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침체가 장기화되며 국내시장에서 명품브랜드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팬데믹에도 수년간 고성장해온 명품이 불황에 빠졌다” “… 그럼에도 최고 매출을 경신했다” 등 서로 상반된 내용이 보도되며 의견이 나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팩트는 맞고 시각은 다르다. 우선 국내시장에서 ‘에·루·샤·디’라 불리는 해외 명품 4대장의 2023년 매출액은 총 5조197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들 브랜드의 매출액이 5조원을 돌파한 건 5조89억원을 기록한 2022년 이후 두 번째다. 고로 최고 매출 경신은 ‘맞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들 4개 브랜드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총 1조1065억원. 전년 대비 19%나 감소했다. 한 수입사 관계자는 “소비심리 위축에도 제품 값을 인상하며 실적 방어에 나섰지만 오히려 수익성은 낮아졌다”며 “재료비나 광고, 마케팅 비용 상승이 원인으로 꼽히지만 결국 금리 등 경제 상황에 발목이 잡히며 Z세대 등 새로운 소비자 유입이 더뎌졌다”고 지적했다.
각 브랜드의 실적을 살펴보면 우선 샤넬이 1조7038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루이비통(1조6511억원)을 앞질렀다. 지난해 두 차례에 걸친 제품 가격 인상이 전년 대비 7%의 매출 상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업계에선 훅 꺾인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
샤넬은 2022년에 네차례나 주요 제품 가격을 올리며 전년 대비 30%의 매출 성장을 올린 바 있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1조6511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전년 대비 줄어든 성적(2022년 1조6922억원)을 냈다. 4대장 중 유일한 역신장이다. 영업이익도 4177억원에서 2867억원으로 줄었다. 크리스챤디올꾸뛰르는 전년 대비 12.4% 늘어난 1조456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매출 1조원 달성에 성공했다. 이로써 루이비통, 샤넬에 이어 세 번째로 매출 1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3.6% 줄어든 3120억원에 그쳤다. 4대장 중 눈에 띄는 실적은 에르메스가 유일하다. 지난해 매출 7972억원, 영업이익 2357억원으로 각각 전년 대비 23%, 12% 늘었다. 2022년의 매출 증가율(60.1%)보다는 확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광고나 마케팅 비용이 가파르게 상승한 세 브랜드에 비해 에르메스는 이렇다 할 빅 모델 기용이 없어 부담이 덜했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엔데믹의 보복소비는 끝난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해외 유명 명품브랜드와 달리 중하위권 브랜드의 국내시장 성적표는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감소했다. ‘양극화가 뚜렷해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경향은 주얼리와 시계 부문에서 좀 더 두드러졌다. 티파니의 경우 지난해 매출액 3509억원, 영업이익 21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각각 2.3%, 1.7% 감소한 수치다. 불가리도 매출액 3399억원, 영업이익 477억원을 올리며 전년 대비 각각 2.8%, 8.4% 줄었다. 수천, 수억원을 호가하는 브레게, 블랑팡부터 몇만원에 구입할 수 있는 스와치까지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스와치그룹의 매출은 전년보다 17.5%(3079억원)나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73.4% 줄어든 139억원에 그쳤다.
오픈런의 원조 격인 브랜드 롤렉스도 성장세가 주춤했다. 지난해 매출은 2944억원. 전년 대비 1.6% 감소한 수치다. 영업이익은 46억원으로 85.9%나 급감했다. 반면 신세계인터내셔날과 계약을 종료한 뒤 국내에 직진출한 셀린느는 전년 대비 6배 이상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3072억원. 501억원이던 2022년과 비교하면 무려 513.2%나 훌쩍 커진 셈이다.
매출과 영업이익 등의 주춤한 성장세에도 명품브랜드의 가격 인상 전략은 올해도 여전하다.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간 에르메스의 경우 새해 첫날부터 신발 가격을 최대 44%, 인기 가방은 약 10~15%나 인상했다. 샤넬도 1월부터 주얼리와 시계, 2월에는 뷰티, 3월에는 가방 등의 가격을 차례로 인상했다. 루이비통은 지난 2월 일부 가방의 가격을 5%가량 올렸다. 보석 브랜드 티파니는 지난 1월에 약 5%, 불가리는 3월부터 일부 주얼리 가격을 평균 7%나 올렸다. 그런가 하면 LVMH그룹 소속의 펜디는 지난해 매출 1522억원, 영업손실 89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0.4%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적자 전환했다. 펜디는 실적 발표가 이어진 지난 4월, 전 제품의 가격을 5~6% 인상했다. 지난 1월 6% 수준의 인상 이후 3개월 만에 다시 가격을 올렸다.
‘N차 인상’이라 불릴 만큼 매년, 매달 가격인상이 지속되고 있지만 본사 배당금과 국내 기부금은 반비례하거나 제자리 걸음이란 사실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해외 명품 4대장의 경우 샤넬은 본사인 룩셈부르크 법인 ‘Chanel S.a.r.l’에 전년(2950억원) 대비 0.8% 늘어난 2975억원을 배당했다. 지난해 영업이익보다 높은 금액이다. 루이비통은 전년 대비 68.7% 증가한 3800억원을 프랑스 본사에 배당했다. 에르메스도 6.8% 늘어난 1250억원을, 디올은 1.6% 줄어든 2425억원을 배당했다. 반면 국내 기부금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샤넬은 전년 대비 28.1% 늘렸다지만 매출 대비 0.08%인 13억원에 그쳤다. 에르메스는 1.4% 줄어든 5억5300만원. 디올은 1920만원에 불과했다. 루이비통은 감사보고서를 제출하기 시작한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차례도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
글로벌 명품 시장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높은 이자율, 불안정한 경제 성장, 지정학적 갈등 등의 상황이 이어지며 고가 시계에 열광하던 중국인들의 수요를 감소시켰다. 자연스레(?) 스위스산 명품시계의 수출량이 뚝 떨어졌다. 스위스시계산업연맹이 공개한 지난 3월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6% 감소한 20억스위스프랑(약 22억달러). 팬데믹으로 시장 전체가 영향을 받았던 2020년 3월 이후 4년 만에 최저치다.
블룸버그통신은 “스위스 시계의 주 수출국인 중국 출하량이 전년 동기 대비 42% 급감했고, 홍콩 출하량도 44%나 줄었다”고 보도했다. 중국시장의 소비 위축 경향은 비단 시계업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루이비통, 디올 등 내로라하는 명품브랜드를 보유한 LVMH그룹의 올 1분기 매출은 전망치인 211억유로를 밑돈 206억9400만유로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2% 감소한 수치다. 무엇보다 지난해 상반기에 기록한 두 자릿수 성장률에 비해 초라한 성적이다.
장 자크 귀오니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메인 브랜드인 루이비통과 디올의 매출 증가율이 2% 언저리에서 정체됐다”며 “지난해와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 고객의 변화”라고 언급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