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피아트 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FCA)와 프랑스의 PSA그룹이 합병하며 탄생한 ‘스텔란티스’. 이 거대 자동차그룹의 베스트셀링 브랜드는 ‘지프(Jeep)’다. 그중에서도 ‘랭글러(Wrangler)’는 정통 오프로더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지금도 손꼽히는 베스트셀러다. 사실 랭글러는 늘 독보적인 존재였다. 랜드로버의 ‘디펜더’나 메르세데스-벤츠의 ‘G-클래스’가 럭셔리를 내세우며 비교대상이 되길 거부했지만 오프로더(도로가 아닌 험지용 자동차)를 논할 땐 랭글러를 피할 수 없었다.
랭글러의 시작은 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프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였던 1940년 6월, 미군은 정찰용 차량을 개발하기 위한 공개입찰을 실시하고 ‘사륜구동’ ‘사각형 차체’ ‘접이식 전면창(윈드실드)’ ‘600파운드 이상의 적재용량’ 등 입찰 기준을 공개한다. 당시 윌리스-오버랜드(Willys-Overland), 밴텀(Bantam), 포드(Ford) 등 3개 기업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고, 그 결과 윌리스-오버랜드가 미국 국방성과 정식 계약을 맺게 된다. 그해 11월 ‘Quad’란 시제품이 공개된 후 이를 바탕으로 1941년에 완성된 군용 차량 ‘윌리스 MB(Willys MB)’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기까지 총 65만대 이상 생산됐다. 현재 모든 지프 차량의 원조 모델인 셈이다. 전쟁을 겪으며 튼튼한 차체와 사륜구동의 성능을 인정받은 지프는 1945년 윌리스 MB를 민간용으로 제작한 ‘윌리스 CJ(Civilian Jeep)’를 공개한다.
윌리스 MB를 타고 전장을 누빈 젊은이들에게 윌리스 CJ는 자연스럽게 동화됐고, 그때부터 오프로더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럼 ‘지프’란 명칭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전설처럼 전해지는 말로는 전쟁 당시 군인들이 윌리스 MB를 ‘GP(General Purpose·다목적)’라 부르며 지프란 명칭이 브랜드화됐다고 한다. 확인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가장 유력한 설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며 진화한 CJ는 1976년 ‘CJ-7’을 출시하며 20년간 유지해온 디자인에 변화를 시도했다. 자동변속기를 탑재하며 휠베이스가 살짝 길어졌고, 플라스틱 지붕과 스틸 도어를 선택할 수 있게 설계됐다. 1981년에 소개된 ‘CJ-8 스크램블러’의 휠베이스는 좀 더 길어진다. 하드톱과 소프트톱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당시 생산량이 3만대에 불과해 현재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80년대 자동차 시장은 콤팩트한 사륜구동(4WD)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에도 실용적인 CJ 시리즈가 여전히 인기를 누렸지만 세단의 편안한 승차감을 중시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에 발맞춰 CJ 시리즈는 단종을 맞는다. 그리고 1987년에 ‘지프 랭글러 YJ’가 공개된다. 랭글러는 CJ-7의 오픈바디를 공유한 걸 빼면 전혀 다른 새 모델이었다. 지프 모델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각형 헤드라이트가 적용된 모델이다. 이후 1997년에 선보인 ‘지프 랭글러 TJ’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에어백을 적용하며 안전성을 높였다.
2003년 등장한 ‘랭글러 루비콘(Rubicon)’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랭글러로 이름이 높다. 이때부터 버튼식 잠금장치, 4:1 로우-레인지 트랜스퍼 케이스, 32인치 타이어 등 이전 모델에는 없었던 편의사양이 대거 장착된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판매 중인 ‘지프 랭글러 JL’은 다양한 파워트레인, 오픈-에어링 옵션, 첨단 기술과 안전 기능으로 무장하고 있다. 원형 헤드램프와 사각형의 테일램프, 세븐-슬롯 그릴 등 랭글러의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는 지프의 상징으로 자리하며 국내에도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 출시된 최근작 ‘더 뉴 랭글러 4xe’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심장을 단 랭글러 라인업의 최강자다. 최근 국내 공식 출시된 이 차량은 올 1월 선보인 ‘더 뉴 랭글러’의 PHEV 버전으로 2020년 글로벌 공개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부분변경 모델이다. 지난해 미국에서만 6만7000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링 PHEV’로 선정되기도 했다. 외관에는 전동화 모델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지프 로고와 테일게이트의 ‘4xe’ 배지 등 곳곳에 친환경을 상징하는 파란색 디자인 요소를 가미했다.
파워트레인은 2.0ℓ 가솔린 터보 엔진과 2개의 전기모터, 350V 리튬 이온 배터리로 구성된다. 일반 주행 조건에 적합한 8단 자동변속기, 저단 기어와 맞물려 도심에선 안정적인 주행감을, 험로에선 파워풀한 성능을 내뿜는다. 완충 시 순수 전기로만 34㎞의 주행이 가능하다. PHEV다운 연비도 장점이다. 복합연비가 12㎞/ℓ에 이른다.
윌리스 MB의 유산을 이어받은 랭글러는 고유한 디자인과 오프로드 성능이 각인되며 ‘모든 SUV의 시작’이란 수식어를 얻게 된다. ‘Go Anywhere, Do Anything’이란 브랜드 슬로건도 한몫 단단히 했다. 지프는 매해 미국 유타주 모압에서 오프로드를 즐기는 마니아를 위한 축제를 개최한다. ‘이스터 지프 사파리(Easter Jeep Safari, 이하 EJS)’는 유산을 지키며 진화하는 지프의 소통법이다. 전 세계 지프 팬을 위해 준비한 이 대화의 장에선 극한의 장애물과 코스를 직접 경험하며 차량의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올 3월 23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 58번째 EJS에선 친환경적인 지프와 콘셉트카가 공개되며 온·오프로드 모빌리티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빈스 갈란테 지프 외관디자인 부문 부사장은 “2024 EJS를 통해 얻은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전기차 개발 과정에서 항상 효율성과 친환경성을 고려한다는 것”이라며 “전기모터의 안정적인 토크 성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프야말로 (전동화의 이점을 활용해) 성능을 극대화한 차량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동화 시대 지프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국내 고객을 위한 축제도 20여 년째 계속되고 있다. 2004년 동북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지프 캠프’는 지프가 추구하는 오프로드 차량의 장인정신과 가치, 독보적인 4×4 성능, 고유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오프로드 축제다. 지프 오너들이 한자리에 모여 드라이빙을 즐기는 가장 큰 축제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지프 랭글러는 독보적인 디자인과 대체 불가한 성능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1986년 1세대 모델 출시 이후 37년 만에 글로벌 누적판매량 500만 대(2023년 9월 기준)를 달성하며 지프의 대표 차종으로 위상을 입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선 지프의 판매량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의 집계를 살펴보면 지프는 지난해 총 4512대가 판매되며 전년 대비 37% 감소했다. 올 1월부터 4월까지 누적판매량도 955대로 전년 동기(1324대) 대비 -27.9%를 기록했다. 수입차 딜러사의 한 임원은 “비단 지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고유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을 추종하는 새로운 마니아층의 유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6호 (2024년 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