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기엔 골프장에 한껏 차려입은 2030세대가 많았는데, 엔데믹 기조에 들어서면서 요즘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궁금해서 골프장 매니저에게 물었더니 비용이 오른 게 가장 큰 이유라더군요. 그렇다고 부킹이 쉬운 것도 아니에요. 경제상황에 따라 어떤 이들은 라운드 횟수를 줄였고, 또 어떤 이들은 횟수를 늘린 거죠.”
최근 오랜만에 만난 중견기업 임원이 건넨 골프장 풍경이다. 그는 “리세션 전망이 이어지면서 백화점 명품 매장에도 MZ세대 출입이 많이 줄었다”며 “소비층이 넓어지고 소비여력이 탄탄해야 우리 같은 기업도 힘을 받을 텐데 요즘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그와 헤어진 후 문득 경기 침체가 명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최근 보도된 내용을 살펴보니 팬데믹 기간에 2배 이상 가격이 올랐던 롤렉스, 파텍필립 등 명품시계의 중고 시장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는 모건스탠리와 중고시계 거래 사이트 워치차트발 소식이 눈에 띈다.
명품시계는 주문 후 제품을 수령하는 데 보통 1~2년이 걸린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수작업으로 제품을 제조하는데, 글로벌 시장의 주문량에 비해 제조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고 시장의 가격이 잠재 수요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때로 신제품보다 중고가격이 높아 재테크 아이템이 되기도 한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분석을 통해 시계 재고 증가에 따라 중고가격이 더 하락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시 말해 생산량은 그대로인데 주문량이 줄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 현장 상황은 어떨까. 서울 시내 한 백화점 명품 브랜드 매니저에게 물었더니 이번엔 좀 다른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와 올 초에 비해 매장을 찾는 2030세대들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판매량까지 준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소재나 유통 비용이 증가하면서 명품 브랜드별로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고 오르기 전에 구입하려는 분들로 오픈런은 여전하다”며 “재테크 아이템으로 찾는 분들이 여전한지는 모르겠는데, 결혼을 앞두고 제품을 구입하는 분들의 수요는 결코 줄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명품시계 분야는 어떨까. 강남 지역 백화점의 한 명품시계 매장 매니저에게서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브랜드별로 다르긴 하지만 인기가 높은 브랜드들은 판매량이 여전할 거예요.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고, 명품시계는 제품에 대한 팬덤이나 마니아층이 탄탄하기 때문에 경제 침체라고 해도 곧바로 영향을 받진 않거든요.”
그럼 국내에선 어떤 브랜드의 인기가 꾸준한 걸까. 그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사견인데, 업계 분들과 얘기하다보면 올해는 롤렉스보다 IWC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며 “아마도 영화 <탑건>이 개봉하면서 파일럿 워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도 있고, 그 덕에 결혼예물로도 인기가 높아졌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올 6월 영화 <탑건2>가 개봉하기 전 IWC가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상공에서 펼친 ‘IWC 탑건 드론쇼(IWC TOP GUN DRONE SHOW)’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일럿 워치의 명가로 알려진 IWC는 당시 드론쇼를 통해 2022년 파일럿 워치 ‘탑건’ 라인의 신제품 출시를 기념했다. 이날 수많은 드론이 영화 <탑건> 로고를 시작으로 서울의 랜드마크인 경복궁과 여의도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 형상, IWC 크로노그래프 워치 형상, IWC 로고 형상으로 대열을 이루며 서울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럼 올해 IWC의 국내 매출은 얼마나 됐을까. 이번엔 IWC 코리아 측에 물었더니 “국내 매출의 외부 공유는 어려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가 매출과 관련해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지난 6월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리치몬트코리아의 매출을 확인했더니 (IWC는 리치몬트그룹 소속이다) 전년 대비 37% 증가해 1조원을 훌쩍 넘어섰다.
리치몬트코리아는 ‘까르띠에’ ‘반클리프아펠’ ‘몽블랑’을 비롯해 ‘랑에운트죄네’ ‘보메메르시에’ ‘예거르쿨트르’ ‘파네라이’ ‘피아제’ ‘로저드뷔’ ‘바쉐론콘스탄틴’ ‘IWC샤프하우젠’ 등의 시계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가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한 건 2020년 이후 지난해가 두 번째다. 정확한 매출액은 1조1856억원. 영업이익은 974억원으로 31%나 늘었다.
실적 호조에 본사 배당액도 늘었다. 리치몬트코리아는 당기순이익 668억원 가운데 476억원을 대주주인 리치몬트 인터내셔널 홀딩 SA에 지급했다. 살짝 늘어난 기부금은 3억2250억원으로 확인됐다.
1868년에 시작된 스위스 시계 ‘IWC샤프하우젠’의 역사는 미국의 개척 정신과 창업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행운을 찾아 서부로 떠나던 시절, 미국 출신 엔지니어이자 시계 장인이었던 플로렌타인 아리오스토 존스는 반대쪽을 택했다.
그는 미국의 선진 제작 기술과 스위스 장인들의 정밀한 기술력을 결합한 최고 수준의 포켓 워치 무브먼트를 제작하기 위해 스위스로 건너갔고, 인터내셔널워치컴퍼니(IWC·International Watch Company)를 설립한다. IWC가 탄생한 순간이다. 수많은 명품시계 브랜드의 본사와 공장이 스위스 제네바의 유라 산맥에 밀집한 것과 달리, IWC는 독일 라인강에서 생산되는 수력 발전을 기반으로 스위스 북동부의 샤프하우젠(Schaff hausen)에 자리했다.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으로 시작한 IWC의 성공 스토리는 비교적 명쾌하다. 인터내셔널워치컴퍼니(IWC)라는 직관적인 이름도, 최초의 디지털 디스플레이 형식 포켓 워치, 최초의 그랑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 등 각종 신기록을 보유한 이력도 남다르다.
세계 최초로 티타늄과 세라믹을 시계 제작에 적용했고, 이 두 소재의 장점을 결합한 신소재 ‘세라타늄’을 개발해 특허를 내기도 했다. 1989년 선보인 인제니어 500000Am(500000A/m의 자기장 영역을 넘어 무브먼트를 보호하는 시계)로 ‘항자기성이 가장 뛰어난’ 기록을 세우는 등 세대를 거듭하며 시계 공학을 수준을 끌어올렸다.
IWC의 모든 시계에는 ‘프로버스 스카프시아(Probus Scafusia)’라는 로고가 각인된다. 1903년부터 공식화된 이 로고는 라틴어로 ‘샤프하우젠의 정교한 장인 기술’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브랜드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부심은 친환경 등 지속가능경영으로 이어진다. 지난 2020년에 IWC는 올해까지 달성할 아홉 가지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시계 부품에 대한 RJC CoC(Chain of Custody) 인증(공급망에서 사용되는 금 및 플래티넘이 완전히 추적 가능하며 책임 있는 공급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인증하는 자체적인 기준)’ ‘100% 재생에너지 구매’ ‘일하기 좋은 기업 인증 유지’ ‘스위스 내 동일 임금 인증 취득’ ‘지속 가능한 이벤트를 위한 청사진 개발 및 시범 운영’ 등이 그것이다. 올해는 ‘FSC(국제삼림관리협의회) 비인증 임산물 구매의 단계적 중단’ ‘2020년 대비 IWC의 연간 기업 자원봉사 시간 2배 증가’ ‘2017년 대비 여성 임원 2배 증원’ 등의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IWC는 국내 시장에서 F&B 매장도 운영하고 있다. 손목시계에서 먹고 마시는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며 기존 고객에겐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고, 새로운 소비자 유입을 노리는 영민한 전략이다. 지난해 7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5층에 문을 연 ‘BIG PILOT BAR BY IWC&CENTER COFFEE(이하 빅 파일럿 바)’는 IWC가 전 세계 최초로 운영하는 공식 커피 매장(카페)이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손목시계 ‘빅 파일럿’을 주제로 실내를 꾸몄고, 디저트와 커피에도 시계의 특징을 반영했다.
이 카페는 IWC가 2017년 스위스 제네바에 개장한 칵테일바 이후 두 번째 F&B 매장이다. IWC 측은 “매력적인 트렌디함의 중심이 되고 있는 한국 시장에서 빅 파일럿 바를 오픈한 건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라며 “점점 커지는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빅 파일럿 바는 실용성과 디자인을 중시하는 IWC의 브랜드 정체성을 그대로 차용했다. 빅 파일럿 워치의 다이얼 크기를 반영해 10m에 달하는 테이블을 바의 정중앙에 배치했고, 그 안에 6m의 스크린을 설치해 이른바 빅 테이블과 빅 스크린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계의 무브먼트나 다이얼 모양을 연상시키는 바의 원형 홈과 홈에 고정시킬 수 있는 컵을 따로 제작해 세밀한 작업이 진행되는 시계 제조사의 세심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벽면은 재활용 소재인 폐유리와 폐비닐, 폐플라스틱 등을 사용해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표현했다.
카페의 모든 음료는 프리미엄 원두로 유명한 서울 성수동의 카페 ‘센터 커피’에서 담당한다. 빅 파일럿 워치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BOLD’와 ‘PURE’ 등 두 가지 원두가 준비됐다. 음료 외에 파우치, 텀블러, 유리컵 등의 굿즈도 판매한다.
대표 메뉴인 ‘SKY OVER AFRICA’나 ‘SWEET TAKE-OFF’에선 IWC 특유의 비행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럭셔리 브랜드의 F&B 분야 진출은 젊은 소비층, 특히 MZ세대를 겨냥한 장기적인 포석일 수 있다”며 “브랜드 입장에선 수백만, 수천만원에 달하는 제품의 진입 문턱을 식음료 가격대로 낮출 수 있고, 소비자 입장에선 만족스러운 가격대로 브랜드를 경험하고 소비할 수 있어 장기적인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6호 (2022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