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집으로 온다는 겨?”
호숫가 데크길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자니 옆자리 노부부의 대화가 살갑다. 남편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내의 짜증 섞인 답이 툭 튀어나온다.
“벌써 몇 번째유. 댓바람부터 묻더니 열 번은 더 묻나보네. 내일이 토요일이잖우. 집으로 바로 온대요. 선물을 보따리로 이고 온다던데.”
“보오따리는 무슨. 1년에 몇 번 찾지도 않음서 제때 좀 오든지~이….”
푸념 섞인 한마디에 다시 짜증이다.
“지들도 애 키우는데 알아서 허것지. 요즘 명절이라고 집에 오는 게 뭐 대순가. 비싼 선물이나 많이 갖고 오면 좋겠구먼.”
다시 침묵…. 하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호수에 바람 자국이 들자 아쉬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녀. 그래도 그런 게 아니지∼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어찌 그냥 곧이 듣냐고~오. 아들놈 하나 있는 게 아주 지 식구만 안다니까.”
“어이그. OO아부지. 그게 그렇게 서운해? … 그려, 나도 좀… 그렇더라. 노는 날 많다고 해외 나가는 건 뭐라 안 하는데, 엄니 아부지 생각은 좀 덜 하는 거 같아서….”
“그렇지? 당신도 그랬지? 이번에 오면 아주 단단히 일러둬야겠쏘~오. 아무리 바빠도 조상님 찾는 건 소홀히 하지 말라고~오.”
“OO아부지. 말로만 그러지 말고 아주 세게 호통을 좀 쳐봐유. 손자 놈들 보믄 그냥 웃느라고 정신없음서.”
“아니 무어~어 그래도 그런 게 아니지~이. 집에 고기는 있나? 애들 소고기 좋아하는데…. 시장이나 다녀옵시다.”
“하여튼 말만 그냥.”
차가워진 가을바람이 뺨에 닿는다. 오후 볕에 멍 때리던 피부가 한껏 긴장했다. 벌써 가을이 지나는 걸까. 데크길에 흩어진 낙엽이 아쉽다….
가을엔 제천이 제격이다.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가을 내내 꽉 막힌 도로 덕에 이동이 쉽진 않지만, 일단 도착하면 수려한 풍광에 입이 떠억 벌어진다. 물의 고장이라 불리는 제천은 이름 높은 호수가 여러 개다. 우선 케이블카까지 놓인 청풍호가 중심을 잡고 있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삼한 시대의 농경수리시설 의림지가 이곳에 있다. 그것만? 옥순봉, 비봉산, 구담봉 등 높진 않지만 오르는 재미가 쏠쏠한 청풍호 주변 봉우리가 산행을 이끈다. 여기에 이 고장이 자랑하는 약채락(약이 되는 채소의 즐거움) 음식까지 맛보면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다.
산책 코스로 이름 높은 제천 10경 중 첫 번째 풍경인 의림지는 사실 관광지보다 유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 알려졌다. 지금도 방죽 아래 청천동의 농사는 의림지 물에 의존하고 있다. 주변엔 영호정, 경호루 등의 정자와 연자암, 용바위, 홍류동, 홍류정지 등 휴식처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의림지 위쪽에 자리한 비룡담 저수지가 이번 산책코스의 목적지다. 의림지에서 차로 3분여, 걸어가면 15분쯤 걸리는 비룡담은 제2의 의림지라 불린다. 지난 2017년 비룡담 저수지 둘레를 휘도는 데크길을 놓고 용두산산림욕장까지 이어지는 ‘의림지 한방 치유숲길’이 조성됐는데, 2017년부터 2020년까지 1차 사업으로 물안개길(2.4㎞), 솔향기길(6.5㎞)을, 2021년부터 올 5월까지 2차 사업으로 온새미로길(2㎞), 솔나무길(0.5㎞)을 각각 마무리하며 총 길이 약 11㎞의 전체 공정을 완성했다.
용의 머리를 닮은 용두산(龍頭山·871m)에서 흘러내려 저수지가 된 비룡담은 용이 승천하는 기세가 깃든 곳이라 불린다. 의림지에서 풍경을 즐긴 후 솔밭공원을 지나 지그재그로 놓인 데크길로 오르면 비룡담 쉼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또 하나의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길로 가도 결국 이어지는데, 왼쪽 데크길로 내려서면 조망 쉼터와 저수지를 감상할 수 있는 물안개길이 펼쳐진다. 경사도 8% 미만의 이 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유모차나 휠체어가 오가기에도 무리가 없다.
동화 속 성채를 구현한 포토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물안개길이 끝나는 지점의 주차장 맞은편엔 한방생태숲이 있다. 너른 잔디밭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나온 이들이 여럿이었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솔향기길이 나타난다. 말 그대로 소나무가 펼쳐진 길을 따라 걷기 때문에 솔향기가 가득하다. 큰 오르막이 없는 산길과 야자매트길이 이어진다. 용두산 자락에 자연 그대로 생긴 길을 정비한 온새미로길은 한방 생태숲에서 송한재를 잇는 구간이다. 옛길의 정취와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다시 솔밭공원으로 이어지는 솔나무길은 소나무 자연림과 돌수로가 잘 어우러졌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 바퀴 돌고 나면 서너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데, 구간마다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걷고 나면 출출해지기 마련이다. 의림지 주변에 꽤 많은 맛집들이 있는데, 그중 호반식당의 곤드레정식(1만3000원)과 청국장(1만원)이 인기다. 가족 단위부터 단체까지 꽤 다양한 이들이 찾는데, 평일에도 점심시간엔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다. 혼밥하려는 이들은 점심시간 이후에나 차례가 온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입구에 아예 ‘홀로 찾는 손님은 점심시간 이후에 모시겠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나마 곤드레정식이 2인 이상이다. 맛은 어떠냐고? 직접 확인하시길.
1경 삼한시대 유물 ‘의림지’
2경 박달이와 금봉이 전설이 깃든 ‘박달재’
3경 청풍명월의 영원한 연인 ‘월악산’
4경 호수 위의 작은 민속촌 ‘청풍문화재단지’
5경 청풍호반 비단 물결로 수놓은 ‘금수산’
6경 아직 때 묻지 않은 원시림 ‘용하구곡’
7경 심산유곡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송계계곡’
8경 옥빛의 대나무순 ‘옥순봉’
9경 제천의 피서지 ‘탁사정’
10경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배론성지’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