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 신제윤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현 금융위원장)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를 발행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금리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질적인 외화유동성 문제가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우리나라 원화 가치는 달러당 1500원까지 급락하면서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고조됐다. 금융위기가 한 고비 넘어간 2009년 4월 우리나라는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지만 당시 7.26%에 달하는 고금리를 부담해야 했다. 미국채 대비 가산금리는 4.375%에 달했다. 한국은 이렇게 아주 어렵게 달러 ‘보릿고개’를 넘었다.
외화 ‘보릿고개’는 옛말
하지만 그로부터 4년 5개월이 지난 올해 9월 발행된 외평채 금리는 연 4.023%로 미국채에 1.15% 가산금리를 더한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달러를 구하는 게 그만큼 쉬워져 금리를 더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는 정부 뿐만이 아니다. 금융기관과 기업들도 달러를 구하기가 쉬워지고 있다. 9월 이후 우리 은행들은 활발하게 외화채권을 낮은 금리에 발행하고 있다.
달러가 넘치면서 국내에서 조달하는 달러금리가 해외에서 조달하는 달러금리보다 낮은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는 단기 금리인 달러 콜금리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국내 은행과 외은지점 간에 달러를 거래하는 시장이다. 국내에 위치한 한 외은 지점의 경우 국내에서는 연 0.12~0.15%에 달러가 거래되는데 역외(싱가포르)에서는 연 0.12~0.24%에 달러를 조달하고 있다.
외은 지점들의 조달금리는 해외 기준금리에 본점 신용도 등이 가산된다. A지점은 본점 은행의 글로벌 신용도가 높아 평균적인 조달금리가 낮은 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워낙 달러가 풍부하면서 한국에서 조달하는 금리가 더 싸진 것이다. 단기금리는 이런 역전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고 장기물은 국내와 역외의 금리 차이가 크게 좁아졌다.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국내에서 달러화 오버나이트 콜 금리는 지난 4월말 연 0.22%에서 11월 6일에는 0.13%까지 떨어졌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달러조달 금리도 크게 낮아졌다. 외국계 B은행 서울지점장은 “달러를 조달할 때 신용도가 가장 높은 정유회사들은 기준금리에 24bp(1bp=0.01%) 가산한 수준에서 달러를 빌리고 있다”면서 “달러가 흔해지면서 대기업들의 외화조달 비용도 크게 낮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다 보니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달러를 조달해 영업을 해왔던 외은 지점들도 수익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B외은 지점 지점장은 “국내와 해외 달러 조달금리가 뒤바뀌는 것은 일시적으로 발생하기는 했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따라 영미권 외국계 은행 지점은 올해 수익이 2~30% 정도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부 은행은 50%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대기아차 수출선착장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
2009년에 비해 달러 조달 환경이 반전된 것은 우리나라에 달러가 넘치기 때문이다. 달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유입되고 있다. 첫 번째는 경상수지 흑자다. 우리나라는 2009년 이후 꾸준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이 수입보다 많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수지 흑자는 2012년 이후 급증하고 있어 2012년 2월 이후 20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 기간 누적 흑자액만 928억달러(약 98조원)다.
두 번째는 외국인의 투자자금 유입이다. 2009년 이후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주식 채권 투자자금이 꾸준하게 들어왔다. 주식의 경우 2009년 이후 유가증권시장에만 68조원이 유입됐다. 특히 8월말 이후 3개월 동안에만 13조가 넘는 외국인 자금이 확보됐다.
채권시장에서도 2009년 이후 외국인 채권투자 잔액이 58조원이 늘어났다. 외국인들은 주로 달러를 원화로 바꿔서 우리나라 국채를 사들이고 있다. 주식과 채권에만 2009년 이후 126조원이 늘어난 것인데 그만큼 우리나라에 달러가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국내에 쌓이는 달러도 기록적인 수준을 만들고 있다. 10월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3432억2600만달러로 3달 연속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거주자 외화예금도 3개월 연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면서 10월말 기준 461억2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거주자 외화예금이란 내국인과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외국인 및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기업 등이 시중은행이나 외은지점에 예금한 외화를 말한다. 전체 예금 중 약 85% 정도가 미 달러화다.
상식적으로는 최근 원화값이 꾸준히 올라가면 외화예금을 원화로 바꿀 때 가치가 계속 떨어지므로 외화예금을 줄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외화예금은 대부분 기업예금인데 기업들은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은행에 쌓아두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외환당국이 일정 수준으로 원화값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자 자금이 급하지 않은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외화예금 회수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도 달러화 예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익성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외화예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외화부문 NIM(순이자마진)은 지난해 0.6% 안팎에서 최근 0.3%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달러화 예금은 운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피 대상이다. 달러화 예금은 대부분 기업들의 결제성 예금으로 외화 MMDA거나 1~3개월 만기 정기예금이다. 정기예금은 3개월 만기가 연 0.3% 정도의 외화예금 금리를 준다. 반면 달러화 대출은 주로 중장기로 대출해야 하는데 기업들이 맡긴 정기예금을 언제 찾아갈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은행으로선 쉽게 대출에 활용하기가 어렵다.
은행들 달러 운용에 고심
국내 시중은행들은 풍부한 달러 유동성을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나 뚜렷한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외화대출의 경우 원화대출보다 더 까다로운 감독을 받기 때문에 은행들이 장기 대출로 활용하기가 어렵다”면서 “대출관련 규제가 완화되지 않으면 외화자금의 미스매치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러기 아빠들 한숨 돌려
국내에서 달러가 남아도는 것을 가장 반기는 측은 유학생을 뒷바라지 하는 부모들이다.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는 화색이 돌 정도다.
한 은행원은 “일부 고객들은 달러화 값이 바닥이라는 생각에 미리 환전을 해놓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지금처럼 달러화 가치가 계속 하락한다면 최대한 송금 시점을 늦추는 것이 유리하다. 특히 달러화의 경우 시중은행에 맡긴다고 해도 예금금리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미리 바꿔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외화예금 금리 자체가 높은 지역으로 송금한다면 외화예금에 가입해 놓는 것도 괜찮다.
한 외환은행 울산지역 지점 행원은 “본국에 송금을 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원화가치가 올라가면서 더 많은 금액을 송금할 수 있게 됐다”면서 “내국인의 여행 환전 수요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기존에 외화예금을 보유하고 있던 개인들은 지금 손해를 보고 원화로 바꿔야 하는지 아니면 바닥이므로 좀 더 보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문의하고 있다.
최현호 외환은행 외환업무부 차장은 “은행에서 적금형태의 외화예금 상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이를 꼭 가입해야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보다는 환전 시 우대를 많이 하는 은행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달러가 풍부해지면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 그동안 늘 달러 구하기가 어려운 나라여서 높은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는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달러 공급이 풍부해졌다. 이는 곧 낮은 환율로 나타나게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중소기업들이 가장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 담당자는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대기업들은 환율 외에도 차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면서 “반면 중소기업은 환율에 의존한 부분이 커서 원화값 급등 시 충격이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