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바람이 심하거나 갑자기 비가 많이 오면 어떡해? 여긴 바다 위를 걷는 거라며?”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걸으면 되지. 걱정부터 하면 저 앞에 경치가 얼마나 멋진지 전혀 알 수 없을걸.”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오르는 품이 십중팔구 신혼부부다. 번갈아 가며 맞잡는 두 손을 보니 남녀모두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금가락지가 반짝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까운 일본이라도 나갈 걸 그랬나. 날씨가 너무 오락가락이야.”
신부의 푸념에 신랑이 토닥인다.
“신혼여행비 아낀 덕분에 여행하고 돌아갈 곳이 생겼잖아. 내년엔 좀 더 멀리 가보자. 내년부터 조금씩 멀리 가면 유럽도 금방이겠다.”
걷는 길이 하나인 탓에 자의 반 타의 반 동반하는 객이 부담스러웠는지 신부가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잠시 쉬어가자. 너무 빨리 가지도 말고 느리게 가지도 말고 쉴 곳 있으면 쉬었다 가자고. 앞으로 내가 쉬자 할 때 짜증내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앞서가던 신랑이 뒷걸음치며 한마디 한다.
“네. (벤치를 가리키며) 여기 의자도 있고 (손을 내밀며) 우산도 있습니다!”
정확히 아침 8시 반에 심곡항에 자리한 심곡매표소를 찾았다. 여름엔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 반(매표시간 4시 반)까지 개방되는 이 길은 입장권(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500원, 어린이 2000원)을 사야 들어갈 수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인적이 뜸하다. 그래서 비슷한 시간에 입장한 이들의 대화가 자연스레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전망 타워를 지나 부채바위를 향해 난 철재 데크를 걷다보면 마치 “그냥 아무 잡념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라”는 듯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모든 소음을 삼켜 버린다. 한여름의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그 소리가 깊고 넓다.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 관광지인 이곳은 정동진에 자리한 커다란 배 모양의 리조트 바로 앞에서 출발해 심곡항까지 이어지는 약 3㎞ 구간의 산책길이다. 바다 위에 목재와 철제 데크를 설치해 일부러 길을 냈다. 심곡항이나 정동진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무방한데, 한번 걸으면 왜 일부러 길을 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바다가 만들어낸 조각과 풍광이 빼어나다. 단 정동진에서 출발하면 초입에 내리막 계단을 만나지만 심곡항에서 출발하면 마지막 구간이 깔딱고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물론 매표소로 향하기 전에 길이 열렸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헤쳐 간다지만 파도가 심할 땐 길을 열지 않는다. 처음 개통 당시 놓인 목재 데크를 걷어내고 철제 데크로 교체하는 공사가 진행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확연하다. 그것도 계단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니 3㎞ 남짓이라고 업수이 여겼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구간 내엔 화장실도 없다. 약한 신호라도 왔다면 매표소에 마련된 화장실부터 들러야 한다. 길은 풍경을 보고 즐기는 것만 허락할 뿐 먹고 마시며 흔적을 남기는 걸 원치 않는다. 당연히 쓰레기통도 없다. 이러한 주의사항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면 이제 오롯이 즐길 일만 남았다. 좁은 데크길을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지루하진 않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그대로 망망대해 태평양이다. 무엇 하나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뻥 뚫렸다. 게다가 방금까지 뿌옇게 흐렸던 구름이 걷히며 하늘빛까지 새파래 눈이 시렸다. 산책길 곳곳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특히 투구 바위나 부채바위처럼 전설을 간직한 명소 주위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가 일품이다.
투구를 쓰고 있는 모양의 투구바위에는 고려 명장 강감찬 장군의 ‘육발호랑이의 내기두기’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부채를 펼쳐놓은 듯 거대한 부채바위에도 설화가 깃들어 있다. 그 아래 마련된 벤치에 앉으면 마치 태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친다. 기분 좋은 자연풍이다. 홀로 걸어도 좋고 가족이 함께 걸어도 좋은데 이름난 바위 언저리가 바로 포토 스폿이다. 어느 방향으로 포커스를 맞춰도 핫플이요, 인생컷이 나온다. 심곡항에서 출발했으니 마지막 구간은 오르막이다. 그런데 이 길, 마지막까지 계단으로 마무리돼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자신 있어도 한 번, 없어도 한 번은 쉬어가야 한다. 오르던 계단에서 돌아서 바다를 바라보면 이 또한 또 다른 추억이 된다. 출발점과 도착점에는 순환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도착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버스를 이용할 수도, 지척에 마련된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의 ‘정동’, 깊은 골짜기 안의 마을이란 의미의 ‘심곡’,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놓은 것 같아 ‘부채’란 단어가 지명이 됐다.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2300만 년 전 지각 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