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본(신세계백화점 본점)보다 압갤(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쪽에 많이 들어왔다네.” “일양택배차 들어왔다. 준비하자!” “오늘은 클미(클래식 미디엄 플랩백)는 없고 클스(클래식 스몰 플랩백)만 있어.”
샤넬을 구매하기 위해 밤샘 노숙을 서슴지 않는 백화점 오픈런 현장(?)에는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이 난무한다. 백화점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은 기본이고 인기 있는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먼저 구매하고 나온 리셀러가 정보를 숨기기 위해 뒤쪽에 줄을 서있는 지인에게 제품 수량 정보를 제공하는 용어도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지 않다. 특정 업체의 택배차가 들어오면 물건이 들어오는 소문(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이 도는가 하면 백화점별 당일 들어오는 물량이 제각각이라 원하는 물건을 받는 것은 팔자라는 의미로 ‘팔자런’이라는 용어도 일반적으로 들린다.
줄 서기 아르바이트에 수십 개의 전문 업체들이 경쟁할 정도로 산업화에 성공(?)한 산업현장은 한동안 잠잠했다. 이유는 한 가지, 리셀가의 하락이다. 한때 구매에 성공하면 리셀 시장을 통해 정가에 수백만원의 웃돈이 붙었던 샤넬의 가격이 최근 자산 시장의 하락과 유사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1일 기준 리셀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샤넬 대표 제품인 ‘클래식 미디엄 플랩백’은 111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올 초 1400만원대까지 치솟았던 가격이 21% 넘게 떨어진 셈이다. 리셀가가 정가(1233만원)보다 밑으로 내려간 셈이다.
‘클래식 스몰 플랩백’의 경우에도 올 초 1280만원까지 상승했던 가격이 현재 1085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샤넬 인기 제품의 프리미엄도 같은 기간에 100만원가량 빠졌다. ‘샤넬 체인 미니백’의 리셀가는 460만원에서 368만원으로, ‘샤넬 체인 코스메틱 케이스’는 440만원에서 355만원으로 하락했다.
지난 2년여간 샤넬은 반복된 오픈런으로 평판을 훼손하고 실수요자들을 홀대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전날 밤부터 매장 앞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깔고 기다리는 ‘노숙런’, 에스컬레이터 역주행을 벌이는 ‘좀비런’까지 속칭 부정적인 짤로 돌아다니며 구매 욕구를 떨어뜨렸다는 평가다. 큰돈을 쓰면서도 오픈런을 이겨내고 불친절한 서비스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고객들의 피로감이 쌓여가며 안티샤넬 움직임도 보였다.
패션 업계 한 관계자는 “2년 전만 해도 샤넬이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리셀의 상징처럼 떠올랐다”며 “브랜드를 소비하는 이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리셀러로 보인다는 반응이 많다”고 설명했다.
▶가격 하락세… 명품값 거품 빠지는 신호탄?
리셀러들이 늘어나며 샤넬의 가격 상승을 유도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건을 구입해 쓰다가 시장에 내놓으면 가격이 내려가기는커녕 웃돈까지 붙여 팔 수 있게 되자 개인 리셀러들은 물론 업자들이 명품 매장으로 몰려들어 물량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샤넬은 에르메스의 전략을 빌렸다. 샤넬은 지난해 10월부터 특정 제품에 대해 1년에 1개씩만 살 수 있는 구매 제한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에르메스가 오래전에 도입한 전략이다. 샤넬은 당일 재고 여부에 따라 핸드백을 구매할 수 있지만,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에르메스 버킨백·켈리백의 경우 주얼리·신발 등 비교적 저가 품목으로 실적을 쌓은 이후에 구매할 수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샤넬은 올해 세 번째 가격 인상을 예고했다. 필리프 블론디오 샤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 약세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 달 중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올해 들어 두 차례 핸드백 가격을 인상한 샤넬은 이번에도 클래식 라인 등 인기 핸드백 가격을 10%가량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단행된 주얼리 인상까지 포함하면 샤넬은 코로나19 이후 국내에서 총 9차례 가격을 인상했다. 클래식 플랩백 등 인기 제품의 현재 가격은 2019년과 비교할 때 2배에 달한다. 가격 인상이 예고되자 한동안 잠잠했던 ‘오픈런’도 재개된 상황이다. 7월로 예상되는 가격 인상 전에 인기상품을 확보해두려는 심산이다.
지난해 ‘샤넬 4월 가격 인상설’이 나돌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2층에는 샤넬 오픈런을 위해 새벽부터 1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샤넬에 대한 원성이 적지 않다. 한 패션 업계 관계자는 “샤넬은 지난해 국내에서 2, 7, 9, 11월 무려 4차례, 올해는 1월과 3월 두 차례 핸드백 가격을 인상했다”며 “여타 명품 브랜드도 가격 인상을 단행했지만 샤넬이 가장 많은 인상 폭과 횟수로 오픈런을 부추기고 리셀러의 타깃이 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샤넬 코리아 측은 “제작비·원재료 변화와 환율 변동 등을 고려하여 가격을 정기적으로 조정한다”며 “이번 가격 인상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며 샤넬이 운영되는 모든 시장의 현저한 가격 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유통업계는 리셀러들이 늘어난 샤넬에 스노브 효과(Snob Effect)가 나타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스노브 효과는 다수의 소비자가 구매하는 제품은 흔한 제품이라 인식해 꺼리는 심리를 의미한다. 즉 특정 재화에 대한 과시적 소비가 다수 대중에게 확산하면 이러한 소비가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이나 위상을 차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남들이 쉽게 살 수 없는 브랜드로 옮기거나 구매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리셀 가격 하락은 코로나 기간 천정부지로 올랐던 명품 가격의 거품이 빠지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무적의 롤렉스·컬래버 열기도 식어
최근 평일 정오 명동 중심 거리 한복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캠핑용 의자가 수십 개나 늘어서 있다. ‘임대문의’ 현수막이 걸린 공실 앞에 늘어선 캠핑 의자에 앉아 줄을 서며 잠을 청하는 사람들은 스와치그룹이 시계 브랜드 오메가와 스와치의 협업으로 만든 30만원대 ‘문스와치’를 사기 위한 줄이었다. 기자가 취재를 나간 당일 리셀러들과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마찰이 있어 경찰이 중재하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출시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에도 연일 대기 줄이 생겼고 리셀 시장에는 정가에 2배의 웃돈을 얹은 채 거래되고 있다. 크림에 따르면 ‘문스와치 미션 투 더 문’ 제품은 지난 6월 21일 기준 80만원에 거래됐다. 출시 직후 180만원까지 치솟았던 가격은 다소 내려왔지만, 아직도 2배가 넘는 가격에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아디다스 X 구찌 컬렉션
문스와치는 지난 3월 26일 전 세계 110개 매장에서 발매됐다. 이 제품은 지난 1969년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 탐사 당시 착용한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문워치’를 재해석한 시계다. 디자인은 태양계 행성 이미지를 활용해 총 11개의 컬렉션으로 구성했다.
소재나 재질은 오메가와 다르지만, 다이얼에는 오메가 로고가 새겨졌다. 약 700만~900만원을 호가하는 문워치와 비슷한 시계를 30만원대에 구매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각국에서는 발매 첫날부터 ‘오픈런’이 벌어졌다. 문스와치는 스와치 명동점은 물론 스위스 제네바와 이탈리아 밀라노 등에서도 완판됐다. 비정기적으로 소량의 물량이 명동 매장에만 풀리는 것으로 알려지자 리셀러들의 노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스와치 측은 이에 대해 홈페이지를 통해 “문스와치 컬렉션은 한정판이 아니며 몇 주 안에 다시 출시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1인당 구매 가능 개수를 2개로 제한하는 조치도 취했다. 그럼에도 수요 증가에 따른 품귀 현상이 빚어지자 시세차익을 남기려는 리셀업자들이 몰리고 있고, 시계를 사지 못한 이들은 중고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스와치코리아는 다시 홈페이지를 통해 “전 세계 팬들의 수요로 인해 현재 문스와치 재고가 부족하다”며 “주기적으로 재고를 공급하고 있으며, 조만간 재고가 확보되면 바로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소량의 물량만 풀리는 문스와치는 희소성으로 인해 아직까지 가격이 유지되고 있지만 그동안 굳건했던 롤렉스의 리셀가도 많이 내려온 상황이다. 롤렉스 시계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으로 알려진 ‘서브마리너 데이트 스틸(블랙)’의 크림 최근 리셀 가격은 1805만원이다. 지난해 말 2000만원 초반에 거래된 뒤 현재 200만원 하락한 1800만원 수준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리셀러들의 집중 타깃이 된 스와치와 오메가의 컬래버로 탄생한 ‘문스와치’ 시계
최근 MZ세대의 인기를 끌고 있는 두 브랜드인 구찌와 아디다스의 컬래버 제품, 일명 구찌다스가 공개됐지만 반응은 예전같지 않았다. 지난 6월 14일 낮 12시 판매 개시했던 대표 제품인 가젤 스니커즈는 선착순 판매를 시작했지만 오픈런은 보이지 않았다. 여타 유력 브랜드의 컬래버 제품들이 출시와 동시에 몇 분 만에 완판되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먼저 높은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구찌다스 가젤 스니커즈 가격은 112만원으로 기존 구찌 운동화 제품 가격과 비슷하다. 구찌와 아디다스 로고가 함께 그려진 버킷 모자는 70만원대다. 맨투맨 티셔츠는 200만원을 호가하고 짧은 반바지 제품 가격도 240만원가량이다. 옆으로 맬 수 있는 작은 가방은 450만원에 판매된다. 여타 컬래버 제품의 경우 가격대가 저렴한 브랜드보다 조금 높은 가격대로 출시되는 것에 비해 구찌다스는 고가의 브랜드인 구찌의 가격대에 형성돼 리셀 시장에서 프리미엄이 전무하다. 한정판 구매 열풍의 큰 축을 담당했던 리셀 수요가 빠지면서 전반적으로 판매가 줄어든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패션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브랜드 간 컬래버가 폭발적으로 늘어 소비자는 물론 리셀러들의 반응도 예전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가격적인 메리트나 흥미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할 경우 실패 사례가 늘어나며 컬래버 기피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