에 사들였다. 37억유로에 불가리를 인수한 이후 2년 만에 이뤄진 대형거래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업계 호사가들은 아르노 회장의 여름 전통에 주목한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그의 아들인 앙투안 아르노가 이탈리아의 호화 휴양지 포르토피노의 로로피아나 매장에서 폴로셔츠와 스웨터 등을 쇼핑하는 게 여름 일상이라는 것. 결국 단골 손님이 브랜드를 통째로 산 셈이다. 인수과정에서 로로피아나가 LVMH에 요구한 건 오직 하나, “스타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말 것”이라고 전해졌다. 로로피아나는 LVMH의 일원이 된 이후에도 트렌드와 로고로는 표현할 수 없는 뉴 클래식 감성을 고수하고 있다.
로로피아나 제품은 일단 비싸다. 여성용 터틀넥은 100만원대부터, 겨울코트는 기본이 1000만원대다. 비싼 이유는 소재에 있다. 그리고 소재가 만들어낸 품질이 가격을 뒷받침한다.
로로피아나는 캐시미어, 베이비 캐시미어, 비쿠냐, 최고급 울 등 최상의 원재료를 사용한다. 합성섬유가 아닌 천연재료를 전 세계에서 공급받고 있는데, 비쿠냐는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캐시미어와 베이비 캐시미어는 중국과 몽골에서 구매하고 있다. 고급 메리노 울은 호주와 뉴질랜드, 로터스 플라워Ⓡ(The Lotus FlowerⓇ)는 미얀마에서 공급받는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섬유로 알려진 비쿠냐를 공급받기 위해 1994년 페루 정부 및 안데스 지역사회와 계약을 체결해 살아있는 비쿠냐에서 채취한 섬유만을 구매, 가공, 수출할 수 있는 독점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이후 2008년 갱신된 협약을 통해 페루 최초의 민간 자연보호구역인 ‘프랑코 로로피아나 박사 보호 구역(Reserva Dr. Franco Loro Piana)’이 조성됐다. 이 지역의 비쿠냐는 2000ha에 달하는 보호 구역에서 야생 상태로 살고있다. 로로피아나는 비쿠냐 서식지를 위협하는 사막화 진행을 막기 위해 물을 보관하는 저수지와 둑을 만들어 비쿠냐 보호 운동도 진행하고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선 현지 주민들과 협업해 야생의 살아있는 비쿠냐에서 얻은 섬유만을 공급받고 있다.
로로피아나는 최근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F/W24 여성&남성 컬렉션을 공개했다. 이번 컬렉션은 세르지오와 피에르 루이지 로로피아나 형제의 옷장에서 발견한 아카이브 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캐시미어의 마감 공정에 사용하는 브랜드의 상징이자 1951년부터 로로피아나 가문의 문장에 등장하는 ‘엉겅퀴 꽃’을 모티브로 컬렉션이 채워졌다. 캐시미어, 베이비 캐시미어, 비쿠냐 등 로로피아나를 대표하는 섬유와 함께 뉴질랜드산 페코라 네라Ⓡ와 이탈리아 시빌리니 산맥이 원산지인 소프라 비소(Sopra Visso) 울을 재발견해 새롭게 선보했다.
여성 컬렉션은 페코라 네라Ⓡ 스파냐 재킷, 트렌치코트, 아노락, 블루종 등 야외활동을 즐기는 남성적 감성에 리퀴드 실크 재킷과 실크 코트, 새틴 스커트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여성적 실루엣을 구현했다. 남성 컬렉션은 우수한 소재와 더불어 부드러운 촉감으로 완성했다. 언스트럭처드 블레이저와 넉넉한 오버셔츠가 격식을 갖춘 캐주얼 스타일로 완성됐다. 코트에선 유서 깊은 가문에 이어져 온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묻어난다. 소프라 비소 소재의 로드스터, 아이서, 스파냐와 같은 재킷이 돋보인다.
[안재형 기자 · 사진 로로피아나 코리아]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7호 (2024년 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