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이 인기다. 이미 이름난 곳은 평일 오후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MZ세대가 찾은 전통시장 맛집이 그득하고, 유통업계는 벌써부터 이들을 겨냥한 로코노미 마케팅이 한창이다. 과연 전통시장의 무엇이 이들을 이끄는 걸까.
서울 목동에 사는 직장인 임희영 씨(26)는 금요일이면 퇴근 후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 전통시장 순례에 나선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골목시장이 주 타깃인데, 올 여름휴가 때는 경기도와 강원도로 범위를 넓혔다. 임 씨는 “TV 프로그램이 가이드 역할을 해줄 때도 있는데, 주로 SNS를 통해 목적지를 검색한다”며 “온라인상에 많이 검색된 시장을 찾아 그곳만의 먹을거리나 즐길 거리를 경험하는 게 하나의 루틴(일상)이 됐다”고 전했다. 임 씨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시장 관련 콘텐츠를 검색해보면 #시장맛집, #시장놀이, #시장구경 등 다양한 이들이 기록한 시장 체험을 확인할 수 있다. 임 씨는 “팬데믹 이전엔 눈길도 주지 않았던 골목 감성이 서로 차단되고 가로막히자 보이기 시작했다”며 “동네 주변, 사소한 것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나름의 일상이 매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여행업계에선 MZ세대들의 이러한 성향을 ‘로컬 문화와 여행 트렌드의 결합’으로 분석한다. 단순히 관광명소에 들러 둘러만 보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지역의 특징적 요소를 먹고 만들고 즐기며 체험한다는 의미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23~2025 관광 트렌드를 살펴보면 이러한 성향이 좀 더 명확해진다. 이 보고서가 밝힌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은 ‘자연경관 여행지 방문’(17.3%)이 아니라 ‘현지 투어를 통한 현지 문화 접하기’(27.5%)였다. 올 1월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2023 관광트렌드 전망 설문조사 및 데이터 종합분석’에서도 ‘로컬관광’은 ‘아웃도어·레저여행’ ‘농촌여행’ ‘친환경여행’ ‘체류형여행’ ‘취미여행’과 함께 6가지 유망 여행 테마로 꼽혔다. 한국관광공사는 “개인의 즐거움과 경험의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소비’ 관련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여행 일정보다 여행지에서 먹고 자고 취미를 즐기는 ‘새로운 일상’의 경험을 선호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로컬관광을 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이들에 대해 “현지 먹거리와 지역 고유 콘텐츠에 관심이 높고 X세대의 62.1%, Z세대의 62.9%, 영밀레니얼세대의 59.8%가 관심이 높다”고 밝혔다.
로컬관광에서 꼭 들르는 곳이 바로 각 지역의 전통시장이다. MZ세대들의 전통시장 방문 횟수도 크게 늘었다. BC카드 신금융연구소가 2019년(1~4월)부터 2023년(1~4월)까지 총 5년 동안 서울(경동, 광장, 동묘, 망원, 신당), 인천(신포국제), 강원(강릉중앙, 속초중앙), 대구(서문, 칠성), 부산(국제, 기장, 부평깡통), 충남(예산), 제주(동문) 등 전국 주요 전통시장 15곳에서 발생한 매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통시장 방문객은 5년 전 대비 42%, 연평균 9%씩 늘었다. BC카드 신금융연구소 관계자는 “마트 및 음식점 이용 고객 중 일부가 전통시장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MZ고객 방문 급증이 전통시장 매출 상승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됐다”고 밝혔다.
2019년(1~4월) 대비 2023년(1~4월) 충남 예산시장을 방문한 MZ세대 증가율은 934%로 가장 높은 증가세를 기록했다. 서울(신당·117%↑), 강원(강릉중앙·70%↑), 제주(동문·25%↑), 서울(망원·18%↑) 등지의 방문 횟수도 늘었다. 그런가 하면 외국인 관광객 매출도 급증했다. 올 1~4월 전통시장에서 발생한 외국인 관광객 매출은 입국 규제가 강화됐던 지난 2021년(1~4월) 대비 753%나 껑충 뛰어올랐다.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1~4월)과 비교해도 65%나 늘어 이전 매출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MZ세대들이 전통시장을 찾는 횟수가 늘자 MZ세대 상인들도 전통시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전에 없는 먹을거리나 레스토랑이 전통시장에 등장한 것도 최근의 경향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실제로 평일에 찾은 서울 ‘광장시장’은 낮 시간인데도 가족 단위부터 외국인 관광객,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세대까지 찾는 이들이 다양했다.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과 OTT 다큐멘터리에 자주 소개되는 광장시장은 이미 이름 높은 관광명소다. 그런데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동태찌개가 유명한 노포 옆에 알록달록한간판과 세련된 분위기로 무장한 튀김집이 들어섰고, 젓갈집 옆에는 깔끔하게 단장한 오백원빵집이 문을 열었다. 모두 청년 상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시장 중심에 자리한 ‘365일장’에서 만난 김미희 씨(21)는 “대구에서 서울에 놀러왔다가 일부러 광장시장에 들렀다”며 “옛 시장 분위기에 세련된 매장이 곳곳에 섞여 있다 보니 보는 재미,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전했다. 321플랫폼이 선보인 365일장은 새로운 시장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공간이다. 총 4층 규모로 1층에는 전통주를 기반으로 한 로컬 그로서리 스토어가, 2층에는 365일장 PB제품과 히든아워 메뉴를 개발하는 키친, 3층에는 사무실, 4층에는 전통시장에선 볼 수 없었던 힙한 와인바로 구성됐다. 365일장의 주력 상품은 와인과 전통주다. 전국의 전통주 외에 ‘광장시장 1905’ PB맥주도 판매한다. MZ세대들에게 유명세를 탄 인기 카페들도 분점을 냈다. 서울 성수동의 ‘어니언’, 제주시의 ‘아베베베이커리’, 충남 예산의 ‘사과당’ 등이 주인공이다. 특색 있는 외관과 이름난 빵맛으로 평일에도 운이 좋아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경동시장’은 국내 최대 한약재 전문시장인 서울약령시와 맞닿아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방문이 많은 곳이다. 경동시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제기역에서 내렸더니 평일인데도 시장으로 나서는 2번 출구가 안에서부터 붐볐다. 밖으로 나서니 그야말로 사람들로 꽉 찼다. 인도 한쪽에 끝없이 펼쳐진 노점상을 구경하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실내 체육관을 방불케 하는 규모에 입이 떠억 벌어진다. 분위기도 깔끔하게 달라졌다. 특히 이곳은 시장의 특색에 따라 MZ세대부터 노년층까지 각 세대가 한곳에서 어울린다. 본관에 자리한 ‘스타벅스 경동1960점’에 들어서면 이러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각 층별로 할머니, 할아버지, 중년세대, 청년세대가 골고루 자리잡고 앉았다. 스타벅스코리아가 1960년대 개관했던 경동극장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이곳은 ‘전통’과 ‘트렌드’가 어우러지며 ‘힙’한 공간으로 떠올랐다. 딸과 함께 왔다는 임옥녀 씨(65)는 “오래되고 낡은 분위기의 기억만 갖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라며 “전혀 시장 같지 않은 이색적인 곳이라서 오히려 오고 싶은 곳”이라고 말했다. 스타벅스에서 지척인 경동시장의 청년몰 ‘서울훼미리’에도 뜨는 맛집들이 여러 개 있다. 건어물상가 3층에 자리한 이곳에는 식당, 디저트, 떡 전문점, 공방 등 소규모 매장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섰다. 로비엔 20여 개의 테이블이 놓여 대형마트의 푸드코트를 닮았다. 2019년 8월에 개장한 서울훼미리는 초기 창업자 선발 과정부터 서바이벌 형식을 도입하며 실력 있는 청년 창업자들을 선정했다. 윤석경 서울훼미리 매니저는 “전체적으로 시장을 이용하는 고객이 늘었다”며 “브레이크타임 없이 운영되기 때문에 손님들이 늘 오신다”고 전했다. 윤 매니저는 “스타벅스가 생기기 전에는 혹 젊은 분들만 오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노년층도 함께 스타벅스를 이용하고 서울훼미리까지 들른다”며 “주말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아 매출이 꾸준하다”고 덧붙였다.
찾는 이들이 많아지니 마케팅의 귀재들이 모인 기업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장년층의 근린시설이 MZ세대의 새로운 놀이터가 됐다는 사실에 직접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일례로 지난 5월 제주맥주는 광장시장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개장 전 ‘과연 시장에서 맥주 바가 될까’란 염려는 기우였다. 평일에도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자리에 앉을 만큼 성황을 이루더니 약 3주 만에 5만여 명이 방문했다. 제주맥주는 이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 광장시장의 ‘박가네 빈대떡’ ‘365일장’과 손잡았다. 365일장에선 제주위트에일 등 주류 상품들과 각종 굿즈를 판매하며 포토존을 설치했고, 박가네 빈대떡은 안주를 냈다. SNS를 통한 입소문은 MZ세대를 광장시장으로 이끌었다. 이른바 로코노미 마케팅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LG전자의 ‘금성전파사 새로고침센터’도 전통시장에 들어선 이색 팝업스토어 중 하나다. 경동시장의 스타벅스 경동1960점으로 들어서려면 이 건물 1~2층에 자리한 금성전파사를 지나야 한다. 레트로 콘셉트의 이색체험공간인 이곳에는 LG전자가 최초로 선보인 흑백 TV, 냉장고, 세탁기 등이 전시됐다. 한쪽 벽면은 LG LED 사이니지 월을 조성해 경동시장의 옛 모습과 계절별 테마영상 등을 상영한다. 중장년층에겐 추억을, MZ세대에겐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금성전파사 맞은편의 한 상인은 “시장에 오는 게 아니라 일부러 전파사와 스타벅스에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구경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시장에서 물건도 사가니 상인들 입장에선 1석 2조”라고 전했다. 물론 전통시장의 높아진 관심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광장시장의 한 포목점 상인은 “먹을거리들이 즐비한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오면 어떨 땐 무서울 때도 있다”며 “노점 공간에 비해 턱없이 좁은 통행 길을 정비해야 찾는 이도 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랜만에 시장을 찾았다는 한 중년 여성은 “마트만 다니다 시장이 물건도 많고 싸다고 해 와봤는데, 비슷한 물건이라도 가게에 따라 1000원 이상 차이 나는 것도 있어 적응하기 쉽지 않다”고 답하기도 했다.
올해 전국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전통시장은 어디일까. <매경LUXMEN>이 자동차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티맵모빌리티’에 의뢰해 올 1월부터 9월까지 방문객(티맵 사용자 기준)이 가장 많은 전국 전통시장 순위를 집계했다.
전국 전통시장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은 ‘백종원’이란 이름만으로 명소가 된 ‘예산상설시장’이다. 이곳은 1981년 7283㎡의 너른 마당에 시장을 열고 199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침체기에 들어섰다. 올 1월 예산이 고향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리모델링에 나서며 전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백 대표는 리모델링 전 과정을 유튜브로 제작해 방송했다. 예산군에 따르면 올해 예산시장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 9월까지 약 180만여 명이 시장을 방문했다. 백 대표가 나서기 전 주말 방문객이 300여 명이었다면 현재는 약 2만 여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최근엔 예산상설시장 일대에서 제7회 예산장터 삼국축제도 열렸다. 1만 9000여 점의 국화로 가득 채워진 축제장의 전시공간과 먹을거리 등도 백종원 대표의 컨설팅을 거쳤다. 더본코리아는 최근 전남 장성군과도 지역경제 및 상권 활성화를 위한 협약을 맺었다. 민선8기 장성군 공약사업인 5대 맛거리 조성과 음식문화 콘텐츠 개발도 함께한다. ‘장성 5대 맛거리 조성사업’은 장성호 하류 미락단지를 포함해 권역별 5개 거리를 지정하고 장성만의 특화된 음식을 선보이는 사업이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는 협약식 현장에서 “호남의 중심 장성군은 최근 백양사 사찰음식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며 “지역 특화 음식 개발과 전통시장 활성화 등을 통해 장성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2위에 이름을 올린 포항의 ‘죽도시장’은 50년 전 갈대밭이 무성한 포항 내항 늪지대에 노점상이 들어서며 형성됐다. 1969년 10월 죽도시장 번영회가 정식 설립된 이후, 현재 점포수만 1500여 개에 달하는 경북 동해안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성장했다. 포항의 중심지인 오거리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에 동해안 최대 상설시장인 죽도어시장이 있어 사계절 내내 저렴한 가격으로 회를 즐길 수 있다. 제철 해산물로 만든 포항물회와 전복이 통째로 들어간 전복죽이 유명하고, 특히 겨울에는 어느 곳을 가도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를 맛볼 수 있다.
강릉시 성남동 일대에 자리한 중앙시장은 동쪽으로 동부시장, 서쪽으로 서부시장을 끼고 성장한 강릉의 핵심 상권이다. 수산물과 나물류 등 지역 향토성을 띤 특산물 거래가 활발해 강릉 인구는 물론 동해안 농어촌지역 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다. 강릉 단오제 행사가 열릴 땐 중앙시장 주변에서 약 1주일간 단오장이 진행된다.
[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