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 선언 이후에도 좀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했던 미국의 문화·공연 산업이 여름을 맞아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업계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깬 흥행작이 나오며 신선함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공연업계에서는 그간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오프라인 공연장으로 몰리며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MZ세대들이 문화·공연 산업의 주인공으로 떠오르며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새롭게 시작되는 뉴노멀 속 관련업계들도 발 빠르게 전략 수립에 나서며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나섰다.
마블, <스타워즈> 등 수억달러의 돈과 할리우드 스타가 투입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도해온 영화판에 새로운 균열이 발생했다. 바로 미국 장난감 완구 제작사 마텔의 대표 인형 ‘바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바비>가 올해 최대 흥행작으로 떠오르며 무더운 여름의 극장가를 강타했다. 마텔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기존 완구 사업과 더불어 영화 및 드라마 등 콘텐츠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 사업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렇게 마텔이 만든 영화 <바비>가 극장가에서 여러 신기록을 세우면서 올해 최대 흥행작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특히 마텔이 손잡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기준으로 살펴봐도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며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지난 7월 21일 개봉한 <바비>는 개봉주말부터 신기록을 쏟아냈다. <바비>는 개봉 주말 북미시장에서 1억5500만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이는 마블의 대표작 <어벤져스>시리즈 2편과 <스타워즈>에 이은 4번째로 높은 순위다. 블록버스터 작품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셈이다. 그 뿐 아니라 첫 주말 오프닝 성적은 여성 감독 영화 중에 단연 1위였다. 여름 극장가에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성공한다는 기존 공식을 깨고 예상 밖의 호실적을 이끌어낸 셈이다. 결국 <바비>는 8월 16일 기준 미국에서 5억3739만달러, 한화 7212억원을, 해외를 포함한 글로벌 흥행 수입 기준 12억달러를 넘겼다. 여성 감독의 글로벌 흥행 수입이 10억달러가 넘은 것은 <바비>의 그레타 거윅 감독이 최초다. 또한 북미 시장 기준 5억3739만달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가 기록한 5억 3499만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워너브라더스 역대 개봉 영화 중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이처럼 <바비>의 성공은 마텔과 워너브라더스 등 모두를 만족시키며 현재진행형으로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
재미있게도 <바비>의 흥행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었고 열렬한 지지층이 존재했다. 동반자는 영화 <오펜하이머>이며 지지층은 바로 요즘 대세 MZ세대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미국의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세계적인 감독의 신작이자 미국인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덕에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공교롭게도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영화 개봉일이 우연하게 7월 21일로 일치하며 흥미를 모았다. 밝고 가벼운 배경으로 만화 주인공 같은 <바비> 인형의 이야기를 다루는 <바비>와 고민과 번뇌의 연속이었던 핵개발 프로젝트를 이끌며 어둡게 흘러간 영화 <오펜하이머>는 상반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처럼 서로 상극의 영화가 한날한시에 개봉한 가운데 북미에서 MZ세대를 중심으로 정반대인 두 영화를 엮고 서로 연결고리를 만드는 등 놀이가 시작됐다.
결국 MZ세대들은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묶어 함께 관람하고 이를 인증했다. 아예 일부 사람들은 두 영화의 제목을 합쳐 ‘바벤하이머’라는 신조어를 생성하며 이러한 유행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는 MZ세대들이 흔하게 즐기는 밈 문화에서 시작됐으며 이것이 두 영화의 역대급 흥행성적을 만든 비결이란 뜻이다.
밈 문화는 특별한 이유나 논리적 근거 없이 사진이나 영상 등으로 구성된 것들을 온라인과 SNS 등을 통해 인증하고 따라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SNS상에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모두 예매한 뒤 두 영화를 연이어 관람하고 이를 인증하는 게시물들이 유행처럼 번지자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두 영화 감상하기 붐이 일어난 것이다. 한 유통업자는 바벤하이머 이미지를 활용한 티셔츠도 만들었는데, 1만4000달러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영화들의 특성상 <바비>는 MZ세대들로부터 인기를 끌 만한 내용과 구성으로 눈길을 모았지만 <오펜하이머>는 사실 어두운 영화 분위기 탓에 MZ세대들로부터 외면받을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며 “하지만 두 영화가 우연히 함께 밈화되면서 시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두 영화의 개봉일자가 3주가량 차이 나는 바람에 이러한 바벤하이머 열풍에 편승할 수 없었다. 다만 7월에 이미 국내 개봉한 <바비>는 60만 관객을 채우지 못하고 사실상 막을 내린 반면 <오펜하이머>는 개봉 첫날인 광복절에만 <바비>의 국내 관객 수보다 많은 55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성공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러한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글로벌 흥행과 관련해 본격적인 엔데믹 시대에 걸맞은 흥행작이 나온 것이라고 고무된 상황이다. 현지에서도 연일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흥행 소식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며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사실상 마스크를 벗고 거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지표나 성과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구심점을 찾기 위해 분주한 상황이었다. 물가가 안정화되는 가운데 여전히 금리 인상의 공포가 존재하는 만큼 실물경제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런 가운데 대표적인 문화활동이자 엔데믹의 상징과도 같은 영화업계에서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깜짝 흥행은 시장에 고무적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번 영화업계의 대흥행 여운이 현재 이어지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그간 지지부진했던 신규 영화의 흥행뿐 아니라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OTT 산업 공룡들의 재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은 그간 벌어들인 수익이나 구독료를 대부분 신규 작품 제작에 재투자해왔으나 눈길을 끌 만한 흥행작을 새로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번 <바비>의 대유행이 가져올 긍정적인 후폭풍이 업계 전반으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분위기다. OTT업계 관계자는 “최근 OTT 신작들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며 투자사와 제작사, 그리고 OTT 운영사에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결국 콘텐츠 산업의 승부는 콘텐츠로 갈릴 수밖에 없는 만큼 이번 신규 영화들의 유행이 업계가 각성하고 새로운 성공작을 만들어 낼 견인차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할리우드에 신선한 새바람이 불고 있다면 공연업계에는 한 글로벌 인기 가수가 전 세계를 돌며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테일러 스위프트.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테일러 스위프트는 ‘더 에라스 투어’라는 이름의 글로벌 투어 공연을 진행 중이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이 공연은 8월까지 총 52번의 미국 공연을 펼쳤으며 이어 전 세계를 돌며 내년 11월까지 총 146회의 공연을 예고하고 있다. 5년 만의 공연이자 코로나 대유행 이후 첫 투어 콘서트를 여는 글로벌 가수의 공연이 시작되자 전 세계 팬들이 콘서트를 보기 위해 대거 몰리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첫 예매 당시 무려 1400만 명의 사람들이 예매에 나서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그간 코로나19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앞으로 본격적인 대면 공연 문화의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특히 이번 미국 투어 공연 수익만 최소 10억달러, 한화 1조3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을 뿐 아니라 146회에 달하는 글로벌 공연을 마무리했을 경우 20억달러가량의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전 세계 투어 공연 흥행 역대 최고 기록이 될 전망이다. 그뿐 아니라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국 전역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가운데 이 공연을 보기 위해 해당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음식을 사 먹고, 숙박을 하고, 관광을 하며 일으키는 경제효과도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 예매를 실패한 팬들은 콘서트장 인근의 마을이나 도시로 가서 간접적으로라도 콘서트의 열기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처럼 전국 투어 콘서트로 불러일으킬 지역경제의 소비 비용이 대략 46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며 이러한 콘서트 후광효과에도 주목하고 있다. 아예 언론들은 테일러 스위프트와 +경제(이코노믹스)를 합친 테일러노믹스, 또는 스위프트노믹스라는 합성어를 만들어 이러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분석하기도 했다. 실제 콘서트장 근방 호텔은 전부 매진될 뿐 아니라 식당, 관광명소 등에도 사람들이 몰리며 톡톡히 테일러 스위프트 효과를 누리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지막 미국 국내 투어 장소였던 LA지역은 6번의 공연 동안 메트로 등 대중교통 사용량이 기존보다 250% 증가하며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이를 포함한 주말간 메트로 탑승객은 코로나 이전의 91%까지 회복하며 진정한 엔데믹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스스로도 많은 지출을 했다. 공연 내내 고생한 트럭운전기사 50명에게 1인당 10만달러의 보너스 수표를 나눠줬으며 그 외 밴드 멤버, 댄서, 조명 및 음향 기술자, 케이터링 담당자 등에게도 현금으로 보너스를 지급하며 총 5500만달러, 한화 711억원을 뿌렸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입장에선 막대한 수익을 올린 데다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기여까지 한 만큼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 셈이다.
특히 테일러 스위프트를 필두로 현재 글로벌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K팝 스타들의 활동 반경이 더욱 넓어지고 있는 만큼 향후 공연업계의 시장 전망은 밝은 편이다. 업계 관계자는 “엔데믹 이후에도 뾰족한 성과가 없어 지지부진을 거듭하던 문화업계에서 하나둘 성공 케이스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며 “아직까지 망설임이 앞섰던 공연 관람객들 역시 앞으로는 보다 쉽고 편하게 공연이나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돼 향후 더욱 성장이 기대된다” 고 밝혔다.
물론 분야를 가리지 않고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여파가 공연업계에도 번지고 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영화뿐 아니라 각종 공연 티켓 예매 비용이 코로나19 대유행 이전보다 20% 이상 오른 것으로 파악되는 가운데 이러한 가격 부담 요인은 향후 오프라인 대면 행사의 큰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시경제의 향방이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거시경제의 위기에서 촉발된 가계 부채 부담의 확대, 대규모 정리해고 공포 등이 연쇄 발생할 경우 향후 가장 먼저 돈이 빠져 나갈 분야 역시 문화·공연 분야이므르 이러한 거시경제의 방향성에도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결국 문화·공연도 가계에 여유가 있어야만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위해서는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하는 금리 인상 리스크와 인플레이션 문제가 차근차근 풀려 나가야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다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