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웬일이야. 오늘 맑다더니만 눈발 날리는 것 좀 봐. 올라가도 되는 거야?”
“그러게. 우선 가보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서가던 중년 부부가 멈칫한다. 그도 그럴 게 휴대폰 날씨 안내에 ‘맑음’이란 두 글자가 무색하게도 하이얀 눈이 펄펄 나렸다. 그런데 눈치 없는 눈송이가 너른 백사장을 하얗게 수놓은 풍경이 이채롭다.
“저기 좀 봐. 파도가 모래에 닿는 게 아니라 눈 위에 쌓이고 있네.”
남편의 말마따나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보다 풍광이 꽤 깊다. 나지막한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 깊이가 더 짙어졌다.
“겨울이랑 정들었는지 날이 따뜻해지는 게 아쉬웠는데 이런 풍경을 보게 되네. 겨울이 알았나.”
“그러게. 이 산은 좀 천천히 오르자고. 그래야 아쉬운 마음이 좀 덜하지.”
아내의 감성에 남편이 맞장구다. 그리곤 뒤돌아 한마디 한다.
“아, 먼저 가세요. 저희는 좀 천천히 가려고요.”
아이고, 어쩌나. 발걸음 무뎌진 건 매한가지인걸.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란 말을 속으로 삭이며 지나쳤다. 그래도 천천히, 산책….
강원도 동남쪽 끝에 자리한 삼척은 산과 바다, 동굴, 계곡 등 아직은 덜 알려진 명소가 많은 보물 같은 곳이다. 어쩌면 맹방해수욕장과 덕산해수욕장이 맞닿은 덕봉산(德峰山)도 그중 하나다. 백사장이 4㎞에 이르는 맹방해수욕장이 BTS 해변으로 알려지며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면, 그 끝자락의 덕봉산은 최근에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셀피 핫스폿으로 소개되며 하나둘 찾는 이가 늘고 있다.
푸릇푸릇한 대나무 사이로 봄바람 부는 풍광을 카메라에 담고자 산에 올랐지만 갑자기 흐려진 하늘에 펑펑 눈이 날린다. 아직은 겨울이란 뜻일까 아니면 봄이 오기 전 마지막 관문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으며 오르다보니 벌써 정상. 20~30분 남짓 됐나 싶은데, 눈앞에 동해바다가 탁 트였다. 동네 뒷동산처럼 볼록 솟은 덕봉산의 해발고도는 고작 54m. 하지만 바다와 맞닿은 기암괴석과 절벽을 바라보노라면 왜 이곳을 산이라 부르는지 알 것만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산도(德山島)’라 표기된 덕봉산은 원래 섬이었다.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도 섬으로 묘사됐는데, 지금은 덕산해변인 육계사주(육지로부터 돌출해 성장해 가까운 섬과 연결된 사주)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가 됐다. 이후 자연스레 이름도 덕산도에서 덕봉산으로 바뀌었다. 산이 얹힌 모양새가 물더덩(물독의 사투리)과 비슷해 ‘더멍산’이라 불렸다는데, 이 발음을 한자화해 덕봉산이 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덕산해수욕장에서 나무데크와 계단으로 마감된 해안생태탐방로 입구까지의 백사장엔 멋들어진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마치 이곳은 원래 섬이어서 이 나무다리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다는 증표 인양, 좁다란 다리가 해안가 한쪽을 채우고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열이면 열 꼭 한번 밟고 지난다는데, 관리를 잘했는지 뜀걸음에도 탄탄했다.
덕봉산 해안생태탐방로를 산책하는 길은 대나무숲이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가는 내륙코스(317m)와 기암괴석을 감상할 수 있는 해안코스(626m)로 나뉜다. 2021년 군의 경계 철책이 철거되며 53년 만에 비경이 공개됐다. 두 코스 모두 거리가 길지 않아 해안코스 둘레길을 먼저 걷고 난 후 정상으로 오르는 게 무난하다. 해안둘레길을 걷다 보면 두 곳의 전망대(덕산, 맹방)에 이르는데, 이곳에선 눈감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살짝 흥분되고 떨린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때문이다. 맹방전망대를 지나면 꽤 출렁이는 물이 바다로 이어지는데, 바로 마읍천이다. 이곳에 놓인 나무다리는 아쉽지만 끊겨 있다. 원래 이 다리를 건너면 맹방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정상으로 이어진 나무계단은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덕분에 카메라 앵글을 어디에 놓아도 충분히 이국적이다. 특히 정상에서 너른 해변을 배경 삼아 계단에 포커스를 맞추면 ‘인생샷’이 부럽지 않다. 정상의 벙커 위에 서서 한 바퀴 돌며 주변을 바라보면 동해바다와 백두대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얕은 동산이지만 주변은 거리낄 것 없이 탁 트였다.
산책을 마친 후 차로 5분 정도 이동하면 읍내가 나온다. 이곳엔 곰치국 맛집이 여러 곳이다. 통통하고 거무스레한 모습이 마치 곰 같다고 해서 이름 붙은 곰치는 겨울 생선이다. 묵은지로 낸 개운한 국물에 부드러운 속살이 그득한 곰치국은 도시에선 맛볼 수 없는 별미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