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한국 명품 소비 시장 규모가 168억달러(약 21조원)로 전년 대비 24%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인구수로 환산하면 1인당 325달러(약 40만원)로 중국과 미국의 1인당 지출액인 55달러, 280달러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다. 모건스탠리는 한국의 명품 수요가 늘고 있는 요인으로 2가지를 지목했다. 하나는 2021년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순자산가치 증가, 또 하나는 사회적 신분의 상승과 과시욕을 꼽았다. 구찌, 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이탈리아 현지에서도 한국인의 남다른 명품 사랑이 화제가 됐다. 지난 1월 말 이탈리아 전국지 <일 솔레24 오레>는 ‘명품이 한국으로 향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의 명품 사랑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라고 분석하며 “명품 브랜드들이 오래전부터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분류했고, 최근 1년간 투자를 확대했다”고 소개했다. 여기서 잠깐.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그대로일까.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백화점의 명품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매출이 줄었고, MZ세대가 주도하던 리셀 시장은 급격히 거품이 꺼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업계에선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한 명품 브랜드 매니저는 “경기 침체가 자산 시장의 위축으로 이어져 소비심리가 쪼그라들고 있지만 새로운 소비패턴이 그 뒤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절대 망하지 않는 재화(財貨)가 바로 명품”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현재 명품 시장에는 이른바 신명품 브랜드의 성장세가 뚜렷하다. 전통적인 명품이 주춤하는 사이 이른바 매스티지로 분류되는 브랜드가 치고 올라오는 형국이다.
매스(Mass·대중)와 프레스티지(Prestige·명품)의 합성어인 매스티지 브랜드는 대중적인 명품을 가리킨다. 기존 명품보다 값은 저렴하지만 고급 브랜드란 인식이 정착되며 차별화를 원하는 MZ세대의 소비욕구를 자극했다. 일명 준명품 혹은 신명품이라 불리는 이유다. 헤리티지를 강조하는 기존 명품과 달리 신명품은 비교적 역사가 짧다. 업계에선 1980년대 이후에 탄생한 브랜드를 매스티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전개하는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아미(AMI)’는 그런 의미에서 신명품의 선두주자다. 티셔츠는 30만원, 카디건이 70만원대에 이르지만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매출 신장세를 기록 중이다.
‘디올 옴므’ ‘지방시’의 디자이너를 역임한 프랑스 출신 남성복 디자이너 알렉상드르 마티우시(Alexandre Mattiussi)가 2011년 설립했다. 브랜드명인 아미는 알렉상드르 마티우시의 알파벳 약자이자 프랑스어로 친구를 의미한다. 아미의 컬렉션은 프랑스 파리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와 무심하고 쿨한 감성을 담아낸다. 파리, 뉴욕, 도쿄, 런던, 베이징 등지에 20여 개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고, 전 세계에 500여 개 매장이 있다. 그러면 그중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플래그십 스토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난해 9월 서울 가로수길에 들어선 아미 플래그십 스토어가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이다. 총 4층, 431.33㎡(약 130평) 규모로 브랜드 상징인 하트 로고 상품과 남성, 여성, 액세서리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매장에는 특히 새로운 리테일 스토어 콘셉트가 적용됐다. 1, 2층은 아미의 건축적 요소가 그대로 드러나는 통유리로 디자인해 외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부는 회색조의 외벽에 브랜드 심볼인 하트 로고가 전면에 장식됐다. 측면에는 아미의 시즌 비주얼을 송출하는 스크린이 자리했다. 또 개성이 넘치는 재료를 과감히 사용해 독특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무 바닥의 투톤 패널이 화려한 기하학 패턴으로 반복되고,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연결된 나무 소재의 나선형 계단과 거울로 마무리된 쇼케이스는 전 세계에서 가로수길 플래그십 스토어에만 적용됐다. 인테리어에 반영된 다채로운 디자인은 오롯이 알렉상드르 마티우시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됐다. 플래그십 스토어 개장 이후 지난해 10월 국내에서 첫 패션쇼를 가진 마티우시는 당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으로부터 오히려 더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과 안목이 까다로울 정도로 높다”며 “팬데믹 기간에 온라인 스토어를 중심으로 판매가 늘면서 오히려 더 큰 성공을 거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에서 아미의 인지도와 성장세는 매장 규모와 패션쇼 등의 행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광화문 광장 육조마당에서 열린 ‘2023년 봄여름 시즌 컬렉션’에는 유명 모델뿐 아니라 길거리 캐스팅으로 선발된 신인들이 런웨이에 오르며 주목받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는 국내 고객뿐 아니라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미는 올 5월 누적 매출 기준, 전년 동기 대비 30% 가까이 성장했다. 국내에서 외국인 구매 비중이 30%를 웃도는데 동남아, 중국, 일본 관광객순으로 구매율이 높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측은 “동남아에서 한류의 영향이 커지고 있고, K팝 스타와 배우들이 입은 아미를 보고 구매하려는 경향이 크다”며 “한국에서만 판매하는 익스클루시브 아이템의 영향으로 구매심리를 자극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올 들어 한국 아티스트 ‘노보(Novo)’와 손잡고 브랜드의 상징인 하트(Ami de Coeur·아미 드 쾨르)를 재해석한 리미티드 캡슐 컬렉션을 출시한 것도 이러한 전략 중 하나다. 아미는 매년 하트를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할 아티스트와 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한국인 아티스트를 선정해 작업했다. 작가 노보는 알렉상드르 마티우시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원숭이 인형에서 영감받아 빨간 베레모를 쓰고 아미 티셔츠를 입은 원숭이 캐릭터를 만들었다. 또 아미의 ‘A’와 노보의 브랜드 시그니처 스마일 로고에 3개의 눈을 더한 새로운 심볼을 만들었다. 남호성 아미 팀장은 “아미는 수년간 MZ세대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등극하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며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물론 유통 전략을 통해 고객들과 소통하며 브랜드 철학과 가치를 세련되게 전달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미를 비롯한 매스티지 브랜드의 성공에 주요 패션기업들의 수입 브랜드 도입 경쟁도 잰걸음이다. MZ세대를겨냥한 신명품 분야는 패션을 넘어 뷰티 분야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가장 움직임이 활발한 곳은 신세계인터내셔날과 한섬, 삼성물산 패션부문이다. 특히 한섬은 2021년 해외패션본부를 부문으로 격상한 후 독점 브랜드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8월 ‘아워레가시’, 12월에 ‘가브리엘라 허스트’를 론칭한 한섬은 올해 ‘토템’ ‘베로니카 비어드’를 론칭했다. 수입 편집숍 전개도 활발하다. 지난해 5월 향수 편집숍 ‘리퀴드 퍼퓸바’를 론칭했고, 올해는 남성 매장 ‘톰그레이하운드’를 전개하고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해 ‘필립플레인’ ‘엔폴드’를 론칭했다. 올해는 ‘리포메이션’ ‘꾸레쥬’ ‘힐리’ ‘쿨티’ 등의 브랜드를 새롭게 선보인다. 이 외에 3개 이상의 뷰티 브랜드를 론칭해 성장동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아미를 전개하고 있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지난해 ‘10 꼬르소꼬모 서울’을 통해 수입해온 ‘자크뮈스’와 ‘비이커’를 통해 수입해온 ‘가니’ ‘스튜디오 니콜슨’의 독점 판권을 확보해 단독 브랜드로 론칭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주요 수입 브랜드의 올 평균 성장률 목표를 20%로 설정했다. ‘10꼬르소꼬모’와 ‘르메르’ ‘꼼데가르송’, 남성복 ‘수트서플라이’는 20%, ‘슬로웨어’는 25%, ‘아미’는 30% 성장시킨다는 전략이다. 한 수입 패션 브랜드의 임원은 “전통적인 명품이 국내 직진출로 방향을 선회했다면 신명품 브랜드는 국내 패션 기업을 통해 인지도를 넓히는 게 우선”이라며 “당연히 국내 패션 기업들의 신성장동력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삼성물산 패션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