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60세’시대에 남자 나이 마흔이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모른 척해야 점잖은 거고, 새로운 도전은 무모한 일이고, 남자가 몸치장에 신경을 쓴다는 건 날라리나 하는 짓이었다. 중년은 피 끓던 청춘에 벌렸던 일과 열정을 갈무리하고 편안한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 진지한 시기로 여겨졌다.
‘인생 80세’를 넘어 ‘100세’시대가 다가오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불혹(不惑)’의 중년이 됐는데,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이나 남아 있다.
옛날 식으로 하자면 남은 40년, 50년을 노년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생 2모작과 제 2의 청춘이 불가피한 이유다. 요즘 신인류로 각광받는 ‘꽃중년’은 일찌감치 100세 시대 변화를 간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청춘을 즐긴다. 20~30대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매력적인 용모와 뜨거운 열정까지 갖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등장했던 레옹족과는 사뭇 다르다. 레옹족이 20대 젊은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패션스타일에 온통 신경을 쓴 데 반해 한국식 꽃중년남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영화 <킹스맨> 대사처럼 태도에 집중한다. 외모뿐 아니라 일과 사랑, 음식, 취미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를 희망한다. 한국식 꽃중년남 트렌드 중심에 서 있는 3인방을 만나 이 남자들이 사는 법에 대해 들어봤다.
꽃중년에게 스타일이란민성원 소장(이하 민 소장): 중년은 남자들이 멋 내기 아주 좋을 때입니다. 30대에는 회사 가면 상사 많고 주변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데, 50대가 되면 어디 가도 나보다 위가 적어요. 무슨 옷을 입든지 아내 빼놓고는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용감해질 수 있는 거죠. 마음껏 내 맘대로 입는 겁니다.
간호섭 교수(이하 간 교수): 남자들이 멋에 대해 갖는 생각이 확실히 변한 것 같아요. 어릴 때 골목에서 보던 아저씨들과 요즘 40~50대 남자들은 다르죠. 사람들이 신체적 물리적 나이는 먹어도 정신적인 것까지 늙고 싶지 않아야죠. 수명이 길어지면서 젊음을 더 오래 천천히 유지하려는 욕망은 훨씬 커졌습니다. 꽃이 오래가려면 물을 자주 갈아줘야 하듯이, 꽃중년도 멋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이고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한태민 대표(이하 한 대표): 꽃중년에서 꽃보다 중년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중년 남자들이 멋을 낸다는 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걸 의미하죠. 먹고사는 일차적 문제에서 벗어나 내 삶을 즐기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겁니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돈을 벌면 주상복합아파트에 살면서 벤츠 타고 룸쌀롱과 골프 다니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요즘에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 취향에 맞는 집과 차를 고르고, 본인이 좋아하는 옷과 취미에 투자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국 중년남자 옷차림에 대해민 소장: 학교 동창회 나가보면 기업체 대표, 고위 공무원, 언론사 간부 등 사회적 지위들은 높은데 옷은 정말 못 입어요. 술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 옷에 돈쓰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친구들 실수가 뭐냐면 아내가 골라주는 양복과 넥타이를 입는다는 거죠. 여자들은 남자 옷 잘 몰라요. 아내표 옷은 거의 필패입니다. 옷 잘 입으려면 본인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꾸 입어봐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옷 잘 입는 남자들에 대해 박수 쳐주는 분위기로 바뀌어야죠.
한 대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는데 길거리 아저씨들이 매우 멋있는 거예요. 편안한 면바지에 꽃무니 셔츠, 주렁주렁 맨 목걸이, 맨발에 로퍼(끈 없고 굽 낮은 캐주얼화)차림이었죠. 한번은 체육관을 갔는데 아저씨들이 전부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은 거예요. 어떤 할아버지는 양말에 가터벨트까지 하고 있었고, 어떤 분은 입고 온 양복과 똑같은 원단으로 만든 팬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 이 사람들 왜 이럴까 하나씩 따라해 봤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고급스럽고 특별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나를 대우해 주는 거죠. 이탈리아 남자만큼은 아니라도 한국 중년남자들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아요. 동창회 가면 삼촌뻘 옷차림하던 친구들이 요즘은 패션잡지도 보고 옷에 관심 갖고 투자하는 친구들이 늘었습니다.
간 교수: 패션을 하니까 주변에서 옷 잘 입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하는 말이 겁내지 말고 시도해보라는 거죠. 머리모양만 바꿔도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앞머리 바꾸기 꺼려지면 옆이나 뒷머리라도 다르게 바꿔보세요.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해보면 원래대로는 절대 못 돌아갑니다. 옷은 지금 입는 것보다 몸에 맞게 입으라는 거죠. 신발도 검은색 구두 말고 갈색으로 바꿔보세요. 옷이나 구두 살 때 늘 사던 브랜드 말고 셀렉트숍 같이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스타일을 계속 시도해보면 주변 시선이 달라질 겁니다.
스타일에 영감 주는 롤모델이 있다면민 소장:영화 <007>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죠. 날렵하고 민첩하고 무엇보다 양복 입은 스타일이 멋있습니다. 제가 워낙 슈트를 좋아합니다. 남자들은 슈트를 입었을 때가 가장 섹시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고급 스포츠카를 탔다고 생각해보세요. 반팔 셔츠에 반바지보다 슈트를 입고 타면 훨씬 멋스럽잖아요. 슈트를 입어서 안 좋은 경우는 없습니다. 얼마 전 돌잔치에 초대 받았는데 분위기를 몰라서 슈트를 입고 갔는데 행사 주인이 고맙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 슈트는 남자들만 입을 수 있는 성인 남자의 특권이기도 하죠.
간 교수: 영국의 윈저공이 떠오릅니다. 사람들 누구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죠. 남성복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원저스타일’의 윈저공이 있습니다. 그는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포기한 로맨틱한 남성이죠. 영국처럼 보수적인 클래식이 자리 잡은 나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타일을 남겼다는 건 옷을 정말 잘 입었다고 볼 수 있어요. 옷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했던 담배갑, 명함지갑 그리고 연인에게 선물했던 최고급 보석들이 전 세계 스타일 애호가들에게 인기 경매품일 정도로 멋에 관한 한 초절정 고수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대표:두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 옷차림은 할리우드 명배우 스티브 맥퀸이 롤모델이고, 차려입고 싶을 때는 프랑스 극작가 장 콕도를 좋아하죠. 스티브 맥퀸은 특히 영화 <불리트(Bullit)>에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에선 평소 슈트를 잘 입지 않던 그가 양복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클래식하면서 자연스럽고 굉장히 멋있습니다. 장 콕도는 이름난 베스트드레서입니다. 그가 멋있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써놓고서는 무심하게 입은 듯 보이는 겁니다. 원래 옷 잘 입는 사람들은 뭐하나 빈 듯한 여백의 미를 즐깁니다. 멋 내지 않은 것 같은데 멋있는 거 그게 어려운 거고 진짜죠.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다. 음식 취향은 민 소장:요리를 직접 하는 건 전혀 관심 없어요. 오래 다녀서 편안한 음식점을 찾아다닙니다. 오장동 함흥냉면집이 대표적이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다녀서 지금은 그 집 삼대를 전부 알아요. 주문 안 해도 척척 알아서 음식 나오고 수육 반 접시만도 내줍니다. 이런 단골집이 강남 하동관(곰탕집)과 영동 돌곱창이 있죠. 고급 레스토랑을 가기도 하지만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전통 맛집이 제 취향입니다.
간 교수: 패션처럼 음식도 감각이죠. 음식도 이것저것 시도하면 잘 만들 수 있습니다. 패션디자이너 중에 음식점 운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저도 미국 유학서 돌아올 때 옷보다 그릇을 더 많이 사왔습니다. 메밀 동치미국수, 태국식 볶음밥, 샐러드 곁들인 치킨요리 등 친숙한 요리들을 만들어서 예쁜 그릇에 담아 먹는 걸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에서 사 가지고 온 프랑스산 앤틱 은식기들에 베트남식 요리를 해서 담아 먹었는데 재밌더라고요.
한 대표:전 요리하는 거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거죠. 그 나라 사람들은 요리와 음식, 먹는 얘기하는 걸 즐거워합니다. 요리를 트렌드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 돼요. 저한테 요리는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두껍게 썰어 오븐에 구운 스테이크를 나무 도마에 올려놓고, 생선 샐러드와 파스타 그리고 화이트와인 한 잔 곁들인 저녁 식사 좋아하죠.
각자 분야에서 전문가들이다. 일에 대한 철학은민 소장: 동창들을 보면 학교 다닐 때 잘 놀고 활발했던 친구들이 다 잘된 것 같습니다. 공부만 하던 친구들은 기대보다 안 된 경우를 많이 봤죠. 저마다 각자의 기(스피릿)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막에서도 우물을 판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기를 잘 유지하려면 땀과 눈물을 체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죠.
간 교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걸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변에 보면 중년에 회사에서 명예퇴직 당하면 이탈리아에서 요리 배워 음식점 차리겠다는 사람들 많아요. 꿈이 오너 셰프라면 왜 명퇴까지 기다리나요. 청춘을 바쳐도 어려운 일이라 바로 시작해도 어려울 텐데요. 앞으로도 좋아하는 패션을 계속 사랑하면서 일하게 되길 바라지요.
한 대표: 그 점은 간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일 년에 유럽출장을 석 달씩 가는데 그게 싫으면 하겠습니까. 저는 짐 싸는 것도 즐겁습니다. 출장 일정에 맞도록 아주 꼼꼼하게 쌀 수도 필요한 것만 챙겨서 3분 만에 꾸릴 수도 있어요. 이 짐 싸는 노하우를 책으로 쓰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토스카니 지방을 주로 다니는데, 좋은 뷰티제품과 맛있는 음식점들이 많습니다. 찾아다니면서 현지 사람들과 계속 만나고 친해지다 보니 새로운 사업아이템이 계속 보이는 거죠. 일은 좋아서 해야지요.
꽃중년에게 취미는 필수라고 하는데민 소장: 스포츠에 빠져 있습니다. 일을 제외하면 그냥 체육인입니다. 아침마다 한강 달리고 저녁마다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몇 시간씩 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건 1년 정도 됐어요. 살이 안 찌는 체질인줄 알았는데 50살이 넘고 보니 군살이 붙더군요. 아내가 제 배를 보고 우리 아기 언제 나오느냐고 해서 자극 받았죠. 억지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재밌는 거예요. 이참에 헬스대회도 도전해보자고 해서 나간 쿨가이 선발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했죠. 여세를 몰아 연말에는 머슬 마니아에도 도전할 계획입니다.
한 대표: 와인을 좋아합니다. 유럽 출장 갈 때 국내 항공기와 에어프랑스를 두고 매번 고민합니다. 편하기는 국내 항공사가 편한데 에어프랑스를 타는 건 순전히 와인맛 때문이죠. 어찌 보면 별거 아닌데 그 정도로 저한테는 와인이 중요합니다. 와인을 모으는 건 아니고 음식과 사람들, 모임에 따라 적절한 와인을 즐기는 걸 선호합니다.
간 교수: 여행을 자주 가는데, 일로 가기도 하고 취미로 갔다가 일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에 뉴멕시코 화이트샌드를 ‘인스피레이션 헌팅(영감 사냥)’으로 갔지요. 항상 새로운 곳을 찾아 영감을 얻고 휴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안 가본 여행지를 찾아다닐 계획입니다.
남자들의 로망 3W(Wheel 자동차·Woman 여자·Watch 시계)에 대한 생각은민 소장: 빠르고 실용적인 차에 대한 관심이 많지요. 지금 아우디 타고 다니는데 바꾸려고 벤츠 S63으로 스폐셜 오더했어요. 크고 빨라서 좋고 뒷자리에 타도 직접 운전해도 손색이 없는 차인 듯합니다.
한 대표: 이탈리아에 있을 때 폭스바겐 투와렉을 탔는데 지금도 애용하고 있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내 인생에 선물을 줄 겸 페라리를 타보고 싶습니다.
민 소장: 페라리는 너무 비현실적인 차예요. 1년에 수리비로 몇 천만원을 낼 각오를 하고 타는 차인듯 합니다.
간 교수: 독일 차는 5년을 타도 고장이 안 나는데 이탈리아 차는 수리를 낭만으로 여기는 차죠. 예를 들어 포르쉐가 늘 내 곁을 지켜주는 아내라면, 페라리는 선물 사줄 때만 잘해주는 애인 같아요.
민 소장: 3W 중에서 우먼은 나이에 상관없이 예쁜 여자가 좋습니다. 아내가 왜 나랑 결혼했냐고 물어보기에 예뻐서라고 했죠. 사실이기도 하고.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 먹고 얘기하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습니다.(민 소장 아내는 소프라노 정꽃님이다.) 시계는 롤렉스와 IWC를 번갈아 차고 있습니다.
한 대표: 아내와 딸 셋이라 여자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요. 가족은 나를 탄탄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떳떳하게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시계는 별 관심 없어요. 몇 개 있던 것도 달라는 지인들에 선물했습니다. 시계 말고 대담한 디자인의 발찌나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애용합니다.
간 교수: 가족은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나는 그런 점에선 개인주의 성향인 듯합니다.(간 교수는 싱글남이다.) 자동차와 시계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주변에서 몇 십억은 벌었다고 합니다.
[김지미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