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원시림 사이를 지나는 기분이었다. 늪지대 같은 초록 세상 속을 내달렸다. 그러다가 풍경이 단순해졌다. 햇살과 목초지, 지평선만으로 이뤄진 세상이 펼쳐졌다.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세상이 이곳이구나, 깨달았다. 또 달려 나가니 회색 자작나무 숲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물론 넋 놓고 가다가 포트홀을 만나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아직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곳에선 팔다리 후들거리면서 흙먼지를 맡았다. 그렇게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지나쳤다. 내가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지나온 길이었다. 그것 자체로 좋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보다 적합한 모터사이클이라면 어땠을까?
대륙 횡단에 적합한 모터사이클이 있다. 물론 뭘 타고 가도 상관없다(참고로 나는 레트로 모터사이클인 ‘야마하 SR400’을 타고 갔다). 하지만 다양한 길을 대응하면서 장거리를 달리는 데 수월한 모델이 분명히 있다. 어드벤처 장르 모터사이클, 듀얼 퍼퍼스(Dual-Purpose), 혹은 빅 엔듀로 등 불리는 명칭은 다양하다. 각 특징을 담은 명칭이지만 어드벤처로 수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륙 횡단 같은 ‘어드벤처’에 적합한 모터사이클. 도로도 달리고, 때때로 산도 들도 넘어야 하니까. 어드벤처라니,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단어인가. 현대인에게 어드벤처는 앨리스의 토끼 굴처럼 판타지를 자극하는 단어다. 언제 갈지 몰라도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만으로 기분이 고조된다. 최근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의 인기가 꾸준한 이유다. 각 모터사이클 브랜드도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저마다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을 내놓았다. 전통 강자와 신흥 세력이 뒤섞였다. 전통 강자는 모델을 세분화하고, 신흥 세력은 신선한 모델을 선보였다. 앞으로 출시할 모델도 수두룩하게 대기 중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즐거운 일이다. 선택지가 많아졌으니까. 취향과 기호를 세밀하게 적용할 시장이 형성됐다. 이런 흐름에서 ‘KTM 790 어드벤처’가 나타났다. 분류하자면 전통 강자의 세분화 모델. 보다 본격적인 어드벤처를 지향한다. 점점 무르익은 어드벤처 시장에서 본격적인 모험을 자극한다. 미들급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의 장점을 극대화한 전략이다. 덩치와 무게는 줄이고 오프로드 성능은 높였다. 랠리 머신을 일상에 적용한 콘셉트니 어련할까. KTM이 잘하는 영역에서 솜씨를 발휘하겠다는 어떤 선포 같은 모터사이클이다. 790 어드벤처의 역할이기도 하다.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은 보통 오버리터급(1000cc 이상)이 주류다. 큰 덩치를 자랑하고 무게도 만만치 않다. 험로를 다닐 수 있지만 편한 투어러 역할도 맡는다. 물론 대형 어드벤처 모터사이클로 산을 누비는 사람들이 늘어나긴 했다. 그건 그것대로 즐겁겠지만, 도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험로에서 크기와 무게가 주는 물리적인 한계는 분명하다. 그 한계를 줄이면서 장거리 투어러의 요소도 놓치지 않는 절충선. 790 어드벤처가 지향하는 바다.
몇몇 제원을 먼저 들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790 어드벤처의 건조중량은 189㎏이다. 엔듀로나 경량 어드벤처 영역에 비해선 무겁다. 하지만 대형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에 비하면 가볍다. 가벼우면 실력이 몇 단계 상승한다. 심리적이면서 실제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타기 편하고 부담이 적다는 뜻이다. 거기에 앞뒤 21인치와 18인치 스포크휠을 장착했다. 앞바퀴가 21인치라는 점은 험로주파성이 높다는 뜻이다. 보통 대형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이 앞바퀴에 19인치 휠을 장착한다. 790 어드벤처가 보다 본격적이란 얘기다. 서스펜션 작동 범위도 앞뒤 200㎜로 넉넉하다. 서스펜션 작동 범위가 클수록 험로를 달릴 때 충격을 더 잘 흡수한다. 울퉁불퉁한 험로가 고난이 아니라 재미로 치환된다. 이 서스펜션을 KTM이 조율했다. 다카르 랠리에서 18회 우승한 브랜드의 솜씨는 허투루 볼 수 없다.
장거리 주행에 알맞은 요소도 품었다. 연료탱크가 20ℓ로 대용량이다. 한 번 주유해 최대 450㎞를 달린다. 장거리, 게다가 오지를 달릴 때 대용량 연료탱크는 축복 같은 조건이다. 보조 연료통을 달고 다니는 건 도시에선 멋이지만 오지에선 혹이다. 결정적으로 시트고도 낮은 편이다. 830㎜ 시트고는 어지간한 동양 남자가 덜 부담스럽게 탈 만하다. 시트고가 낮으면, 역시 심리적이면서 실제적으로 더 타기 쉽다. 넘어지려고 할 때 바닥을 발로 차올리며 균형 잡는 순간이 적다고 할 수 없으니까.
종합해 보면 이렇다. 대형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에 비해 심리적 부담도 적고 타기도 쉽다. 그런 데다가 휠과 서스펜션이 험로에 더 적합하다. 장거리를 달릴 때 유용한 요소도 빼놓지 않았다. 출력이야 799cc 병렬 2기통 엔진에서 95마력을 발휘하니 아쉬울 건 없다. 언제나 욕심은 끝이 없지만, 다른 장점을 떠올리면 이득이 더 많다. 게다가 가격도 더 낮으니까.
제원만 봐도 관심도가 증폭했다. 790 어드벤처가 나오기 전부터 관심 있게 봐온 이유다.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에 관심은 있지만 대형 어드벤처가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솔깃할 수 있다. 게다가 KTM이 작심하고 내놓은 랠리 콘셉트의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이니까. 크기와 무게를 떠나 조금 더 본격적으로 모험에 뛰어들게 하는 성능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TFT 컬러 계기반에 불이 들어왔다. 곧이어 갸르릉거리는 엔진음과 슈슉거리는 배기음이 퍼졌다. 이제는 머리로 이해한 숫자들을 몸으로 체험할 차례다. 시트고는 시트 폭이 조금 넓어서 숫자보다 더 높은 느낌이 들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 차이는 대세에 지장을 주진 않는다. 흙길 탈 시외까지 달리면서 장거리 투어러로서 성격을 파악했다.
하드웨어 제원만 출중한 줄 알았더니 편의·안전장비도 빼곡하다. 퀵시프트(클러치를 잡지 않고 기어를 변속할 수 있는 기능)는 업·다운 모두 반응이 빠르다. 뒷바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트랙션 컨트롤뿐 아니라 코너링 ABS까지 장착했다. 알게 모르게 든든하다. 주행 모드는 세 가지. 로드와 오프로드, 랠리로 나뉜다. 랠리 모드는 선택사양인데 국내에 출시할 때 이벤트로 끼워준다. 각 모드는 이름 그대로 주행 상황에 적합하게 스로틀 반응을 달리한다. 특히 랠리 모드는 다른 모터사이클의 트랙 모드와 비슷하다. 모터사이클이 각성했달까. 시간을 다투는 랠리에 걸맞게 자비 없이 출력을 흩뿌린다. 처음에는 너무 예민해서 놀랄 정도였다. 물론 어느새 랠리 모드의 흉포함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럼에도 로드 모드에 놓고 주로 달렸다. 장거리를 달릴 때 그게 더 편하고 부담 없다. 출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당연히 적다. 맘껏 스로틀을 감으니 속도가 꾸준히 올라갔다. 출력보다는 배포가 먼저 고갈한다. 790 어드벤처는 형제 모델인 네이키드 장르 듀크 790 엔진을 공유한다. 어드벤처 장르에 맞게 토크를 두텁게 했을 뿐이다. 듀크 709는 타기 쉽고 알기 쉬웠다. 790 어드벤처 역시 끈끈한 출력을 부드럽게 뽑아 쓰는 맛이 선명했다. 게다가 연료탱크가 차체 하단에 위치해 무게 중심이 낮다. 시트에 앉아 보면 아래에 무게 추라도 달아놓은 듯했다. 즉 주행할 때보다 안정적이란 뜻이다. 코너를 돌 때도, 흐트러진 균형을 다잡을 때도. 험로에선 이런 균형 감각이 더욱 빛을 발한다. 하단 연료탱크는 차체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니 일석이조다. 아니, 대용량까지 생각하면 일석삼조다. 랠리 머신의 설계 사상이 엿보이니 감성적으로도 괜히 든든해진다. 랠리에 출전하지 않더라도, 기분이 중요하다. 원래 모터사이클은 상상하면서 타는 즐거움이 크다. 물론 실력을 갈고닦을 도구로서, 790 어드벤처는 여지도 여력도 충분하다.
790 어드벤처를 타고 흙길을 한참 달렸다. 도로보다 흙길에서 확실히 매력이 치솟았다. 자갈이 깔린 길에서도, 울퉁불퉁 요동치는 길에서도 두려움보다는 즐길 여지가 컸다. 더 도전하고픈 마음이 차올랐다. 역시 의욕은 합당한 장비를 통해 구체화된다. 실력 또한 합당한 장비가 발전시킨다. 790 어드벤처는 합당했다. 790 어드벤처를 타보니 상위 트림인 790 어드벤처 R에도 관심이 생겼다. 이 한 마디로 결론 내면 어떨까. 지금 유라시아 횡단을 다시 가라면 가장 먼저 떠오를 모델. 790 어드벤처는 확실히 본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